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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Oct 07. 2024

안녕, 나의 작은 사회

6. 심장 도둑



이곳은 봄이 되면 시선이 가는 모든 곳에 꽃이 머문다. 

연립 아파트의 뒷산은 그야말로 꽃 천국이다. 땅에 떨어진 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피해 총총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예쁜 색이 눈에 띄지도 않은지 밟히고 쓸리고 나가떨어져도 그것에 눈 한번 깜빡이지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참, 어른들은 악독한 무엇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발을 절대 방정맞게 굴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예의 있게 발을 디디며 총총거리며 걸을 것이다. 


아빠의 근무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는데 그럴 때마다 하루의 휴가는 꼭, 우리에게 할애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해가 사라지는 시간은 제외다.


꽃이 만발했을 때 우린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땅은 조금 질퍽거렸고 비릿한 냄새가 역하긴 하지만 이 정도의 습기는 건조한 나의 콧구멍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반가웠다. 


우리에게 길을 내어주는 앞서가는 아빠, 뭐가 그리고 좋아서 코를 킁킁거리며 총총거리는 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번뜩거리는 우성이, 뭐가 그리도 귀찮은 지 발을 툭툭, 거리며 입술이 대발 나온 언니 우정이, 우린 참 다르게 행복, 이란 단어를 이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언니, 우정이 너도 그때 행복했던 건, 맞지?


아빠가 입을 쩍, 하고 벌린 분홍색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꽃은 먹어도 되는 거야, 자 봐”


아빠가 그 큰 입을 벌어진 꽃처럼 아, 하더니 한입에 그것을 베어 물었다. 

맙소사, 저렇게 꽃을 피우려고 일 년을 기다린 저것을 잡아먹다니, 나의 동심을 한 번에 뭉개 버리는 행동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억지 미소를 짓기 위해 입술 끝이 살짝 떨렸던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진달래꽃이야, 아빠 어릴 적에는 먹을 것이 정말 귀했어
 달콤한 맛이 나기 때문에 참 많이 먹었지”


아빠가 우성이에게 손짓했다. 

그 아빠의 그 아들답게 또 꽃잎을 한 입 베어 문다. 우성이는 꽃잎을 찹찹, 씹으며 이에 낀 분홍 잎을 보여주며, 이~ 하고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당연히 편식 심한 언니는 아빠의 말을 들을 리 없다. 


“우재도 와”


난 먹기 싫다는 부정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꽃잎을 찢어 아주 조금만 입에 넣었다. 그런데 잠시 보니, 찢긴 꽃잎이 더 잔인하지 않은가, 나는 순간 죄책감이 들어 꽃잎을 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얘들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아빠는 나의 말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럼, 이라는 말로 끝을 맺어버렸다. 

난 오늘 살생을 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찢어 먹었다. 그 맛은 설명하고 싶지 않은 슬픔과 배신의 맛이었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꽃말을 지닌 것이 무색하게 난 지금도 진달래를 보면 슬픈 감정이 돋아난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정은 아빠의 손짓에도 모른 척, 을 일관하는 중이다. 

대단한 용기이지 않은가, 감히 최대의 권력자 아빠의 부름에도 모른 척이라니, 아빠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언니를 똑같이 모른 척, 했다. 

아빠는 까칠한 우정이에게 적응했거나, 맞춰 주는 연습을 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우리 가족 중, 그 비슷한 연습을 하지 않고 산 사람은 언니 우정뿐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서운 자연 앞에서도 대장 노릇을 하려던 아빠가, 세상에 우정에게 핍, 하는 소리를 듣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동생 우성이가 초등학교를 도시로 통학하는 동안 우린 점점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동생을 데리고 다녀야 했던 내게 짐을 하나 덜어준 셈이긴 하다.


우성이는 전학 간 학교에서도 아주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 수가 부쩍 줄긴 했지만, 명랑함은 그대로인 것을 보면 그랬다. 내게는 꿈도 못 꿀 일이겠지, 나는 우성이도 우정이도, 모두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는 해가 드는 적당한 자리를 잡아 도시락을 먹었다. 

역시 엄마의 음식은 집에서도 밖에서도 맛있다. 오늘은 아주 특별히 더 맛있는 기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엄마표 김치 볶음은 정말이지 최고다. 하지만 우정은 김치, 란 음식이 어떤 식으로 변신을 한 다 해도 젓가락도 접촉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란 말인가, 하얗고 예쁜 색만 고르고 골라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정말 얄밉다. 

