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21살 여름, 친구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일이 세워진 시점부터 혼자 디데이를 정해놓았다. 여행일까지 다이어트를 해야만 했다. 여행을 갔다 와서 체중이 오를 각오를 하고 49kg까지 빼기로 했다. 여행은 3개월 정도 남았지만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체중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칭 '프로 다이어터' 시절의 나는 체중을 하루에 시도 때도 없이 측정했다. 공복에 속옷만 입은 채 한 번, 밥 먹고 나서 그리고 자기 전에 한 번. 틈만 나면 거실에 있는 체중계에 올라갔다. 다음날 체중이 얼마 나갈지 무의식적으로 계산했다. 지금 탈다이터가 된 시점에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니, 스스로를 얼마나 옥죄고 있었는지 체감이 된다. 하루종일 머릿속에 몸무게와 음식만으로 채워진 인생은 초조하면서, 무료하다.
제주도 여행 당일 체중계에 올라갔다. 49kg까지 빼는데 결국 성공했다.
이제 여행 가서 마음 놓고 먹어야지.
"여행 =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21살의 나는 배가 터질 때까지 먹기로 다짐했다. 김포 공항에서부터 카페에서 가장 칼로리가 높은 케이크를 시켜서 단숨에 먹어치웠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다이어트를 해야 된다는 초조함에 제주도에 가서도 배가 터질 것 같음에도 계속 먹었다. 그동안 참았던 식욕이 한 번에 폭발했다. 먹는 순간에는 행복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얼마나 살이 쪘을까? 내일은 식단을 어떻게 하지? 일주일이면 적어도 51kg까지는 뺄 수 있겠지?'
체중계에 과감히 올라갔다. 54kg. 예상했던 만큼 쪄서 놀라지는 않았다. 그날 바로 홈트를 하며 그동안 먹은 음식을 '회개'하려고 했다. 먹는 게 죄도 아닌데 그때는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하며 운동을 했다. 다이어트가 심어놓은 강박과 끝도 없는 초조함은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않았으나, 야금야금 내 정신적인 평화를 갉아먹고 있었다.
22살이 되고 직관적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부산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음식에 대한 집착을 놓고 여행에 대한 관점을 바꾸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에는 그 지역에서 먹는 맛있는 음식도 존재하지만,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 평소 보지 못했던 풍경,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 또한 존재한다. 시야가 넓어졌다. 여행 당일에 힘겹게 일찍 일어나서 공복 운동을 했다거나, 전 날 굶어버리는 무모한 행동을 안 했다. 부산 여행 전날에는 친구와 만나서 솥밥을 든든히 먹었고, 전전날에도 친구와 홍대 일식 맛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여행 당일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여유롭게 준비하고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여행 가서도 '마인드풀 이팅'을 연습했다. 오히려 맛을 음미하면서 먹으니 부산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허겁지겁 먹으면서 음식을 '채워 넣기'에 바빴던 제주도 여행과는 달랐다. 적당히 배부르다고 느낄 때 수저를 내려놓았다. 음식을 함께 먹는 친구들에게 집중하고, 내 감정에 집중했다. 부산 여행을 통해서 나는 바다를 정말 좋아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지금의 내 이름 '윤슬'이 생긴 이유도 바다를 사랑해서 지었다. 숙소 앞 기장 바다, 친구들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며 밤바다 공기를 마신 기억, 첫날 간 밀면 집이 맛있어서 마지막 날에도 간 기억, 모두 생생히 기억난다. 같은 친구들과 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여행은 내 기억에서 짙게 남아있지 않다. '먹는다'는 행위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음식의 맛은 부산에서 먹었을 때가 기억에 남았다.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가 부산이다. 바다와 육해공 음식, 작년 부산 여행의 추억 덕분에 사랑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또한,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여행의 묘미를 이때부터 즐기게 되었다.
여행 후, 다시 굶으면서 살을 빼려고 기를 쓰는 대신, 충분한 휴식을 가지고 잠깐 멀어졌던 집밥을 먹으며 원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여행 후 샐러드를 안 먹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가 되어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 지금 나는 영국에서 교환 생활 중이다. 작년에 직관적 식사를 접하고, 탈다이어트를 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천운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교환 학생으로 지내면서 영국 근교 여행을 다니고, 유럽 여행을 다니고 있다. 아직까지도 다이어트에 전전긍긍하고 운동 강박에 빠져있었다면 여행을 피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채,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흐린 필터를 끼고 바라봤을 것이다. 여행 가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숙사에서 굶었을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운동을 못한다는 사실에 불안했을 것이다. 수도 없이 많은 부정적인 가정들이 떠오른다.
교환 생활을 하면서 마트에서 좋아하는 사워도우 빵과 빵에 발라먹는 다양한 스프레드를 고르는 데 관심이 많다. 영국의 과자들도 하나씩 시도해보고 있다. 기숙사에서 직접 요리하고 맛있는 간식들을 먹는 게 하루의 소소한 행복이다. 배부름 신호를 존중하면 간식도 적당한 양까지 먹게 된다.
다음 달에는 3주 동안 유럽 곳곳을 여행 다닐 예정이다. 2년 전만 해도 한 달 동안 운동을 못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매일 바깥 음식을 먹을 생각에 초조해졌을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살'에 집중하게 되면, 여행에서 식단과 운동을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진다. 지금의 나는 설레기만 하다. 친구와 유럽의 여유를 즐기면서 간직하고 있던 낭만을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브런치로 빵을 먹으면서 즐기는 커피 한 잔. 음식으로 얻을 행복들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나의 일상은 살이 빠지고 찌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과 운동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에 놓이게 되던 초조할 일이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시점, 내일도 친구와 근교 여행을 떠난다. 아침에 가볍게 운동을 했다. 운동은 언제나 체력을 길러주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으면 하는 편이다. 못하면 그만이다. 운동 후 요즘 빠져있는 사워도우 빵에 좋아하는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먹었다. 오후에 기숙사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핫초코와 브라우니를 무료로 나눠주는 기분 좋은 이벤트가 있어 내려가서 받았다. 머그컵에 핫초코와 마시멜로우, 휘핑크림을 취향껏 뿌렸다. 브라우니 3조각과 핫초코를 들고 기숙사 방에서 먹었다. 핫초코는 너무 달아서 반 정도 마시고 달달한 브라우니를 야금야금 먹었다. 저녁에는 김치볶음밥에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뿌려 플랫메이트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식후 간식은 항상 당기는 편이라 작은 비스킷을 한 조각 먹었다. 과자까지 먹고 나니 적당히 배가 불렀다.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음식을 고르고, 만족할 때까지 먹는다. 이제 의식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직관적 식사법이 베어 들어 있다.
"언제든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만으로 음식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
여행하는 날은 나의 몸을 평가하는 날이 아니다. 시험 준비를 하듯이 스스로를 채찍질할 이유가 없다. 내일은 친구와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맞이할지, 어떤 음식을 함께 먹을지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상상을 하며 잠을 푹 잘 예정이다.
탈다이어트를 해서, 직관적 식사를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