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 쓰고 '퇴직'이라 읽는다.

잠시만 쉬기로 했던 휴직이 퇴직이 되었다.

by 여름하늘

나는 진심으로 나의 직장을 사랑했고, 충성심이 강한 직원이었다. 애 둘 딸린 워킹맘이었지만 회사에 있는 동안만큼은 업무에 집중했고, 누구보다 잘해 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뭐랄까 돌이켜보면 조금 미련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내가 일과 삶에 균형을 지켰더라면 지금 내가 덜 허탈하고 새로운 삶에 더 쉽게 적응했었을까? 퇴근 후에도 내 머릿속에는 다음 날 결재 서류가 있었고 단 몇 분이라도 빨리 출근하고 싶어 했다.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봄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오후 5시쯤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친정 부모님께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계셨고, 엄마와 나는 왠만하면 서로 전화를 걸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을 했었던 터라, 발신자에 '엄마' 혹은 '아빠'가 뜬 전화는 늘 '무슨 일 있어요?'가 서로에게 하는 전화 인사였다. 아빠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OO이가 조금 다쳤다. 사고가 났어. 걱정하지 말고 퇴근해서 병원으로 와라." 조금 다쳤다면 아빠는 분명 전화를 걸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날도 굳이 굳이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했다. 그 사고로 한쪽 청력이 완전히 망가진 OO이는, 지금은 다른 한쪽 귀로만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퇴근했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OO에게 미안한 건, 그날 퇴근 하면서, 내일 휴가를 쓰면 안 되는데... 결제받아야 할 서류가 있는데... 회사 업무를 걱정하면서 동료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나의 모습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잠시 일을 쉬기로 결정한 것은, 나의 의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인사이동 후 전혀 새로운 부서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다. 나의 결심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한 번 마음먹고 난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쩌면 우리 부부에게 하늘이 기회를 준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남편이 희망퇴직(ERP, Early Retirement Program)의 기회가 생겼고 남편이 먼저 퇴직을 하고 약 10개월 후, 나도 휴직계를 내었다. 자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렸다. 남편의 퇴직 절차가 마무리된 몇 개 월 후, 우리는 독일로 일단 가보기로 했다. 나의 휴직을 보험 삼아 딱 2년만 모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젊기도 했다. 남자 나이 40대 초반, 여자 나이 30대 후반. 그렇게 우리는 낯선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남편과 엄마라는 또 다른 커리어가 시작된 나는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다. 아이들은 잘 적응했고 남편도 첫 해가 어려웠지 그 후에는 회사 생활 하면서 잘 지내게 되었다. 같은 계절이 두 번 정도 바뀌고 아이들에 대한 작은 목표를 하나둘씩 이루어 나가면서 나도 적응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고, 복직은 언젠가 내밀어야 할 나의 카드였다. 돌아갈 내 자리도 있고, 옆에서 꼬박꼬박 월급도 가져다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복직과 퇴직 사이에서 고민을 했지만 매일매일이 휴가 같았다. 코로나가 끝난 후 유럽 하늘은 맑았고, 우리는 매주 짧은 여행을 떠났다.


복직 신청을 한 달 정도 남긴 어느 날, 나에게 들려온 소식, 우리 회사가 한국에서의 영업을 접는다는 뉴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회사 동료였고, 그가 말하길, 이번에 희망퇴직 조건이 무척 좋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나는 퇴직자가 되어 버렸다. 퇴직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족과 해외에 있었고, 남편의 끈질긴 설득도 있었고,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오직 나만 결정하면 되는 그런 상황에 몰리면서, 나는 그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휴직자에서 퇴직자가 되어 버렸다.


P.S. '퇴직'이라고 쓰고 '희망'이라고 읽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희망을 찾아 퇴직을 한다. 그러나 나는 퇴직을 하면 희망이 보일 줄 알았다. 회사 울타리에서 얼마나 좋은 시절을 지냈던가, 계급장 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퇴직자에서 평범한 주부가 된 것을 인정하기까지 마음 관리가 엄청 필요했다. 그래, 참 좋은 직장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소중한 20대,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