헉, 내가 보는 것을 눈치채고 우린 눈이 마주쳤다. 

귀가 쫑긋거리고 등이 오싹하다.


“야, 뭘 봐 이 씨”


지금 우리는 아빠와 함께 있다. 나는 아빠의 자리에 힘을 빌었다.


“왜? 보면 안 되는 거 있어?”


말해 놓고 등줄기에 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왜 그랬을 까, 왜, 내가 드디어 미친 모양이다. 우정은 작은 눈을 치켜뜨고 아빠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뭐? 너 미쳤냐? 집에 가서 보자”


아, 난 아빠의 힘에 기대어 보았건만 아빠는 역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빠의 저 귀가 작아서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인가? 

난 대장의 작은 귀가 원망스럽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나의 빠른 이해력은 우정에게 비겁하게 말했다.


“미안해”


“시끄러워”


그날 저녁, 나는 다행히 우정에게 죽지 않았다. 

우정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지만 내가 상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늦었지만 미안해,라는 말을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그날 새벽, 오줌도 싸지 않았다.


무슨 학교가 방학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담임은 다음 주부터 우린 봄 방학에 들어간다고 했다. 겨울 방학이 끝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방학이란 말인가, 아, 일주일이란 시간이 빠르게 사라져 주기만 바랄 뿐이다.


오늘 영주의 얼굴은 굉장히 어둡다. 보통 때처럼 빛나는 웃음기가 없다. 

마치 길게 뻗은 포니테일 머리카락도 힘이 빠져 축, 늘어져 보였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 영주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우린 학교 앞 분식집을 들렀다. 물 오뎅(우린 그때 어묵을 이렇게 불렀다)을 파가 가득한 간장에 찍어 먹으며 파를 오뎅 위에 얹어 아삭거리며 씹는 게 좋다고 말하던 영주다. 하지만 오늘은 파를 아삭거리며 씹지도, 간장을 찍어 먹지도 않았다.


나는 매운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빨간 떡볶이를 가리키며 영주에게 말했다.


“영주야, 우리 떡볶이 먹자, 이건 내가 사줄게”


영주는 웃음 없이 대답만 한다.


“응”


우린 떡볶이가 가득한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아주머니는 떡볶이를 두 개 더 얹었다고 말하며 완벽하게 대놓고 고맙다는 말을 기다렸다.


“감사합니다”


우린 새끼손가락 만한 포크를 들어 매운 떡볶이를 찰지게 씹었다. 


“쫘압 쫘압 쫩쫩”


그제야 영주가 맛있게 음식을 씹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보다 행복한 소리였다.


“아, 맵다 헤헤헤헤”


나는 오뎅 국물을 떠서 영주에게 내밀었다. 영주도 매웠는지 눈 안에 눈물이 맺혔다.


“맵지? 영주야”


“응, 그래도 맛있어”


“멍청한 어른들이 하는 말이 맞을 때도 있네”


그제야 영주는 조금 웃는다. 그리고 말했다.


“우재야”


“응”


“우리 집 말이야, 저번에 내가 이사 나온다고 했잖아?”


나의 심장 박동이 환희를 느끼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응 응, 날짜가 잡힌 거야? 언제 언제 언제?


나는 온갖 행동을 해가며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을 모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우재야 미안”


“응? 왜?”


“시내로 나오는 게 아니었어, 더 멀리 가 
 난, 이제 이 학교에 다니지 못할 거야
 정말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이야”


두 손을 모으고 영주의 얼굴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던 나는 너무 놀랐다. 

그때의 심정을 말하자면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똥이 내려오고 뱀처럼 큰 지렁이들이 모든 길을 점령하고 나무들이 살아서 나를 옭아매는 공포와 고통이 나를 짓이기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세상의 모든 곤충이 내 몸을 기어올라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나의 친구 영주가 내 곁을, 이곳을, 나의 마음을 나의 심장을 떠난다. 그렇다면 나의 심장을 나의 영혼을 갖고 떠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주 멀리,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아주 멀리 간다는 것인가, 영원해야 하는 단짝이 가버린다. 

그것도 어른들 때문에 내 곁을 떠나는 것이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꿈속이라도 나는 서울이 어딘지 몰라 영주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이야, 이제 아빠와 엄마는 농사를 짓지 않을 거래 
 땅을 이미 팔았어, 난 눈치도 채지 못했는데... 
 이사 갈 거라는 말에 난 시내로 오는 거라 생각했어”


영주의 눈에 맺힌 눈물은 매워서 가 아니라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난 영주에게 희망의 말을 해줄 수가 없다. 나의 절망이 너무 커서 이 빛나는 아이를 위로해 줄 수가 없다. 

