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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Jan 03. 2023

글쓰는 찰나 - 내 머리 속의 스위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모든 것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사소한 건망증을 늘 안고 다니는 내게 영화 속의 이야기는 내가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또는 앞으로 겪을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우산이나 봉지 등 손에 들고 갔던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온 적이 거의 없다.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어서 허겁지겁 내렸다. 당연히 나의 소지품은 버스와 떠나기 일쑤였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슈퍼에서 콩나물을 사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놀이터에 앉았다가 돌아오면 놀이터에, 길가에 작은 꽃이나 지렁이를 보다가 돌아온 날은 길가에 콩나물이 든 봉지를 놓고는 봉지를 찾지 못해 망연자실한 태도로 집에 돌아간 적이 많았다. 심부름도 제대로 하지 못하냐며 걱정 살짝 섞인 엄마의 잔소리 폭격을 아무리 들어도 그런 상황은 늘 반복되었던 것 같다.     


늘 무언가 나사가 풀린 것처럼 서투르게 하루를 살아가는 내가 ‘집중력이 좋다’, ‘끈질기다’ 같은 칭찬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어렸을 때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그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선생님들께서는 내가 수업도 꼼꼼히 열심히 듣고 선생님 말씀을 잘 기억한다고 칭찬하셨다. 직장 생활 초반에도 그런 칭찬을 꽤 자주 들었다. 동료 선생님에게 “어떻게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냐 대단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많다. 실제로 내가 담임인 학급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대부분 상세하고 기억했고, 학년 선생님들의 사소한 언행을 다 기억하고 있어서 모두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 해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은 나를 ‘매우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런 칭찬과 평가를 받기 위해 사실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수첩에 그날 내가 해야 할 일을 꼼꼼히 메모했고, 매 시간 나의 업무 수행 정도를 체크했고, 모든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시절의 나는 집에 와서는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쓰러져 잠만 잤다. 하루 동안 쓸 나의 모든 에너지를 학교에 있는 동안 몰아서 다 소진한 것처럼 매일 9시가 되기도 전에 쓰러져 잠을 자는 일상이었다. 초긴장 상태에서 하루를 버텨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젊은 신규 교사 때처럼 학교에 있는 동안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쓰러져 잘 수 없기 때문에 학교에서 예전처럼 일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면 집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학교에서 집중하는 시간이 줄었고,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자질구레한 실수들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는 집에서 엄마로서 일하는 시간에도 점점 더 실수하는 것이 많아지고 깜빡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다시 서투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서 속상한 순간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매일매일을 다시 예전처럼 소진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들을 지나오며 나도 모르게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아닌 스위치가 생긴 것 같다.


요즘은 학교에서 일을 해야 하거나 수업을 할 때만 스위치를 켜고, 집에서도 아이들과 집중해서 무언가를 할 때만 스위치를 켠다. 사이 사이의 시간은 스위치를 끄고 있는 그대로의 산만하고 공상하는 나를 그냥 받아들인다. 가끔 스위치가 꺼져서는 안 될 때 꺼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내 머리 속에 스위치가 있어서 온오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내가 되는 기분이다. 중요한 업무를 해야 할 때는 머리 속 스위치를 켠다. 그러면 그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차고, 내가 할 일들의 리스트가 쫙 펼쳐진다. 이럴 때는 주위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들리지 않는다. 나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는 느낌이다. 스위치가 켜져 있을 때는 이렇듯 신명나게 하나의 일에 몰두하게 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열중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나는 그 느낌이 매우 좋다. 스위치가 켜졌을 때의 나는 반짝이고 활력 있고 뚜렷하다.


그 순간이 지나고 스위치가 꺼지면 나는 온갖 공상과 상상에 빠진다. 어느 것에도 생각을 몰두하지 않고 생각이 어디로든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세상의 다른 자극들에는 조금 무관심해져서 잘 보지 않고 잘 듣지 않는다. 그때 나의 시간은 대부분 기억 속에 저장되지 않는 것 같다. 안전하고 편안한 시공간에서 스위치를 끄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가족들에게 나는 늘 걱정의 대상이다. 지우개처럼 지워져 있는 그 순간 속 나는 좀 허술하고 멍청하고 희미하다.     


나는 계속해서 머리 속의 스위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연습을 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가고 어떨 때는 절반 정도의 스위치를 켤 수도 있도록 말이다.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보다는 현명하게 온오프 스위치를 조율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 여러 학교의 반장들을 모아서 캠프를 했었는데 나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자기소개를 시킬 때 내가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저는 여러분들처럼 뛰어난 재능은 없는 것 같아요. 잘 연주하는 악기도, 운동도 아직 없어요. 하지만 전 정말 멍 때리기를 정말 잘 합니다. 멍~ 할 때가 제일 좋아요.”


다른 학교 반장들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엄청나게 떨리는 마음으로 계속 할 말을 속으로 되뇌이다가 어렵게 생각해낸 말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의 자기소개가 지금의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 놀랍다.


멍한 소녀였던 내가 멍한 어른이 되어, 다시 잠깐 빛날 순간을 위해 충전을 오래오래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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