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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원 Oct 24. 2024

18. Hola, Buen Camino !

비가 씻어준, 새로운 길 위에서

아주 어릴 적이다. 학교도 다니기 전, 여름휴가로 가족들과 바닷가로 떠나는 날. 어린 내 마음도 모르고 하늘은 아주 흐렸다. 그래서 바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맛있는 것 먹고 카페에서 비 오는 걸 보며 쉴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온통 수영 생각뿐이었다. 비가 오면 바다에 못 들어갈까 봐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그냥 비를 맞으며 놀았다. 부모님도 이런 어린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부슬부슬 내리는 비 아래로 나를 내보내셨다. 그때의 나는 흐린 하늘 아래 파랗지 않은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좋았다. 물은 조금 차가웠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만 되어도 비를 맞고 노는 게 달갑지 않았겠지만, 어린 나는 비도, 바다도 그저 즐거움이었다.


어른이 되어, 비를 맞으며 달려본 적이 있다. 일부러 비를 맞으려 한 건 아니었다. 달리는 중에 갑자기 비가 내려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라면 고어텍스 같은 옷을 입을 수도 있었겠지만, 러닝 복장에 고어텍스가 있을 리가 없었다. 러닝복은 통기성이 중요하니 비를 막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쏟아지는 비를 온전히 맞으며 시원하게 달렸다.


10km가 목표였기 때문에, 거세지는 빗방울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모자를 쓴 덕에 눈에 비가 들이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상쾌한 기분으로 뛰었다. 달리고 나니 신발에는 물이 찼고 옷도 금세 빨아야 했지만, 오히려 해방감이 들었다. 비가 더운 열기로 가득한 나를 씻어주는 듯했고, 오래된 어떠한 감정이나 짐을 털어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동심에 불과했을 거라 생각했던 자유로운 기분이 새로 살아난 듯했다.




10월 03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살면서 한 번쯤 꼭 가야 하는 도시로 불리는 곳이다.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갈 수 있는 곳. 드디어 오늘은 800km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종점에 도착한다. 이 종점에 가까워질수록 새로 합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정말 긴 여정이었지만 한걸음, 한걸음이 행복해서 이 길은 아껴서 걷고 싶었다. 그러나 종점에 가까워질수록 이 어수선한 분위기 덕에 조금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원인이 어수선한 분위기라면, 어수선하지 않은 새벽이 좋은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깜깜한 새벽에 고요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깜깜한 새벽에 홀로 걷는 마지막 날. 오늘은 나만 빨리 출발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숙소 앞에 다른 순례자들도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다시 돌아와 가방을 풀고 우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무려 마지막날인 오늘, 그다지 달갑지 않은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비 자체야 싫은 느낌이 크지 않았지만, 이 소중한 날에 비가 온다는 것이 아쉬웠고 특히 우비를 쓰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짐을 다시 푸르고 우비를 꺼내 입었다. 오늘도 쉽지 않은 날이구나.라고 짧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갑자기 이 비가 꼭 30일간의 나를 씻겨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지치고 힘든 몸을 다독여주는 기분이 들었다. 첫날 쏟아지던 폭우 이후로 비를 자주 맞지 않았기에, 오늘의 비는 나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첫날과 닮은 비를 보니 극기훈련 같았던 첫날이 떠올랐다.


오늘은 바(bar)에 들려 커피를 마시는 여유는 즐기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어두운 새벽길이지만 곧 밝아오는 해를 쫓으며, 마음을 놓고 호흡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내가 순례길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 오는 소리와 함께 모래 밟는 소리는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곧 비가 그쳤고, 숲길을 지나 도시로 접어드는 아스팔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이라고 가져온 옷 중 제일 멋진 옷을 입어도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 허름한 것이 고스란히 풍기는 내 분위기가 좋았다. 과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마주하면 무슨 기분이 들까? 설레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대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더 많아졌고, 백파이프로 연주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며 긴 여정을 끝낸 나를 맞아주는 듯했다. 이제 이 골목을 지나면, 성당에 도착한다. 그동안 매일 보았던 순례길의 화살표와 조개 표시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이 낯설고 아쉬웠다. 내일 아침에도 다시 일어나 그 표시를 따라 길을 걸을 것만 같은데, 벌써 끝이라니.



이 여정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길이 끝나는 듯한 문이 눈앞에 보인다. 마지막 문. 하지만 이 문을 넘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문일지도 모른다. 비가 내 몸을 새로이 씻어주듯, 나 역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100m, 50m, 10m... 그간 고생했던 나에게, 이제껏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인사를 하고 싶다.


 Hola, Buen Cami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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