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디자이너 마르틴 마르지엘라
하이엔드 브랜드로 유명한 샤넬, 발렌시아가, 구찌 등 이러한 브랜드들의 공통점이 있다. 창업자가 본인의 이름을 내세워 만들어진 브랜드라는 것이다. 그리고 창업자 본인 혹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스타가 유명해지면서, 브랜드도 같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공을 위해 많은 브랜드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TV쇼에 나가거나, 인터뷰를 응하며 자신과 브랜드를 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스테레오 타입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 아닌 브랜드자체 더 나아가 '패션'과 ‘디자인’만을 주목해 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Martin Margiela(마르틴 마르지엘라)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Maison Martin Margiela(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라는 브랜드이다.
옷 그리고 패션 그 자체로 평가받길 원했던 브랜드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엔드워프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장고티에’에서의 경험을 거쳐 1987년 8월 본인의 이름을 내건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를 론칭하였다. 이후 많은 패션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본인 스스로 미디어에 출현하거나 제대로 된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없다. 그는 본인이 만든 옷이 대중에게 인정받길 원했지 본인이나 브랜드로고가 주목받길 원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행보로 자신의 패션쇼에서도 모습은 전혀 비추지 않기도 하며, 패션쇼의 모델들이 얼굴을 가리고 쇼를 진행하며 옷에만 더욱 집중받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또 마리지엘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4개의 하얀 스티치는 브랜드가 아닌 옷자체로서 평가받기 위하여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하얀 태그를 달기 위함이었는데, 단순한 하얀 태그는 상표권 등록이 어려워 하얀 스티치를 태그 각 모서리에 덧대었고, 이 태그가 쉽게 제거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현재는 마르지엘라를 대표하는 디자인 요소가 되었다.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브랜드
1981년 '레이카와 쿠보'의 꼼데가르숑 파리컬렉션이 성공적으로 열리며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때 같이 영감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마르틴 마르지엘라이다.
이 시기는 꼼데가르숑과 같이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브랜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한데 해체주의란 원래 철학, 예술 혹은 건축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로써 탈형식주의를 기반으로 기존의 것을 파괴 또는 해체하거나 풀어헤치고 이를 재조합하는 형태의 행위를 말한다. 이를 패션에 적용시켜 ‘기본’, ‘정상’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것을 재탄생시켜 해체주의적 패션 디자인이 만들어졌다.
그 때문인지 메종 마르지엘라에선 기존의 기성복들과는 차별화된 디자인의 제품이 많이 나왔다. 중고 옷들을 분해하여 다시 하나로 합쳐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거나(이후 넘버링 0번 Artisanal 라인이 된다) 일부러 봉제선을 드러내거나, 안감과 겉감을 뒤 바꾼 재킷처럼 기존의 것과는 디자인적으로 차별화된 제품을 제시하며, 패션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패션계에서 처음으로 해체주의라는 표현을 사용된 것은 1989년 디테일즈란 메거진에 패션 포토그래퍼인 ‘빌 커닝햄’의 언급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패션쇼의 기존 틀을 부순 브랜드
독특한 해체주의적 디자인뿐만 아니라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가 주목받은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패션쇼의 형태였다. 패션쇼라 하면 브랜드의 한 해중 가장 중요한 행사이며, 어떻게 하면 브랜드의 제품을 더 많이 주목받게 하고 빛나게 할지를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한다. 하지만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기존과는 매우 다른 방식의 패션쇼를 준비했다.
1989년 가을 파리의 낙후 지역의 야외에서 마르지엘라는 패션쇼를 진행하였다. 그곳은 패션쇼가 열릴만한 장소로는 생각되지 않을 곳이었는데 전기를 연결할 콘센트도 제대로 없고 지정 좌석도 없었다. 심지어 통제도 없이 동내 어린이들이 쇼장 내에서 뛰 놀거나 거리의 부랑자 들도 같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의 쇼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특이한 행동일 뿐이다, 성공할리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마르지엘라의 파격적인 패션이 눈길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쇼의 마지막은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웃고 떠들며 마무리가 되면서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기며 성공적으로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프라다의 디렉터로 유명한 ‘라프 시몬스’도 당시 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이 쇼를 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평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호평 속에 마무리 됐었다.
마르지엘라가 원했던 쇼는 잘 차려진 런웨이에서 선택받은 자만 누리는 그들만의 쇼가 아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을 즐기고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쇼의 취지와 형태 자체를 바꿔 버린 사례도 있다. 패션쇼 대신 컬렉션 공개일에 맞추어 전 세계의 메종 마르지엘라 매장으로 초대한 것인데, 그곳에서 직접 상품을 보고 만지며 바로 구매를 할 수 있게끔 하였는데, 소수의 특권자가 누리는 쇼가 아닌 실질적인 소비자가 상품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파격적인 행보들은 그의 패션에 대한 철학이 녹아 있는 부분이었고 이후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대중화
이런 파격적인 행보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브랜드이지만 사실 재정적으론 튼튼한 브랜드는 아니었다 실제로 론칭 14년 동안 재무적으로는 휘청거렸다고 한다. 그런 메종 마르지엘라에 든든한 구원 투수가 붙었는데 패션계에선 탄탄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는 OTB그룹으로부터 투자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후 OTB그룹의 자회사로서 브랜드는 운영되어 재무적으론 단단해졌지만 이로 인한 마케팅과 전력적인 요소가 디자인과 쇼에 간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갑작스러운 마틴 마르지엘라는 패션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이후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를 대중적으로 이끈 사람은 후임 크레이티브 디렉터인 ‘존 갈리아노’이다.
디올의 디렉터였던 존갈리아노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패션계에서 강제로 퇴출된 이력이 있었다. 때문에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였지만 모회사인 OTB그룹은 의사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라는 브랜드명을 ’ 메종 마르지엘라‘라고 단순화하였다. 이를 통해 브랜드 로고 플레이가 더욱 용이해졌다. 때문에 이전과 다르게 디자인 자체의 신선함을 내세우던 제품들 보다는 로고플레이를 하는 제품군이 늘어났다. 또 기존 인기 컬렉션에서 조금의 변화를 주는 형태로 제품을 출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디자인적으로 퇴보하였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오히려 매출은 더욱 상승하고 재무작으론 튼튼해졌다. 어쩌면 대중성과 예술성이란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보이는 결과라고도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마무리하며
패션계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메종 마르지엘라는 브랜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중성은 결국 지금의 마르지엘라는 마르지엘라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브랜드를 떠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과거의 마르지엘라가 되돌 온다 하여도 과연 브랜드가 지금처럼 많은 대중들이 사랑해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재무적인 성장이 성공하는 브랜드일지, 브랜드만의 브랜딩과 차별성이 확실한 브랜드가 성공한 브랜드 일지 이중 어떤 것이 성공한 브랜드인지는 각자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훗날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궁금해지는 브랜드가 ‘메종 마르지엘라’이다.
1. 디자이너의 디자이너가 만든 브랜드
2. 기존 패션 상식을 깨는 해체주의 브랜드
3. 상품을 보여주는 방식을 뒤바꾼 브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