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부양할 의무에 대해서
1.
“이럴 거면 나 왜 낳았어?”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훗날 자식이 생겨, 본인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술 취한 친구들을 도발하기에 충분했다. 다들 술이 꽤나 된 것 같았는데도, 주제로 뛰어들어 흥분하며 이 말 저 말을 쏟아냈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존나 패야겠네”
이유는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부모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뜻이고, 이를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강한 물리적 자극, 한마디로 패는 것만이 답이라는 식의 의견을 내놓았다. 이 주제에 대한 내 나름의 의견, 그러니깐 정반대의 의견을 살포시 얹어봤지만, 택도 없었다. 역시나 친구들의 공감을 사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른 술자리에서 한 지인에게 같은 질문을 해봤지만, 반응은 비슷했다. 사실 내 친구나 지인의 반응이 낯설지는 않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춘기 아이가 부모에게 대들다가 “나 이럴 거면 왜 낳았어”라고 쏘아대다 결국 뺨을 맞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장면에 대해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다수의 사람들은 부모 편을 든다.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2.
조선 후기부터 괴상하게 변질되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의식 깊이 스며들어 있는 유교 사상은 확실하게 부모의 지위를 굳혀준다. 아무리 요즘 1인 가구가 확산하고, 과거의 가족관이 붕괴되고 있다고 해도, 역시 부모는 부모다. 여전히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을 좋게 바라보고,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은근한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어릴 때는 부모에게 잘 순응하고, 나이 들어서는 모시고 사는 그림을 도덕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3.
부모는 기독교의 신과 빼닮았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아이를 창조하고(아담과 이브), 자신의 말에 따라 살기를 바라며(성경 속 가르침), 끝까지 부양해 주는 아이에게 도덕적이라는 시혜를 내려준다(구원).
고등학교 시절, 교회를 열심히 나가는 친구에게 겁도 없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인간을 창조해 놓고, 자기 뜻대로 인간이 살기를 바라잖아. 그런데 그거 관종 아니야?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를 믿고 사랑하라고 하는 거.”
다행히 친구의 작은 체구, 온순한 성품 탓에 두들겨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태신앙 친구는 노발대발 뛰며 “하나님은 관종이랑 급이 다르다”고 침 튀기며 발끈했고, 나는 급하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공공연히 인정한다. 기독교가 상정하는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찬송가의 가사에서도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같은 가사가 흔하게 쓰여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이에 관해 부모는 좀 더 뻔뻔하다. 부모는 “너네들 행복하라고 낳았지” 같은 거짓말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모보다는 정직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지 않은 것처럼, 부모도 자식을 위해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분명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래서 낳는다. 인류의 긴 역사도 그를 말해준다. 문명이 탄생하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식은 노동력의 충족 수단이었다. 자식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그래야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식이 노동력의 공급원으로서 ‘자신을 위해’ 그렇게 절실하지 않다. 이것은 현재의 저출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기르고 하는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서”라는 말로 은근히 눙치고 넘어가지만, 기독교의 신이 그런 것처럼, 역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낳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자녀가 치명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게 될 것을 미리 알게 된다면, 그럼에도 자식을 낳으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식을 위해서라도 낳지 않겠다고들 말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낳지 않을 것이다.
4.
신이 있다면, 우리는 신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가질 권리가 있다. 특히, 내 삶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이유에 대해서. 이럴 거라면 차라리 나를 탄생시키지 말지, 이런 원망도 자연스럽다. 인간이 신에 대해 일련의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자식은 부모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이럴 거면 왜 낳았냐”는 뼈아픈 질문을 말이다. 이 말은 부모에게 씻을 수 없이 아픈 상처가 되겠지만 어쨌든 본인이 원해서 낳았고, 아이가 큰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다. 부모의 DNA를 물려받아, 부모가 조성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의 입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식의 말이 튀어나왔다면 그건 아이의 책임이 될 수 없다. 그런 소리가 안 나오게 아이를 지혜롭게 잘 키웠어야 한다.
계급장 다 때고, 유교 문화를 백색소음 처리하고, 자식과 부모가 링 위에서 오로지 논리로써 붙게 되면 부모 측은 1라운드도 못 가 박살이 난다. 부모를 지지하는 논리의 근거는 허약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모인데, 그래도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이 정도의 논리인 것이다. 논리가 "그래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승리의 저울대는 자식을 향해 가파르게 기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가 대드는 것에 본능에 가까운 반발심이 있다. 부모를 떠받드는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고, 부모로서의 확실한 우위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도 인지 못 하는 사이, 아이의 반발을 절대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5.
오랜 기간 조선왕조를 지탱한 유교 사상의 핵심에 효(孝)가 있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가 병들고 아플 때 자식이 자발적으로 수발들지 않으면, 나라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부담을 가족 구성원 각자에 분산시킴으로써 나라 전체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낮출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이데올로기는 오랫동안 살아남아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자식에게는 부모에 효도할 의무가 없다. 효는 분명 아름다운 덕목이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의 영역이지 의무가 아니다. 효가 의무라는 것부터가 웃기는 말이다. 봉사가 자발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효 역시 자발성에 기초해야 한다.
좋은 추억을 많이 선사하고, 따뜻한 품을 제공했다면 누가 뜯어말리더라도 자식은 알아서 부모를 모신다. 반대의 경우라면, 부모와 거리를 두거나 심하면 연을 끊고 살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하나의 냉혹한 사실은, 자식이 커서 행하게 될 효도는 부모 손에 쥐어지는 성적표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메커니즘을 애써 무시하고 효라는 덕목을 들이대며 강요해 대는 게 현실이다. 부모는 자기 편하자고 볼멘소리를 내고, 나라 입장에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분위기 조성을 한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만 있지, 자식에게 부양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애당초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못 살 것 같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 노후는 본래 본인들이 책임지는 것이고, 아이를 잘 키웠다면 아이는 알아서 보좌를 해줄 것이다. 키워준 것에 대한 보상, 즉 투자 대비 효과를 누리고 싶은 거라면 주식 투자를 해야지 아이를 키울 게 아니다.
내 주변에는 양극단의 사례가 있다. 한 친구는 다른 지역에 살면서도 주말마다 차를 타고 본가에 갈 정도로 부모와 친밀한 한편, 다른 친구는 부모와 어떻게든 접촉을 피하려 애쓴다. 부모와 친밀하게 지내는 친구는 어떤 식으로든 효도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효도하는 친구가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부모와 건강한 애착 관계가 형성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운에 좌우되는 게임에서 간택받은 소수만이 보기 좋게 효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 글을 구상하고 적게 된 나는, 이미 그 자체로서 복 받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