나의 볼에도 이미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어른들은 정말 멋대로다. 우리의 고난은 생각해 주지도 않는 아주 고약한 나쁜 어른들이다. 

어른들의 이별은 그렇게 아파서 끙끙거리고 술을 찾고 죽음을 찾으면서, 우리들의 이별은 그저 감내해 내야 하는 것이라니, 아, 내 인생은 쓴맛이 너무도 많다.

내 눈물을 본 영주는 보통 때처럼 다시 씩씩한 목소리와 손짓으로 내게 말했다.


“편지할 거야 우재야, 울지 마 우리 방학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이 말은 내게 위로가 될 수가 없다. 

난 다시 외톨이로 돌아갈 것이고 이젠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할 용기도 없다. 

나의 삼촌, 그러니까 나의 작은 아빠는 이럴 때 조졌다,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조졌다.


“우재야 울지 마, 네가 이러면 난 더 슬퍼”


“벼락을 맞은 거 같아 여기가 아파”


나는 엄마가 화날 때마다, 또는 슬픈 일이 일어날 때마다, 심장을 치며 말하는 모습처럼, 똑같이 나는 내 심장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진짜, 아파”


“어? 어떡하지? 많이 아파?”


난 엄마가 왜, 그럴 때마다 애꿎은 심장을 그렇게 주먹으로 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통증이라니, 나의 엄마가 그렇게 많이 슬프고 힘들었단 말인가, 난 엄마가, 그리고 내가 불쌍했다. 

분식집, 아주머니가 내게 물을 갖다 주며 말했다.


“체한 거 같은데? 자, 이거 마시고 이것도 먹어, 소화제야”


아주머니는 초록색, 알약을 내게 내밀었다. 

이 약을 먹으면 정말 내 심장이 그만 아플까?

차라리 분식집 아주머니가 백설 공주에서 나오는 악마 왕비가 되어서 내게 독약을 건네주길 바랐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것을 받아 삼켰다. 


“우재야, 가자”


영주가 나를 부축하며 나의 손을 꼭, 아주 꼭, 잡았다. 나의 콧물이 주책을 떨며 자꾸 입으로 들어온다. 

영주는 나의 엄마처럼 내 콧물을 닦아내며 다시 손을 꼭, 잡았다.

봄 방학에도 영주는 내게 편지를 썼다. 

나는 아주머니가 준 초록색 알약을 먹었지만 아무 쓸모없이 죽지도 않았고 심장의 통증도 사라지질 않았다. 

나는 영주에게 답장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답장을 해 버리면 영주는 나의 그 편지를 받지도 못하고 서울로 떠났을 것 같은 공포감 때문이다.

 정말 마지막 편지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나는 며칠째 똬리를 틀고 누워 소리 없이 조용히 끙끙 앓았다.


영주에게 전화가 왔다. 


“우재야, 몸은 괜찮아?”


“아니”


“많이 아파?”


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네가 가는데 어떻게 안 아파”


내 목소리를 들은 엄마가 나를 흘긋,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난 눈치를 보며 말소리를 낮췄다.


“우재야, 편지 봤지?

 나 내일 서울로 가 아침 일찍"


 영주의 그 말이 나오자마자 모르고 있던 사실임에도 나도 아예 소리를 내고 엉엉,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으엉, 엉, 알고, 으엉 있엉”


“가면 내가 편지 쓸 게, 바뀐 주소로 꼭 편지 쓸 거지?”


나는 차마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엉 엉 으엉 어어, 편지 쓸게”


“아프지 말고, 방학이 되면 할머니 집에 올 거야, 그때 꼭 만나자, 알았지?”


“읍, 으읍, 어엉"


“이제 가 봐야 해 전화 끊는다? 편지 쓸 게 우재야”


나는 뚜, 하는 소리가 나자 전화를 끊고 방으로 달려갔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를 내며 몇 시간을 울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토했다.


엄마의 불만 섞인 목소리, 누굴 닮아서 그러냐는 소리, 는 이제 내게 아픈 소리가 되지 못했다. 

