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발등 하얀’ 그녀가 고백할 것이 있다고 했다.
"언니, 언니. 내가 휴대폰으로 난독증이 있으니까 언니 블로그 제대로 안 읽었잖아. 그런데 어제 저녁에 언니가 내 얘기 쓴 걸 문득 읽고 싶잖아? 그래서 내가 어제 언니 글 읽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읽었지 뭐야.”
“아, 그래? 그런데 자기에 대한 글은 못 읽었을 걸. 그건 서로 이웃 공개라.”
“아니, 아니. 그건 괜찮고. 언니, 아 뭐야. 언니 진짜 언니 글. 언니 글 완전!”
“응?”
“……언니 그동안 물로 봐서 미안해.”
그녀는 그렇게 나를 ‘물’로 본 것을 느닷없이 사과했다. 난 두 가지에 대해 놀랬다. 내가 그녀에게 언니가 아닌 ‘물’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녀가 나를 ‘물’로 본다는 것을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아, 나 그녀에게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물로 보이는지는 몰랐지 뭐야. 나는 “괜찮아, 나 그렇게 많이 보여!” 하고 시원하게 웃어넘겼다.
얼마 전에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원래는 첫째 친구의 엄마이지만 나와 동갑이어서 좀 더 친해진, 또 내 글을 빠짐없이 읽어주고 응원해 주어 깊은 사이가 된 J이다. J와 빵과 커피를 앞에 놓고 대화하던 중, 그녀가 갑자기 나를 물끄러미 보다 말을 꺼낸다.
“자기야.”
“응?”
“자기 글 쓸 때랑 실제랑 다른 사람 아니지? 영혼이 바뀌고 막 그런 거 아냐?”
그 순간 내 앞에는 내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을 것이고, 아마 내 입가에도 잔뜩 ‘나 지금 빵 먹고 있어요.’ 테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내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었다. 그리고 나는 방금 하던 말을 자꾸 잊어서 “나 무슨 말하고 있었지?”하며 더듬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J의 나에 대한 ‘두 영혼설’에 우리는 또 한참 웃었다. 나는 그때도 “나 그런 말 많이 들어!”했던 것 같다.
내가 얼마 전에 문장 하나를 놓고 시를 습작한 적이 있다. 나 이렇게 조여지지 않은 채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 나이면 가져야 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 똑 부러지는 경제관념 그런 거 하나 없고, (그래. 그런 건 그렇다 치고) 말 더듬고 잘 흘리고 잘 망가트리고 잘 잊어먹는, 십 대 때 친정엄마에게 잔소리 듣던 그 습성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고 길을 가다가도 대화를 하다가도 길을 잃고 자주 멍해지는 사람. 자주 슬퍼지고 먹먹해지고 또 잘 감동하고 금방 행복해지는 사람. 어떻게 보면 정상의 성인 여자가 아니라 딱 한 치쯤 모자란 사람. 즉, 물로 보이는 사람. 그런데 그런 내가 글에서는 조금 나아 보이나 보다. 내가 쓰는 내 글에서는 나를 꾸미는 걸까. 내가 아닌 척 좀 더 똑똑한 사람으로?
글로 똑똑한 척할 만큼 아는 것이 없다. 글을 쓰며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꾸밀 재주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글을 쓴다는 것은 조금 더 나를 정돈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마침표를 찍고 엔터를 누르기 전에 다시 고쳐 쓸 수 있고 내가 뱉은 말을 바로 바라볼 수 있다. 처음과 끝을 다시 순서에 맞게 매만질 수 있다. 흘리지 않을 수 있고, 잊어버린 것은 다시 수정해서 첨가할 수 있다. 먹먹하고 감동하고, 기쁜 감정을 헤매거나 더듬거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전심으로 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글에서는 조금 더 단단해 보이나 보다. 길을 잃다가도, 글로 정리하다 보면 길의 방향이 보인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는 적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내가 간 길이 혹여 틀릴지언정, 그래서 다음에는 좀 더 좋은 길을 가려고 노력할지언정.
결론을 지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사실, 물이었다. 나에게 글은, 물이 조금 더 말랑한 고체쯤은 되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나의 형체를 보이고 싶고, 만져지고 싶어서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