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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29. 2023

뾰족하게 먹으면 기분도 뾰족해진다

폭식과 절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먹어야 한다


그날 아침도 나는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체중계 숫자가 얼마큼 찍히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는 오늘 어떤 음식을 먹고 조절해야 하는지 계획을 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고 나서 처음처럼 한 끼는 샐러드, 한 끼는 일반식 절반과 같은 숨 막히는 식단을 지속하지는 않았다. 한번 중간에 나도 모르게 음식 맛을 느끼지도 않고 욱여넣는 모습을 보면서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경험이 터닝포인트였다. 당시 엄마가 옷을 사주신다고 해서 저녁에 옷 쇼핑을 하러 가기로 했는데 먹을 것을 꾹 참고 있다가 냉동실에 있던 치킨, 피자, 핫도그를 정신없이 흡입하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엄마한테 울면서 나의 폭식 전조 증상을 설명했고, 그날은 옷 쇼핑 약속도 취소했다.


왜 스스로 자초해서 일상의 행복을 없앤 것인가.


그 이후로 '잘' 챙겨 먹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탈다이어트의 세계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체중을 유지하고자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루에 1200kcal는 너무 적었으니깐 1500~1600kcal는 먹자! 빵도 먹고 싶으면 먹고, 배달 음식도 못 참겠으면 먹자! 대신 양을 조절하자. 그것이 건강한 다이어트, 자기 관리를 하는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운동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헬스장 pt도 처음 끊었다. 폭식증을 겪는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 보통 pt를 끊은 후 폭식증 증상이 심화되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pt를 끊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근력 운동에 재미를 알게 되었고, 근육의 움직임과 자극을 느끼면서 무게를 드는 운동이 나에게 가장 즐거운 운동임을 깨달았다. 물론 운동에 대한 강박은 있었다. 탈다이어트 이전,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한 것이 100 중에 40이라면 60은 칼로리를 털기 위해서였다.


다시 체중계 위로 올라간 장면으로 되감아보자. 이때의 '나'는 51~52kg라는 체중을 유지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항상 내가 정해둔 날이 아니면 음식 칼로리 양을 1400kcal 정도로 제한을 했다. 다음날 살이 0.5kg 정도 늘면 큰일 났다고 생각하면서 헬스를 더 빡세게 했다. 어쩌다 외식을 하게 되면 하루에 그 한 끼만 먹었고 저녁밥을 다 먹고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파 있었다. 대식가인 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중간씩 한번 그 배고픔을 못 견뎌 평소 먹지 못했던 배달 음식과 디저트들을 연달아서 먹는 순간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랑 주류박람회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오늘은 거의 술만 마실 것 같고, 박람회 이후 점심 먹으면 4시쯤 될 것 같으니깐 저녁은 그냥 굶으면 되겠다. 대충 1000kcal 정도 되겠지 뭐.

숫자 감옥에 갇힌 수감자의 계획이다.


하루하루 우리 앞에 수많은 크거나 사소한 변수가 생기기 마련인데, 항상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지면 스스로를 탓하며 반항심이 생겨 차분히 그려낼 수 있는 그림도 아무렇게나 덧칠해 구겨버리곤 한다.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폭식증은 정확히 이와 같은 방식으로 흘러간다.


박람회에서는 각종 술만 조금씩 홀짝대려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안주를 먹자는 친구의 말에 탕후루와 과자를 먹어버렸고, 박람회가 끝난 후 해장으로 마라탕까지 얼큰하게 해치웠다. 먹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채 마음 한 구석 불편한 마음의 새싹들이 계속해서 솟아난다.

술도 예상보다 많이 시음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중국당면이랑 고구마 떡도 마라탕에 넣어버렸는데...
꿔바로우는 안 먹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근데 맛있겠다...
오늘 하루 식단 망했는데 이참에 집에 가는 길에 빵집에 가서 빵을 왕창 사버릴까...?

폭식이 싫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폭식할 생각을 했다. 물론 친구 앞에서는 이렇게 스쳐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티 내지 않고 감쪽같이 숨겼다. '마라탕을 해장으로 해서 기분이 개운한 상태'라는 가면을 씌운 채 즐겁게 대화하고 헤어졌다.


폭식 욕구를 겨우 억누르고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책상에 앉아 손가락과의 전쟁을 치렀다. 배민으로 자꾸 향하는 손가락과 실랑이를 하며 30분 정도 시간을 날렸다. 결국 디저트 메뉴들을 가득 담았고, 어느새 눈앞에는 20분 후 도착일 거라는 파란색 표시가 펼쳐졌다. 자괴감과 설렘이 동시에 드는 기분. 항상 폭식 상을 차리기 직전에 드는 감정이다.


