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시선으로 본 영원한 2인자 살리에리

아마데우스

by 어반k


살리에리


밀로시 포먼의 영화 (아마데우스 1984)는 천재와 평범함,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예술이라는 매개로 탄생한 영화이다.

영화는 자해 후 정신병원에 수용된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신부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회상 구조로 전개되는데

이 영화의 본질은 천재와 범인(?)의 대립보단 예술가가 신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살리에리는 누구보다 신을 찬미하기 위해 음악을 택한 인물이다.

그의 기도는 순수했다.

주여, 음악으로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고 제 작품이 당신의 이름을 드높이게 하소서


하지만 모차르트를 만난 순간, 그는 신의 편애를 깨닫는다.


그의 눈앞에서 모차르트의 악보는 수정 한 번 없이 완벽하게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다.

살리에리는 그 완벽함 앞에서 무너진다. 그는 더 이상 신을 찬미할 수가 없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살리에리의 신앙은 신을 향한 찬미에서 신을 향한 도전으로 변해만 가는데...


살리에리는 신의 불공평함과 예술가로서의 원망이 쌓여만 간다.

그는 이해할 수 있으나 창조할 수 없는 재능이라는 형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술가에게 가장 잔인한 고통이다.

누군가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감각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

그는 그 모순 속에서 무너진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시선으로 살리에리를 바라보게 된다.

화가로서 이 영화를 볼 때, 살리에리의 내면은 낯설지만은 않았다.

붓을 드는 순간, 나 역시 신의 불공평한 선택을 느끼곤 한다.

누군가는 한 번의 선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천재성을 타고났고, 누군가는 그 선을 평생 따라 그리며 배워야 한다.


그림을 그리며 신을 닮고자 하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를 마주치게 된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열등감이 아니라, 존재의 불균형에 대한 분노 비슷한 자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신은 왜 어떤 이에게는 표현의 능력을, 다른 이에게는 그것을 감탄할 감수성만을 주었는가?

살리에리는 결국 신의 불공평함을 증명하기 위해 모차르트를 파멸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절규였다.



모차르트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선택한 모차르트 또한 불행했다.

그에게는 천재성이 있었지만, 사회성과 평범함은 없었다.

그는 재능의 축복과 동시에, 삶을 조율할 능력의 결핍을 부여받았다.

살리에리가 부러워한 신의 선택은, 모차르트에게는 또 다른 형벌이었다.


이 대조는 예술의 본질적 이중성을 드러낸다.

예술은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그 완벽함은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신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로 인해 모짜르는 인간의 삶에서 소외된다.


영화의 마지막, 살리에리는 정신병원의 환자들 사이를 지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요~ 세상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챔피언이오.”

이 장면은 비극이자 구원이다.

살리에리는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인간이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인간의 진실’을 대변하게 된다.


예술은 결국 완벽함의 기록이 아니라, 결핍의 증언이다.

천재의 손끝에서 신의 세계가 탄생한다면 평범한 예술가의 붓끝에서는 인간의 진실이 그려진다.


(아마데우는)는 신의 불공평함을 고발하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살리에리의 절망은 신을 향한 저주이자, 예술가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통과의례인 깨달음이었다.

화가로서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느낀다. 신은 두 가지를 모두 주지 않는다.


천재성은 고독을...

평범함은 평화를 대가로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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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결국!

그 불균형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인간의 시도이며,

그림은 신의 편애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고백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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