주황색이 주는 아픔만큼, 내게는 그 어떤 것도 아픔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며칠 후, 영주는 내게 정말 편지를 썼다. 그곳이 서울이라는 것을 주소로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서울특별시,라는 글자는 영주처럼 빛이 났다. 빛나는 영주는 친구도 금방 사귀었다고 한다. 

서울은 너무 크고 갈 곳도 많고 학교도 크다고 했다. 

지금 이 학교보다 더 큰 학교라면, 아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나의 생활은 메마른 사막과 같은데 영주는 그곳 생활이 좋은 모양이다. 물론 내가 그런 것처럼 영주도 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영주가 떠난 후, 성당 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다. 학교는 여전히 나에게 일 순위가 되지 못했고 성당은 정해진 아이들과 그나마 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로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영주를 위해 난 죽을힘을 다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들으며 아닌 듯, 착하게, 예의 바르게, 지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학교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난 늘 괴로운 아이였다.


늘 잃어버리는 나의 실내화가 화근이다. 체육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실내화를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희한하게 그 시간이 올 때마다 실내화를 잃어버렸다.

실내화를 보관하는 위치를 바꿔 보아도 꼭 내 것만 사라졌다. 아, 발이 달린 건가?

이렇게 생각해야만 난 학교를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실내화를 누군가가 고의로 그런 것이라면 난 다시, 학교를 저주할 테니까 말이다. 


난 영주에게 편지를 썼다. 도저히 자꾸만 사라지는 실내화 때문에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적어냈다. 

벌써 세 번째 실내화가 사라졌고 다시 엄마에게 말했다간 나의 육신은 박살이 날 것이 뻔하다고. 하지만 도저히 맨발로 그 더러운 화장실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그날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꾹 참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맨발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랫배에 통증이 올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 덕에 나의 발가락까지 얼기 시작했다. 정말 그 볼품없는 실내화를 왜, 누가, 뭘 위해서 훔쳐 간단 말인가, 그래 내가 잃어버린 거겠지.


난 영주가 서울로 이사를 간다고 처음 말했을 때, 괴로울 때마다 늘 상상했던 그 고약한 벼락과 천둥에 맞아 죽었어야 했다. 도저히 맨 발로 화장실을 갈 수 없었고, 이제야 끝이다,라는 생각에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청소 후, 집으로 달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약간의 긴장이 풀리고 있을 때 남자아이가 교실 바닥을 뛰어가다가 나의 옆구리를 훅, 치고 달아났다. 

난 아프다, 놀랐다,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 종일 참았던 오줌을 흘리고 말았다. 


난 그때 두꺼운 승마 바지, 그 시절 유행하던 허벅지는 넉넉하고 종아리는 딱 붙는 스타일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더 이상 흐르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야 했고, 그것이 교실 바닥으로 흐르기 전에 이곳을 도망쳐야만 했다. 

난 가방을 메고 신발을 찾아 있는 힘껏 달렸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오점을 찍고 나는 죽기를 바라며 뛰었다. 

정말 이 지구가, 이 붉은 성이 무너져 내리길 바라며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용기로 신발을 신은 체 학교에서 밖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뛰었다. 만약 신발을 신은 나의 모습을 선생 중 누군가라도 봤다면 난 얻어맞았을 게 분명했다. 


난 아주 빠른 육상부 선수처럼 뛰었다. 

영주의 빈자리는 내게 엄마, 아빠, 우성, 우정, 아니다, 우정이는 상관없이 내게 그들이 없는 것보다 더 큰 절망이다. 영주가 있었더라면 영주는 또 나의 언니처럼 또는 엄마처럼 따뜻하게 감싸주거나, 나를 못살게 구는, 내 실내화를 훔쳐 간 그 누군가를 벌하고 응징했을 것이다.


아, 이렇게 언제까지 내 곁에 없는 영주를 생각하며 슬퍼해야만 한단 말인가. 

나의 젖은 속옷과 두꺼운 승마 바지는 이 차가운 공기에 마를 리가 없다.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엄마가 어디에 있든 난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만발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더 비장했다.


“다녀왔습니다”


만화 속처럼 정말 발이 보이지 않게 후다닥, 후다닥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양말 속이 미끄덩거린다. 

제발, 나의 엄마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가 문을 열었다.


“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난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청소 안 하고 와서”


이런, 이 상황에 이 솔직함은 뭐람, 이런 바보 멍청이.


“왜? 오늘은 청소 안 하는 날이야?”


