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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생 Jan 29. 2021

지금보다 더 나은 다음 생을 위해

<설계자들>을 읽고

김언수의 2010년 작 <설계자들>

  

  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은 윤회한다. 다시 태어나는 세계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 중 하나이다. 당신이 죄를 지었다면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에, 선을 행했다면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에 태어날 것이다. 일단 인간 세계에 살고 있으니 우리는 다행히 전생에 선을 행했나 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는 축생도에 떨어질지 모른다. 경험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고 하니, 한번 당신이 축생도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짐승의 삶을 살고 있다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해탈의 경지에 올라 이 지긋지긋한 세계를 탈출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을까.


  나는 <설계자들>을 하드보일드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차분하고 비정한 암살자의 세계와 그 세계에 사는 지극히 인간적인 자객의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었다. 그런데 후반부의 전개는 마치 ‘이 책은 단순한 하드보일드 소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위화감을 설명하기 위해 책을 분석했고, 나름의 해석을 얻었다. 지금부터 그 해석을 소개하겠다.      



  이 작품의 현실은 암살의 천국이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설계자'가 살인을 설계한다. 어떤 차를 타서 몇 시에 호텔의 특정한 방에 들어가 정해진 흉기로 죽여라 - 이 계획을 '설계'라 부른다. 설계가 내려오면 '푸주'의 암살자가 그것을 실행한다. 빨간색 소나타를 타고, 7시까지 힐튼 호텔의 305호실에 들어가 망치로 머리를 내려찍으면 끝. 암살자도, 설계자도, 설계자에게 지시를 내린 누군가도 잡히지 않는다. 혹여 그 죽음이 암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암살자만 잘라내면 끝이다. 설계자는 잡히지 않는다. 


  작품의 배경인 푸주를 더 자세히 알아보자. 푸주의 사전적 의미는 ‘소나 돼지 따위 짐승을 잡아서 그 고기를 파는 가게‘이다. 푸주가 암살자를 파는 시장이라는 점과 작중에 나타난 ’암살자 또한 설계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서 암살의 대상과 암살자는 ’짐승‘ 취급이다. 인간이 짐승이 되는 곳, 즉 푸주는 불교의 ‘축생도’를 의미한다.


  '털보네 화장장' 또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설계’에 의해 살해당한 인간이 태워지는 털보의 가게는 평소에는 애완동물 소각장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동물과 함께 화장되며, 이런 설정은 푸주의 인간이 동물과 다름없다는 것을 앞서 ’푸주‘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푸주와 털보네 화장장을 통해 우리는 <설계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도구를 얻었다. 첫 번째는 '<설계자들>은 불교 개념을 주요한 소설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이고,  두 번째는 '작품의 배경, 푸주는 축생도를 의미한다.'이다. 이 두 가지 도구를 이용해 등장인물과 결말에 담긴 비유를 풀어 보자.


  등장인물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주인공 ‘래생‘은 푸주의 암살자이다. '너구리 영감'의 암살 집단 '개들의 도서관' 소속이다. 한때 도서관 소속이었지만 독립해 암살 회사를 만든 '한자'는 도서관과 대립한다. <설계자들>의 이야기는 도서관과 한자 간의 대립으로 전개되며, 설계자 '미토'의 개입에 이은 한자의 파멸과 래생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여 기서 언급한  인물에 '정안'까지 더하면 이들이 <설계자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들의 이름이 가진 의미, 그들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보자.


  먼저 <설계자들>의 시작이자 끝인 래생이다. ‘래생‘은 작중에 등장한 바에 따르면 한자로 ‘來生’이라 적는다. 일반적으로는 내생이라 읽는 來生은 불교에서 다음 생을 말한다. 연기(緣起) 개념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며, 현상은 업(業)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로부터 쌓아온 업의 결과로서 현재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름이 '來生'인 인간은 도대체 어떤 업을 쌓았기에 ‘다음 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래생이라는 이름은 암살단 '도서관'의 관장 너구리 영감이 그를 쓰레기통에서 주워 왔을 때 지어진 것이다. 작중에 “세상의 모든 비극은 자신이 발 디딘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래생은 자신이 뿌리내린 바닥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그가 뿌리내린 토양은 푸주, 축생도이며, 그를 심은 것은 너구리 영감이다. 따라서 너구리 영감이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피조물인 아이의 이름을 ‘래생'이라 지은 것은 그를 ’자신의 다음 생‘으로 여겨서가 아닐까 싶다. 다음은 래생과 너구리 영감의 문답이다.      


