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영화관

황벼리 글.그림_한겨레 출판

by 은송하
ChatGPT Image 2026년 2월 19일 오후 09_17_48.png


p61-63


옛날에 학교 뒤편 공터에 전기 주전자가 하나 버려져 있었거든요?


공터 한가운데에 말이예요. 계속 거기 있었는데, 아무도 치우질 않았어요.


전 풀잎을 보면 가끔 그 주전자가 떠올라요. 공터 한복판,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마 늘 낯설었던 전기 주전자.





p105-106


비가 오는 날은 좋아했었나? 풀잎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었다.


싫지만 않으면 뭐든 상관없다는 식이었으니까.


난 그런 그 애가 안쓰러웠다. 그 앤 모서리로 서 있는 종이 인형처럼 늘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모서리. 세상과 맞닿은 면이 하나도 없는 모서리.


혹시 그 애가 떨어지더라도 다치지 않게 받아줄 수 있는 그런,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p130


누가 그랬어요. 사실은, 솔직히...


이런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치만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어떤 기대가 있어서 그래요.


혹시 당신이라면, 내 말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요.


사실은.





p212-213


지나간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이잖아요.


지나간 시간 위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고여 있던 시간이 마르면 반짝이는 순간의 결정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거죠.


그러니까 기억은 사탕 같은 거예요. 영원히 녹지 않는 사탕요.


단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할 수 있는 사탕이 점점 많아지니까 다른 사탕을 먹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뿐이죠.


녹지 않는 사탕을 먹을 땐, 그게 무슨 맛이든 바로 어제 일처럼 느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변하지 않는 사탕이니까요.


미미맛 사탕을 먹는 날에는 전 영원히 슬프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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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가협회가 2024년 올해의 출판만화로 선정한 장편만화이다.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영화관 직원 풀잎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머물고 싶은 영화관 관객 이소, 떠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섭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품을 그린 황벼리 작가는 "이 만화를 보는 독자들이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공감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진 한 장의 무게》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 《다시 또 성탄》을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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