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둘째가 자기 전에 어둠 속에 눈을 꿈벅이며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 무서운 꿈 꿀 것 같아. 둘째에게 무서운 꿈은 엄마가 사라지는 꿈, 엄마가 죽는 꿈이다. 그러면 나는 내 오른쪽 팔을 내어주며 둘째를 내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괜찮아, 엄마 여기 있잖아, 안심시킨다. 둘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엄마 기도해 줘." 애교를 부리고 덕분에 불량 신자가 아이들을 위해 취침 전 기도를 한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 행복한 꿈 꾸게 해 주세요. 내일도 즐겁고 건강한 하루 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세요.
가끔은 기도를 한 후에도 아이가 칭얼대면, 안고 토닥이며 엄마 있잖아, 잠들 때까지 토탁여 준다.
나도 우리 둘째만할 때 엄마가 죽는 꿈을 꾸다 징징 울며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의 불안이 무엇일지 어렴풋이 짐작한다. 엄마가 기도를 해준다거나 엄마 품에 꼭 안겨 잔다고 해서 꿈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방이 어두움에 잠기고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엄마가 어디 가버릴까봐, 나의 전부인 존재가 사라질까봐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엄마 여기 있어."라는 말. 네 옆에 있어, 라는 그 달콤한 말.
셋째는 두 돌이 가까워지며 단어 두 개를 조합해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말하기 시작한 동사가 "있다."다. 내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 반갑게 뛰어오며 어? 엄마 있네, 한다. 아빠가 보고싶으면 아빠가 퇴근해서 나타나는 현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아빠 없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빠 있네, 엄마 있네. 오빠 있네, 까까 있네. '있네'만으로 우리 셋째가 요즘 가장 신나게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문장들이다.
'왔다' '갔다' 동사가 아직 어렵고, 표현이 다양하지 못해 그저 "있다"로 문장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겠지만 아이가 처음 말하는 동사가 "있다"라니. 아이가 "엄마"를 말할 때만큼이나 "엄마 있네."의 문장이 놀랍고 벅차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엄마' 였는데,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엄마의 '존재'였다. 위에 두 아이가 처음 말했던 동사가 무엇인지 기억에 나지 않는다. 셋째의 첫 문장이 새삼 벅찬 것은, 내가 최근 읽은 몇 권의 책들이 나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빙>을 읽으면서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들에 주목하게 됐다. 나의 책상, 나의 노트북, 나의 창문, 나의 따뜻한 집, 나의 건강한 두 팔과 다리, 아이가 먹고싶다는 귤과 딸기를 사들고 들어올 수 있는 돈. 그리고 나의 최고의 보물, 내 가족, 아이들. 나에게 아이들이 '있다'라는 것만으로 나는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얼마나 꽉 찬 삶을 살고 있는지. 내가 잊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인식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말하는 동사가 "있다"였다. 아이들은 무엇의 결핍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부터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 작은 아이가 엄마가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결핍,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알게되고 조금씩 가난해졌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선생은 엄마 있네! 엄마 없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했다. 엄마 있네, 의 확신. 눈 앞에서 사라져도 엄마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그 믿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가 이어령 선생을 인터뷰한 기자의 설명으로 이어진다.
나는 매일 나의 존재를 아이들의 입으로 확인받는다. "엄마 여기 있어." 라는 목소리를 듣고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기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또 세상 가장 행복하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주는 아이들 . 나는 또 그 아이들의 정수리 냄새를 맡으며 편히 잠든다. 이 아이들이 내게 있구나, 어둠 속에 안심하면서.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수업>을 100%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있다'와 '없다'가 우리 인생의 전부고, 결국 문학이고 종교라는 그 대목만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여기 있고, 아이들이 내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