너희는 너희들의 만남과 이별 속에 있는 의미를 아니?
다행히 우울증은 아니다. 그런데 집에만 있기를 3주가 다 돼 간다. 물론, 장을 보러 가거나, 주말에 교회를 갈 때는 외출한다. 그 외에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만날 사람도 없다. 있어도 수다를 떨 기분도 아니고, 할 말도 없다. 말 안 하고 싶다. 내 인생에 이런 적이 또 있었던가?
계획에 없던 호주행이라 모아논 돈이 없었다. 계획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 하지만 말이다. 찬장에 작은 꽃병이 있다. 금요일이었나? 셰어생 3명이 알아서 매주 80불씩 넣어둔다. 오지셰어(당시에는 한국인들과 사는 한국인 셰어, 외국인들과 사는 오지셰어로 나눠져 있었다. 평균적으로 같은 컨디션일 때, 오지셰어가 30불 정도 비쌌다) 임에도 저렴한 축에 속했다. 솔깃해서 선뜻 살게 되었는데, 이유가 있긴 있었다. 집에서 15분을 걸어야 트레인역이다. 트레인 타고 시티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대략 시티를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 반이다. 감안해도 약간 저렴한 편이다. 그렇게 매주 80불은 고정지출이다. 거기에 식비, 아끼면 50불, 130불이면 한국돈 당시 대략 11만 원, 그럼 한 달 약 40만 원. 아끼면 말이다.
울월쓰, 호주 슈퍼마켓의 양대산맥이다. '콜스'도 있는데 왠지 그린컬러의 '울월쓰'가 더 마음이 갔다. 슈퍼마켓 둘러보는 것은 내 오랜 취미다. 어릴 때 어머니와 5일장을 돌면서 맛난 것을 사 먹고, 필요한 물품을 사던 일이 꾀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사람구경, 물품구경이 재밌었다. 더군다나, 한국보단 약간은 한산하고, 처음 보는 물품이 많아서인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무료함을 달래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더위를 날리며 시간 때우기 참 좋다. 그런데 어느 코너에서 내 발걸음이 멈춘다.
파스타면 2불, 소스 2불. 생각보다 자주 할인을 했던 기억이 있다. 저렴했는데 거기에 더 할인을 하니 놓칠 수 없다. 하나 둘, 장바구니에 담는다. 양을 아직 모르니, 먹어보고 더 사기로 한다. 장바구니에 넣으려는데 뭔가 내 마음에 속삭인다.
'호주 왔으면 서양음식에 적응해야지.'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왠지 씁쓸하다. 통장 잔액에 따라서 합리적인 생각 혹은 핑계가 될 수 있다. 어쨌든, 궁색해지기 싫어 곧바로 다시 구경모드로 들어간다. 이제는 음료 코너다. 원래 마시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한참을 구경한다. 신기한 음료가 가득하다. 이것저것 뒤적거린다. 그러나 역시 결국은 가격이다. 레모네이드 1.5불. 약간 이마트 노브랜드 느낌이다. 아마 저렴한 순서로는 물 다음이었을 것이다. 1.5불에 1.5리터 음료라니! 안 살 수 없다. 가격도, 합리화도 끝내준다.
행복? 한 마음으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떻게 요리할까? 아차, 한 번도 스파게티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땐, 유튜브에서 요리 방법을 찾던 시절이 아니라서, 네이버를 검색한다. 쉬웠다. 라면보다는 좀 더 오래 면을 익히고, 물을 버리고 소스를 부으면 된단다. 간단했다.
어설픈 솜씨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릇에 담아서, 젓가락을 쓸까 포크를 쓸까? 호주니까 포크다. 레모네이드 한잔과 함께 식사시작. '그래도 나름 따뜻한 한 끼네.' 헛웃음 치며 돌돌 말아본다. 당연히 네이버에서 본 사진과는 너무 달랐다.
장소도, 언제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냄새는 기억난다. 뭔가 이국적이지만 군침을 돌게 했던 그 냄새. 파스타 소스 냄새다. 그리 익숙하진 않았지만,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그래, 함께 라면 뭐든 괜찮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고' 보다, '그녀와 함께라서 모든 게 좋았던 시간들' 말이다. 김밥천국 두줄에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때도 있었고, 전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서 서로를 원망했던 때도 있었고, 용기 내어 그녀의 특별한 입맛에 맞추어 매운 불낚집(나는 매운 음식이 안 맞음)에서 땀 뻘뻘 흘리며 먹고는 다시는 오지 않으리 속으로만 맹세했던, 그래도 함께라서 모든 게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함께가 아닌데 괜찮아야 하는 시간들을 살고 있다. 문득 그 냄새가 확 내 코에 닿을 때, 나는 포크를 들다가, 멍하다. 다시 정신 차리고 입에 넣어 씹다가, 눈물 찔끔하다가, 멍하다가, 다시 씹다가를 반복한다. 레모네이드가 목을 지나가면 정신이 잠깐 돌아온다. 딱 1.5불만큼 만이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장비구니 속 같은 메뉴다. 이미 팬트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1.5불만큼이라도 정신이 돌아오도록 몇 개를 집는다. 아직 김이 빠지지도 않은 게 냉장고에서 기다리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3일은 파스타를 먹었다. 먹어야 했다. 먹고 싶었다. 가슴이 아니고 목을 톡 쏘아 주어서 다행이라며 마시고 또 마신다. 목이 쓰라려서 정신이 돌아온 건지, 상쾌해서 그런 건지, 그냥 저렴해서인지 헷갈렸지만 뭔가 돌아오게 해 주니 좋다고 생각하면서 또 들이킨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나고, 입이 먼저 정신을 차린다. '그래 이젠 다른 걸 찾아보자'라는 생각이 들 때쯤, 요동치던 마음만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잔잔해진다.
그때 이후, 어느 순간부터 파스타와 레모네이드는 더 이상 내 장바구니에서 만나지 못했다. 헤어지기로 결심했나 보다.
'너희는 너희들의 만남과 이별 속에 있는 의미를 아니?'
대답 없는 너 인걸 알면서도 혼자 묻는다. 이제 묻고 싶지도 않다. 먹고는 살고 있으니 완전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지만, 아직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