"늘 궁금했는데 말입니다. 영감님이 지어주신 제 이름,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해보라는 뜻이었습니까?" …… "네놈 이름에 그런 기막힌 뜻이 숨겨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너구리 영감은 래생을 자신의 다음 생이라 여겨 來生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연기(緣起)에 의해 너구리 영감과 래생에게는 무량한 업의 힘이 작용하고,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앞서 문답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음 생에나 희망이 있다'는 의미가 來生에 담겼다. 래생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얻어 평온한 삶을 살 기회를 버리고 암살자의 삶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來生이라는 이름에 담긴 그의 업이다. 이렇게 '래생(來生)'이라는 이름에 담긴 두 가지 의미를 알아보았다. 그중에서도 '다음 생에나 희망이 있다'라는 의미는 결말에 대한 복선이다.


  다음은 한자다. <설계자들>의 주된 반동 인물인 그는 래생과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과 대립 관계에 있다. 한자의 이름은 당나라의 사상가 한유(韓愈)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한유는 유교 중심주의를 강조하여, 불교를 맹렬히 공격했다. 또 당시 불교 승려의 특권에 반대하고 봉건적인 일상윤리 · 사회질서를 중시하였다. 한자는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에 대항하기 위해 기업의 형태를 띤 암살 집단을 만든다. 이를 통해 작가가 기업을 봉건 사회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는데, 봉건 사회에서 상위자에 대한 충성이 의무인 점으로 볼 때 ‘한자’라는 이름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통렬한 사회 비판이자 유머이다.


  너구리 영감의 이름은 일본의 ‘너구리 승려’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작중 한 종류의 백과사전을 계속 읽는다는 서술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그는 경전을 끊임없이 반복해 읽는, ‘깨달음을 얻는 것에 실패한 승려’이다. 그에게 백과사전은 경전이고, 도서관은 절이며 백과사전을 반복해서 읽는 행위는 그만의 수행이다. 하지만 아무리 수행을 해도 암살단의 단장에게 해탈은 불가능한 경지였다. 그걸 알아차린 너구리 영감은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아이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경지를 이루라는 의미로, 대리만족의 욕구를 담아 '래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그는 모순적이게도 도서관에 있는 책, 즉 불경을 읽으려는 래생에게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생각이냐?“     


라고 말한다. 아마 래생 역시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안 이야기를 해 보자. 큰 줄거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설계자들>의 감초 역할을 하는 인물이 정안이다. 모든 상을 비추어 본다는 ‘정안(正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완벽한 평범함', 즉 공(空)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원하는 평범함이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 삶을 가지는 것이지. 나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삶이 좋아.”     


라고 말하는 그는 어느 정도 불교적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안은 결국 돈의 유혹에 넘어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며, 이는 그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미토를 알아보자. ‘미토‘라는 이름은 '미륵 정토'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의 결합일 것이다. 정토는 윤회하고 있는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로운 부처가 사는 곳이며, 미륵은 현재는 다음 세상에 부처로 나타날 것으로 여겨지는 보살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직접 모습을 드러낸 '설계자'이며, 그렇기에 이야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미토는 래생에게 유일한 ‘살 수 있는 길', 즉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그녀의 마지막 설계는 자신을 희생하여 한자와 암살 세계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 '푸주' 자체를 없앰으로써 그 구성원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이다. 미토의 마지막 설계는 래생에 의해 잠시 좌절되었지만, ’미토‘라는 이름에 근거해 결국 그녀는 계획을 달성할 것이며 푸주는 구원받을 것이다. 


