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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원 Oct 22. 2024

17. 나 홀로 10,590km

10,590km 떨어진 곳에서 단단해지기

친구들에게 순례길에 간다고 알렸을 때, 공통적으로 들은 질문이 있었다.


“누구랑? 너 혼자 가?”


30일 넘게 시간을 낼 수 있고, 800km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직장인들은 하루, 이틀 연차도 큰 결심을 하고 내는 게 다반사이니, 사서 고생하러 연차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장기간의 연차라면, 아마 갔다 오면 사무실 자리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족들은 내가 혼자 떠나는 것을 걱정했다. 가족들도 가본 적 없는 생소하고 먼 곳에 혼자 간다고 하니 불안한 마음은 당연했다. 내 결정에 반대를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연락은 꼭 자주 해달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사실 혼자 해외여행을 한 경험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여행지는 스위스였고, 동행자가 있었지만 일정상 3일간 혼자 지내야 했다. 그때의 경험을 물어본다면, 아주 좋았고 다시 하고 싶은 추억이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혼자서 뭔가를 이뤘을 때의 뿌듯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아마 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추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 기억이 다시 나를 이 홀로 하는 여정으로 이끌고 있었다.




10월 02일

내일이면 벌써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정이 마침내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고생도, 웃음도, 불편함과 행복함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 이제 막을 내리려 한다. 짧은 거리를 걷는 날엔 다리가 홀가분했고, 30km 넘게 걸은 날엔 비장하게 하루를 시작하여 노곤해진 몸을 풀며 하루를 정리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길 위의 추억이 많다. 특히 혼자 걸으며 보았던 풍경들은 눈을 감으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9월 17일, 한 마을에서 장을 보러 가던 중 우연히 자전거 타는 꼬마아이를 봤다. 그 뒤에는 엄마와 할머니로 보이는 분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따뜻한 장면이었다. 가족들의 따스한 사랑이 느껴져 내 어린 시절의 장면까지 몽글몽글 떠올랐다.


꼬마는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가다가, 중심을 잃고 살짝 넘어졌다. 속력을 내다 넘어진 것도 아니었고, 아주 살짝 넘어진 것으로 보았는데 아이는 상처 하나 없는 무릎을 들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물론, 몸은 엄마와 할머니가 있는 방향으로 틀고 있었고, 엉엉 우는 울음 속에는 ‘얼른 나 달래주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와 할머니는 곧장 아이에게 달려오셔서 일으켜 세워주셨고, 따스한 손길을 받은 꼬마는 그 서러운 닭똥 같은 눈물을 멈추게 되었다.


그 모습을 잠깐 보고 있으니, 문득 홀로 나와 있는 이 자체가 나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10,590km나 떨어진 이곳. 오늘 우연히 보게 된 표지판에는 이 마을로부터 각 나라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고, 한국은 무려 10,590km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삼 한국이 정말 꽤나 먼 곳에 있구나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먼 곳에서 나와의 약속을 다 지켜냈음을 몸소 알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짜장면 집에서 “단무지 더 주세요.”라는 말도 못 하는 꼬마였다. 더 커서는 용기가 생겨 부반장을 맡았지만, 친구들에게 가정통신문을 제출해 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힘들었다. 나는 주목을 받거나 큰 소리로 내 의견을 내야 하는 것은 조금 힘들어하는, 평범한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래서 내 인생에 ‘도전’이라는 글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물론, 막상 해야 할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해서든 해냈다. 예를 들어, 면접이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내게 아주 큰 에너지가 필요했다. 에너지가 부족한, 조금은 나약했던 나에게 아주 잘 맞는 처방약은 운동이었다. 스스로 약속한 하루 운동일과를 모두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그 어떤 칭찬보다도 달달했다. 홀로 서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냈다.


그런 나에게 이 순례길은 메가도스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성장시켰다. 자전거에서 넘어져 뒤를 돌아보아도 이제 나를 지켜봐 주는 부모님은 없다. 만약 계신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숨겼을 것이다. 이젠 내 아픔이 곧 그들의 아픔이 되는 것을 아는 30대에 접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난 이제 어떤 아픔도 이겨내고 홀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어른이다.



순례길의 마지막 날을 앞둔 날. 아직 실감되지 않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내 옆에 있는 친구들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같다. 800km라는 거리에서 우리를 단단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도 우리는 800km를 걸을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는 것. 아마 당분간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일 것이다.


눈을 감으니 주위에서 은은하게 켜둔 조명이 느껴진다. 그리고 저 멀리 동네 강아지들이 합창하듯이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 드디어 내일이면 이 여정이 끝나는구나. 실감 나지 않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지난날들과 앞으로의 날을 생각한다. 한국과의 거리는 10,590km, 그곳에서 800km를 걸은 나. 나는 홀로서기에 단단한 사람일까?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난 아주 단단한 사람이다. 그것도 튼튼하고도 씩씩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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