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운명의 반대말은 뭔가요?
세상에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 믿는 사람과 운명은 노력하기 나름이라 믿는 사람으로 나눈다.
운명론자들은 각자의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것이니 운명이 정해진대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흔히 인생이 가혹하거나 환경이 척박한 인생의 경우에 그런 생각과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 힘으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힘든 환경에 노출되어 어떠한 노력으로도 나의 환경이 바뀌지 않을 경우, 아니 바뀔만한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경우 그런 믿음을 구체화시킨다. 그래서 신을 찾고, 현생이 아닌 내세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운명론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그 반대되는 개념은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운명이라고 하죠. 그럼 운명의 반대말은 뭔가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철학자들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오며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느낀 적이 있던가?
가끔 '어쩌면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느꼈던 적이 있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될 것 같았던 느낌. 내가 이때쯤에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런 것이 내 운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개척한다는 것은 황무지 같은 거친 환경을 농사지을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로 쓰인다. 인생을, 운명을 황무지에 비유하여 만들어간다는 의미로 개척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리라. 얼마나 척박하고 황량한 인생이면 개척한다는 표현을 사용할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생이란 비슷하기도 한데 왜 그렇게 힘든 표현을 사용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같은 환경의 형제자매도 각자의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 형제자매들 중에도 어떤 이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적당한 타협과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힘껏 아니 힘보다 더 기대하고 자신을 졸라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운명과 인생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는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그의 인생이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부모, 나와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리라. 하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동생만 있는 첫째의 환경과 형이나 언니가 존재하는 둘째의 환경은 다른 환경이 된다. 그래서 같은 형제라 하더라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같은 인생이 하나 없는, 인구수만큼의 인생이 존재한다. 그 모든 인생이 운명이거나 운명이 아니거나 할 수는 없다. 운명의 반대말을 찾을 수 없듯이, 운명이 정해졌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황석영작가의 <삼포 가는 길>을 비롯한 단편소설 몇 편을 읽었다. 소설은 읽을 때마다 이런 인생을 어떻게 서사로 구현하는지, 작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석영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인생을 참으로 열심히들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환경이 척박하다. 그래서 그런 서사가 구현되는지도 모른다. 특히 <가객>에 등장하는 그는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 노력하여 잘 부르게 되었는데, 본인이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인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동물들을 상대로 노래를 들려주다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추구하던 가객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일을 하면서 기쁨으로 노래를 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서술자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다. 그 서술자는 병에 걸림으로 하여 사람들과 떨어져서 생활을 하며 그들을 관찰한다. 하지만 그의 환경은 바뀌지 않는다. 병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살다 보니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당시로는 고칠 수 없는 한센병.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그의 인생이 더 고달파지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인간들도 각자의 인생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내 힘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고 단지 의사가 시키는 많은 일들과 포기해야 하는 많은 일들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생이 되어버린다면 우린 누구나 운명론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병을 얻는데 내가 노력했다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병은 그냥 그렇게 내 인생에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며 운명을 결정지으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다 보니 주위에는 병을 얻어 가는 인생이 더러 많아지고 있다. 들리는 풍문에 어느 선생님은 유방암투병 중이라 하고, 고교 동창 누구는 자궁암으로 세상을 달리했단다. 그리고 누구의 남편은 간암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운명은 정해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더욱 깊이 하게 된다.
사람을 만나는 것만이 운명은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모양, 모습, 내 생각, 시간 소비하는 방법 등등이 모두 모여 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리라.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태어나 1년쯤 지나면 각자의 성격이 이미 형성되어 버린 듯이 보인다. 그 성격을 따라 유추해 보면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 정해지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생각인가?
오늘도 나는 내 운명을 살아간다. 다른 이의 운명을 추측해 보면서, 그 운명에 맞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하면서 나도 서사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되어보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