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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Jan 15. 2018

편하게 드시고 가십시오

"잘 먹었습니다."

"벌써 다 드셨어요?"

"네."


한 테이블의 손님들이 들어온 지 십 분도 안 되어 김치찌개에 라면사리까지 후루룩 마시고 일어선다. 여름에는 열무비빔밥을, 겨울에는 김치찌개를 즐겨 먹는 손님. 다른 손님이 없을 법한 시간대와 요일을 택해 예약을 하는 손님. 근처 규모 있는 회사의 본부장이다.


"사무실 직원들이 맛있다고 해서 왔는데 괜찮더라고요. 근데 그 이후로 그 직원들은 여기서 볼 수가 없어."

"에이, 어제도 다녀가셨는데요."


본부장이 함께 온 직원에게 자신이 이 식당에 오게 된 사연을 들려주며 날 슥 봤는데, 그만 눈치 없이 답해버렸다.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해줄 것을.


상사와의 식사 자리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기에, 본부장이 오는 날이면 다른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다면 상사는, 본부장은 불편하지 않을까? 어딘가의 직원일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언니, 오늘 본부장님 오셨는데 먹다 말고 가셨어."

"그래?"

"맛이 없었나?"

"오늘 손님 많았어?"

"어. 테이블 꽉 차서 끼어 앉았지."

"아... 직원들 편하게 먹으라고 빨리 갔나 봐."

"본부장도 쉬운 게 아니구나."


본부장이 단골이다 보니, 우리도 가끔은 신경이 쓰인다. 본부장이든 직원이든 백수든 밥을 먹고 나가는 손님에게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소심한 사람들이 장사를 하다 보니, 밥을 남기고 가면 왜 남겼나, 웃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돌아서는 손님의 뒤통수에 수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본부장쯤 되면 직원들 눈치 안 볼 줄 알았는데, 개도 안 건드리는 밥 먹을 때조차도 본부장은 직원들 눈치를 보는구나. 오늘은 느낌표 하나 추가.

 

눈치 보는 직원은 있어도 눈치 보는 상사는 없을 줄 알았는데, 본부장을 보니 상사라는 사람들의 사정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구나 싶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꽤 골치 아픈 직원이었구나. 상사의 한 마디에 두 마디, 열 마디로 답하고, 상사가 뭐 먹으러 가자고 하면 내가 가고 싶은 데로 예약하고, 곱게 "예" 한 적이 없구나.


"내가 요즘 소설을 하나 쓰고 있어요. 나중에 그걸로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야."

"한 번 보여주세요. 소문 안 낼게요."


내가 프리랜서 편집자인 걸 알고 다른 손님이 없던 어느 날 본부장이 수줍게 말했다. 직원들과 식사 자리가 있으면 우리 식당을 예약하라고 일러주는 손님, 갈비찜이며 고등어찜이며 닭도리탕이며 맛없는 게 없는 데라고 식당에 처음 온 직원들에게 말해주는 손님, 북엇국이 왜 북엇국인지, 저기 저분이 편집자 분이시라 맞춤법 물어보면 다 알려준다고 나를 부끄럽게 하는 손님. 직원들은 어려워하지만 나는 어려워할 수 없는 손님.


오늘도 그분이 왔다.


"오늘은 손님이 없네요?"

"자리는 여기입니다. 편하게 드시고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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