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구조, 그리고 불가피성에 대하여

by 지적 지니

세상만사가 발생하여 지구의 그 어떤 변화라도 가할 적에는, 그 배후에 있는 것으로 지목되는 것은 대개 이념(理念)이다. 이념은 직접적인 행동의 동기이기도 하지만, 시대정신의 기류를 잠시 멈춘 뒤, 작두로 싹둑 잘라낸 그 단면에 가깝다. 단면 안의, 속속들이 자리한 사람들의 행동은 이념을 대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은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늦게 완성된다. 이념은 사건 직전에 완성되는 발화(發火)에 가깝다.


프랑스혁명을 보라. 루소(Rousseau)의 사회계약론이 혁명을 낳았다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단면을 근원으로 착각하는 오류다. 1788년의 대흉작(大凶作)이 있었고, 왕실의 재정은 수십 년간 이미 빈사(瀕死) 상태였으며, 신분제라는 구조물은 오래전부터 균열이 쌓이고 있었다. 루소의 이념은 그 균열 위에서 폭발한 발화점이었을 뿐, 균열 자체는 훨씬 더 오래 그리고 훨씬 더 조용히 진행되어 온 것이다. 혁명이 루소를 만든 것이지, 루소가 혁명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이념이 먼저였다면, 루소 이전의 수많은 계몽(啓蒙) 사상가들이 왜 혁명을 이끌지 못했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보려면 유체가 흐르는 곳을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유체가 비롯한 곳을 보아야 그것이 흘러내려 도달한 땅으로 그 기류를 완성해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건대, 단연 구조적 사고와 유체적 사고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며 쌓인 구조에 사건이라는 유체를 들이붓는 것이 역사다. 역사는 구조물과 부딪히며 매 순간 새로운, 그러나 한번도 고정되지 못한 형태로 어딘가를 향해 흐른다.

오늘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人工知能)의 도래를 두고 사람들은 오픈AI를 창업한 자들을, 혹은 트랜스포머 구조를 발표한 구글의 연구자들을 지목한다. 그러나 그들 이전에 수십 년간 쌓인 반도체의 집적도와, 인터넷이 만들어낸 천문학적 규모의 데이터와, 냉전 이후 민간으로 이전된 군사 기술의 구조가 없었다면, 그 '천재'들은 그저 시대를 앞서간 무명(無名)으로 남았을 것이다. 구조가 인물을 불렀다. 인물이 구조를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읽는 게 아니라 앞에서 받아 읽기 때문이다.


세상이 발전하고, 초연결 사회가 도래하며 개개인의 능력이 더 쉽게 드러날 수 있는 사회라지만, 세상이 발전하고 개개인의 능력이 더 신장되어 '스타'들의 세상이 찾아왔다지만, 그것 또한 세상이 변한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은 마치 성질 나쁜 고용주와도 같다는 뜻이다. '너 말고 이 일 할 사람이 널렸다'고 외치며 계속해서 새로운 노예를 찾는 주인처럼, 세계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발현해 줄 '인재'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이 있다. 시대는 인재를 부르면서도, 인재가 아무 때나 태어난다고 해서 그를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행기를 구상했지만 하늘을 날지 못했다.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는 컴퓨터를 설계했지만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구조가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체는 아무 땅에나 스며들지 않는다. 스며들 수 있는 틈이 구조 안에 생겨날 때, 비로소 그 자리를 메울 인재가 소환된다.


그래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격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이것은 구조에 대한 경외(敬畏)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지를 단련하는 것 못지않게, 지금 세계의 구조 안에서 어느 곳에 균열이 쌓이고 있는지를 읽어야 한다. 균열을 먼저 발견한 자가, 다음 발화의 심지(心地)가 된다. 역사의 주인공은 시대를 만든 자가 아니라, 시대가 부를 때 그 자리에 있던 자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기 위해 그는 반드시,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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