허겁지겁 봉투를 손으로 뜯고, 플라스틱과 종이 포장 그대로 둔 채 와구와구 케이크와 휘낭시에를 흡입했다. 바나나푸딩, 바스크 치즈케이크, 휘낭시에 2개까지. 지금의 나로서는 생각만 해도 니글거릴 것 같은 디저트 양이다. 놀랍게도 당시 먹고 나서도 허기가 졌다. 그때 가족 단톡에 엄마와 아빠 모두 밤늦게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내 눈은 반짝거렸다.

또 뭔가를 눈치 안 보고 먹을 수 있겠구나!

이성적인 판단은 이미 잃은 지 오래이다. 얼마 전 하루종일 주야장천 보는 먹방 브이로그에서 한 유튜버가 '트러플 크림 찜닭'을 먹은 게 아른거렸다. 순식간에 핸드폰에는 또 배민 파랑 알림 창이 떴다. 하루에만 먹을 것에 혼자 5만 원 가까이를 쓴 셈이다. 가격 걱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배달이 오고 나서 찜닭을 세팅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먹었다. 배가 찢어질 때까지 먹지는 않았지만 만족할 때까지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했다. 부모님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 남은 음식을 유리그릇에 담아내 냉동실 깊숙이 숨겼다. 봉투는 평소에 들고 다니는 큰 책가방 안에 넣었다. 능숙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불록해진 배를 보면 자기비판의 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왜 자제력이 없어서, 왜 대식가여서, 왜 그 순간을 참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며 오늘 계획이 틀어져 망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내가 위로를 건넬 수 있다면 말하고 싶다.


"오늘 하루 너는 잘했어. 너의 몸이 원해서 먹은 거잖아. 스스로를 비난할 필요도, 벌을 줄 필요도 없어. 맛있게 먹었으면 된 거잖아.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든든한 연료가 된 거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다음 날 만회하기 위해 벌을 내리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혼자만의 전쟁을 또 치른다. 점심을 굶고, 저녁에 밥을 조금 먹고.

항상 배민 vip를 달았었다. 건강을 위해서 그릭요거트, 샐러드, 샌드위치 위주로 먹고 밥은 절반으로 먹으면서 결국 아무도 없을 때 배달을 2,3번 연달아서 먹는 현상이 참 모순적이다.



탈다이어트 전, 나의 일주일 먹는 양을 그려본다면 뾰족뾰족한 산 봉우리 모양일 것이다. 뾰족하게 먹으면 마음 역시 뾰족해진다. 저녁에 기분 좋게 호두과자를 사 온 아빠를 원망하며, 갑자기 생긴 가족과의 외식 약속에 짜증을 내며 집밥을 먹자고 우긴다. 주위에 간식을 사 오는 사람이 있다는 점, 가족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샤부샤부에 볶음밥까지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감사함을 생각하지 못한다. 예민해진 감정을 매 순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공허함과 불안감이라는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화산 폭발 마냥 급격하게 터지는 때가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보며 다이어트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황당하게도, 이것을 당시 다이어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관리.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최대한 피하고, 당 음식을 줄이기 위해 견과류나 단백질 바를 먹는 일상이 건강을 위한 관리라고 생각했다. 그릭요거트에 그래놀라를 추가하지 않고, 샐러드에는 소스를 뿌리지 않고 찍어 먹는 습관들이 당연하게 배어있어야 하며, 체중을 유지해야만 올바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인 삶은 건강한 삶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배고플 때 먹고, 더 먹기 싫으면 먹지 말아라. 샐러드 소스를 다 부어서 맛있게 먹고 싶으면 먹어라. 오랜만에 독립한 언니가 집에 놀러 와 꽈배기를 사 왔고 배가 부른데도 먹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먹어라. 강제로 '나는 먹고 싶지 않아. 나는 배불러'라고 되뇌며 먹고 싶은 욕구를 지울 수 없다. 우리의 몸과 정신이 보내는 신호를 존중하는 삶이 자연스러운 삶이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삶이다. 탈다이어트 이후 단 한 번도 디저트 폭식을 하지 않았다. 당을 허용해 주니 당을 먹는 양이 저절로 줄었다. 배달 음식도 매일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내 식사는 넘실거리는 파도이다. 평소보다 적게 먹을 때도 있고, 많이 먹을 때도 있지만 그 폭은 극단적이지 않다. 무엇을 얼마큼 먹을지 계획을 안 세우고 흘러가는 대로 먹으며 예상치 못한 음식이 눈앞에 나타나도 즐겁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뾰족했던 신경에 굴곡이 생기게 되었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거나 식단을 인위적으로 제한하고 있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당장 그만둬라. 건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건강을 망치고 있는 길이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사라져 맺고 있는 소중한 인연들과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놓치고 말 것이다.


폭식을 하기 싫은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먹어라. 먹고 싶은 무엇이든, 얼마 큼이든 그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라. 어느새 음식은 당신 삶에서 거대한 존재가 아닌, 자연스럽고도 행복한 일부가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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