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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Jan 03. 2023

글쓰는 찰나 - 커피처럼 오늘 하루도.

남편이 내려주는 커피 한 잔     


아침 7시를 알리는 알람과 함께 눈을 뜬다. 조용히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출근 준비를 하다보면 나의 빈 자리를 느낀 첫째와 둘째가 눈을 비비며 엄마를 찾는다.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에 우리집 최고의 잠꾸러기 남편이 드디어 일어난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은 눈도 거의 뜨지 못한 채로 나에게 묻는다. “커피?"

의 대답을 굳이 요구하지 않는 물음을 남기고 남편은 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핸드밀로 원두를 가는 소리, 물이 전기 포트에서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머지 출근 준비를 마친다. 커피 향이 집 안에 그윽하게 들어차기 시작하면 남편은 커피를 가득 담은 텀블러를 가지고 내게 온다. “자~ 커피.”


남편의 커피 선생은 바로 나였다. 나는 첫째를 임신하고 동네 주민센터에서 바리스타 과정을 신청해 매일 강의를 들었다. 커피에 대해 배우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어서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배운 것들을 말해 주고 시범을 보이곤 했다. 주민센터에서 강의를 해 주셨던 할머니 바리스타 선생님은 커피의 기초부터 카페의 기본적인 메뉴 레시피들을 차근차근 알려 주셨다. 매일 다른 원두를 핸드 드립해 보고 서로 내린 커피를 시음해 보기도 했다. 기본적인 핸드 드립 자세나 기초 이론들도 알려 주셨지만 선생님은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잊어 버려도 된다고 하셨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의 정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마신다는 생각으로 커피를 내려 보라고 하셨던 말씀은 그때 내게 매우 인상적이어서, 남편에게도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난다.      


같은 원두와 같은 기구를 사용해 커피를 내려도 내가 내린 커피와 남편이 내린 커피는 맛이 다르다. 내 커피는 진하고 쓰고 시다. 반면 남편의 커피는 달콤하고 바디감이 묵직하다. 남편의 커피는 멋스럽게 쓰고 신맛도 맛의 풍미를 더해 준다.


“커피를 좀더 천천히 여유 있게 내려야지. 정성을 다해야지.”


발을 동동 구르며 커피를 급히 내리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늘 말한다. 내가 내리는 커피는 핸드 드립이 아니라 인스턴트 커피라면서, 그렇게 급하면 그냥 카누를 마시라고 한다. 하루의 첫 커피를 맛있게 먹고 싶은 나의 욕심과 출근길 정체에 끼고 싶지 않은 조급함 사이에서 나의 커피는 늘 참담하게 실패하고 만다. 이런 상황을 매일 보던 남편이 어느 순간부터 아침 나의 커피를 전담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금 일찍 나온다고 했는데도 오늘따라 일찍 시작된 출근길 정체 속에서, 인상을 잔뜩 찌뿌리고 있던 내가 커피를 한 입 마신다. 향기로운 커피가 입 안에 가득 차니 마음이 스르륵 풀어진다.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한 입씩 마실 때마다 조금씩 착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조금 늦는다고 별 일 있나. 차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더라도 이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할머니 바리스타 선생님의 가장 큰 가르침을 기억하는 남편의 정성 어린 커피를 아침마다 마시는 호강을 누린다.


나의 여유로운 두 번째 커피     


학교에 도착한 나는 잠시 숨을 돌리고 노트북을 켜고 커피 테이블로 간다. 이제 나의 두 번째 잔을 내릴 시간이다.


올해 근무하는 교무실은 커피를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래서 교무실에는 캡슐커피머신, 핸드 드립 도구, 인스턴트 커피가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다. 핸드 드립을 좋아하는 나는 학교에서도 핸드 드립을 준비한다. 교무실에는 과테말라 안티구아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가 있다. 산미를 좋아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아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가 늘 먼저 바닥을 보이곤 한다. 나는 묵직하고 고소한 맛의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좋아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을 위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도 살짝 섞는다. 포트에 물을 끓이고, 드리퍼에 따뜻한 물을 부어 드리퍼와 서버를 예열한다. 핸드밀로 블렌딩한 원두를 갈고 드리퍼에 넣어 뜸을 들인다. 물을 많이 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커피를 내린다. 손목에 힘을 빼려고 해도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원두량과 물양을 생각하면서 물을 쫄쫄쫄 세심하게 뿌리다보면 어느새 커피향이 교무실에 가득 찬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았구나. 오롯이 커피에만 집중했구나.

      

번잡한 아침 시간에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나를 과거의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과거의 나는 종종거리며 항상 학교를 뛰어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모든 에너지를 학교에 쏟아부었던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현재의 나는 잠깐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 10여 분의 시간을 커피에 집중하면서 학교에서의 하루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출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바쁘게 일에 몰두하시는 다른 선생님들 틈에서 내가 너무 사치를 부리는 것 같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일부러라도 잠깐의 사치를 부려야 한다는 사실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서 내 동료는 신우신염을 앓았고, 학교 일을 집에 가서도 하셨던 교무부장님은 유방암에 걸리셨다. 나 스스로 몰아쳤던 끝에 얻은 생채기가 내 몸에도 많이 있다. 몸과 마음에 깊이 박힌 상처들은 나를 많이도 힘들게 했다. 엑셀을 아무리 세게 밟아도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공회전만 할 뿐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의 시간표에 따라 일하기란 직장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내 마음의 보호막을 두껍게 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내게는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학교 일을 시작하면 왠지 앞으로 닥칠 일들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정신없이 흘러갈 학교의 일과를 앞두고 나만의 의식을 치르듯이 오늘도 커피를 내린다.  

   

커피 내음이 교무실에 퍼지면 선생님들이 커피잔을 들고 한분 두분 모이신다. 조금씩 따뜻한 커피를 나눠 마신다. 이미 나는 텀블러 가득 남편의 커피를 마시고 왔으므로 내가 내린 커피는 한 모금 맛만 본다. 아직도 정성과 내공이 부족한 나의 커피지만 오롯한 시간만큼은 만족스럽다. 오늘도 이 시간만큼이나 의미 있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며 내 마음을 따뜻하게 예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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