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가해자

손현주 지음_우리학교 출판사

by 은송하


p24-25

하지만 막상 키패드에 숫자를 찍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 준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CCTV 같은 건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이 폭발할 것 같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준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p34

자신은 어머니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힘든 학창 시절을 겪었다. 하지만 준형이는 달랐다.


어머니는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준형이를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했다. 왜 자신에게는 저렇게 너그럽지 않으셨던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준형이에게 애정을 쏟는 게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 덕분에 자신은 어머니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p50

준형이를 보면 달팽이 집에 갇힌 작고 연약한 무언가를 볼 때처럼 위태로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이 채원이에게 닿자 가슴이 시렸다. 엄마에게 채원은 찬바람이었고, 옹이 박힌 나무였다.


채원이 자폐라는 사실을 안 것은 두 살이 지나서였다.



p70

"준형아, 힘들수록 가족 모두가 서로 도와야 하잖아."


이런 말들이 준형의 가슴을 멍들게 했겠지. 그러나 자신도 그동안 절벽에 매달린 심정으로 살았다. 어쩌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무거워 준형의 마음을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사이 준형은 다른 세상으로 가 버렸다.




p94

준형은 문득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세상 살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말만 잘하면 큰 문제가 안 생겨.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준형은 고작 두 가지 말 중에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들었다.




p163

현서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정말 준형이 빨리 자수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는지, 혹시 준형이 말처럼 남의 불행으로 위안 삼은 건 아닌지. 완벽해 보이는 친구의 불행에 작은 안도감을 느낀 건 아니었는지.


하지만 준형의 상황에 어떤 위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런 감정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남의 불행을 들여다본 뒤 남은 건 똑같은 무게감이었다.



작가는 비상계단과 같은 CCTV 사각지대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면, 가해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손현주 작가는 『가짜 모범생』에서는 ‘교육 학대’를, 『울지 않는 열다섯은 없다』에서는 ‘양극화’와 ‘학교 폭력’을 다궜다. 이 작품에서는 십 대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만 싶은 열여섯 소년의 뒤를 쫓는 숨 가쁜 서사와 도덕적 지지가 약한 가족들, 양심적 행동을 촉구하는 친구 사이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골을 잘 전해준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냐?” 주인공 준형이 내뱉은 말은 독자 스스로에게도 묻게 되는 말이다. 용기는 어떻게 어디에서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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