  미토의 등장과 정안의 죽음이 일어났다. 이제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미토가 자신의 마지막 설계를 실현하기 코앞, 래생은 미토를 기절시키고 자신이 그 설계를 실행하려고 한다. 이때 미토가 기절하는 장면의 묘사가 이 작품의 백미다.      


"그 눈동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공포도 놀람도 아닌 환멸이었다."      


언뜻 보면 미토가 환멸, 그러니까 '이상이나 희망의 환상이 사라지고 현실을 접하는 허무함', 즉 설계를 자신이 이행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허무함을 느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 순간에 미토의 눈동자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은 래생이며 따라서 '환멸'의 주인공은 래생이다. 그렇다면 래생이 허무함을 느꼈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이 장면에서 쓰인 환멸은 ’幻滅‘이 아니라 ‘還滅‘이다.      


'환멸(還滅): 불교에서, 수행을 쌓아 번뇌를 그치고 열반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   

   

미토의 눈에 비친 래생은 ‘還滅’이었다. 즉 이 문장은 래생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래생은 해탈을 이루었을까? 마지막 장면에 래생과 한자가 나눈 대화를 보자.      


"……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우리 둘 중에 누가 너구리 영감과 더 닮았을 것 같냐는 거지? 나? 아님 너?" …… 한자와 나. 누가 더 닮았을까? 누가 더 닮았을까? 래생이 한자를 향해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렸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럼, 지금 내 얼굴은 어때?"      


  이 대화를 보면 래생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서 우월한지 열등한지 생각하는 번뇌인 ‘만(慢)’이 사라져 아라한(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이는 부인된다.     

      

"그리고 그의 오랜 전매특허처럼 허공을 향해 피식 웃었다.“     


  '전매특허'란 ‘독차지하여 담당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떤 행동이 그 사람의 전매특허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행해 온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따라서 전매특허처럼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아직 마음에 번뇌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래생은 결국 해탈을 완성하지 못해 누진지(漏盡智)를 이루는 데 실패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런 결말은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암시된다. 일단 래생은 축생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불법을 깨우칠 수 있는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또 '래생'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다음 생에나 희망이 있다'라는 의미 또한 래생이 이번 생에 해탈을 이루기 어려울 것을 드러낸다. 너구리 영감과 정안이 해탈에 성공하지 못한 것 역시 래생이 해탈을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작품 결말의 의미와 작품의 주제가 동치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설계자들>의 주제는 '업'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빙글빙글 돌아서 삶의 뒤통수를 치는 법이니까“라는 래생의 독백에서 드러나듯 지금까지 쌓아온 업은 언젠가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래생은 살생을 밥 먹듯이 저지르며 무수한 악을 범했고, 그 악업이 래생이 해탈을 완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곧 제목이 “설계자들”인 이유이다. 설계자들의 설계는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다가와 그의 목숨을 빼앗는다. 설계를 의뢰했던 장군도, 심지어는 설계자 자신도 설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업’을 이 작품의 주제 의식으로 볼 때, <설계자들>은 <설계자들>일 수밖에 없다.     



  <설계자들>은 치밀한 복선과 철학적인 세계관을 잘 그려낸 수작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래생이 마지막에 지은 웃음에 '전매특허'라는 단어는 없어야 했다. 개연성을 포기해서라도 래생이 마지막에 지은 것을 비웃음이 아닌 희생을 통해 얻은 구원의 웃음으로 그리는 것이 더 아름답고, 더 인간을 위하는 길이었으리라.


  우리는 분명 누군가의 내생을 살고 있다. 그가 쌓은 업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의 축생도에 있다. 하지만 래생과는 다르게 우리는 해탈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면 된다. 석가모니는 ‘세상의 흐름에 거스르라.’고 설법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흐름을 거슬러 설계자들에게서 벗어나, 이 세계에서 탈출해, 지금보다 더 나은 다음 생으로 나아가자.



평점은 5점(5점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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