난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난 얼른 옷을 갈아입고 싶을 뿐인데, 엄마가 날 빤히 보고 있는 지금 난 돌아설 수가 없다. 나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눈치 빠르고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이다. 나를 수상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는 말이겠지.


“우재, 너”


아, 올 것이 왔다. 

엄마는 이제 빗자루를 찾던가, 욕이 섞인 단어를 찾던가, 넌 누구를 닮아서 이 지경이니,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럴 때 나의 눈은 허공 속을 헤엄쳐야만 한다. 엄마는 빠르게 나의 팔을 낚아챘고 꼭 해야만 하는 나의 엉덩이 부분을 확인했다. 


세상에 이렇게 치욕스러울 때가 있을까, 그래, 난 그때, 영주와 마지막으로 간 그 분식집에서 죽었어야 했다.

앞으로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해야 할 상황이 나를 기다릴까. 

엄마의 깊은 한숨이 내 귀를 스쳤다. 엄마도 지금 나처럼 심장이 아팠을까?


“하아아아...”


엄마의 긴 한 숨은 늘 나를 슬프게 한다. 늘 그랬다. 난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난 엄마의 한숨을 길어지게 만들고 미간에 상처를 만들기 일쑤다. 갑자기 완벽해 보이는 우정이 부럽다. 

한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엄마의 모습이 생각보다 차분하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됐는지 얘기해 봐”


엄마는 또 그 어려운 이야기 펼치기를 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다. 실내화를 또 잃어버렸고 화장실을 갈 수 없어 오줌을 쌌다는 이야기를 어찌할까. 엄마는 또 슬프게 심장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칠 텐데, 그 모습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하는 행동이란 것을 내가 알아버린 이상, 엄마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 같은 딸을 둔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의 미간이 더욱더 깊이 파여갔고 나는 그 미간이 불쌍하다.


아,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슬퍼서 나의 커다란 눈이 다시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은 드디어 뚝 뚝, 바닥으로, 입으로 목으로 흘러내렸다.

그래, 난 분식집에서 죽었어야 했다.


“넌 툭하면 울지? 응? 
 무슨 일인지 말해 달라는 게 울 일이야? 너만 울고 싶어? 
 나도 울고 싶다…”


엄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계속, 그리고 옷을 찾으며 씻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난 숨죽이고 내 눈 속의 줄지 않는 바닷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갈아입은 옷은 또 얼마나 보송하던지 이 행복을 이 순간에 느끼다니, 내 마음은 정말 갈피가 없다. 


깊게 파인 엄마의 눈은 꼭 나를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


“우재야, 뭐가 그렇게 너를 만드는 거야? 응?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엄마한테 말해 봐 넌 영주에게는 다 말하면서… 
 영주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그래야 해
 혹시 나쁜 애들이 괴롭히니? 응? 그런 거야?”


엄마는 지금 내게 애원했다.

잠깐, 뭐라고? 영주에게 다 말한다는 것을 엄마가 어떻게 아는 걸까? 

설마 내 편지를 모두 읽은 것인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잠가 놓은 서랍을 엄마가 열 수는 없을 덴데 말이다. 영주,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심장의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


“흐윽, 엄만 흑 영주가, 흑 아니잖아”


엄마는 나를 또 그렇게 슬프게 바라보았다.


“하아…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바지에...”


난 엄마가 말하는 저 소리가 듣기 싫었다. 울음의 소리가 더 많은 말을 뱉기 시작했다.


“실내화가 없어, 으억 실내화가 자꾸만 없어져 
 흐으윽, 화장실을 갈 수가 없어
 신발을 신고 화장실을 가면 선생님이 으억 흐어엉 나는 다 무서워 다”


난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다. 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나를 무서운 붉은 성에 놓고 갔냐고 원망이라도 하듯, 나는 뱉어냈다. 


우재라는 아이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엄마도 알게 될 것이다. 

내 안의 악마가 울음을 그치라고 명령하며 다시 말했다.


“내가 실내화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이유도 모르면서 늘 혼내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 자꾸자꾸 없어지는 실내화라고
 근데 자꾸자꾸 없어졌다고 말해야 하고 
 그러면 매일 혼나야 하고 나한테만 맨날, 뭐라 하고... 
 으어어어 엉, 나도 내가 진짜 실내화를 잃어버린 거라면 좋겠어
 으어어으엉 으어어어어”


나는 거의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랩을 외듯 울며 말했다.

난 다시 영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주는 내가 처음 실내화를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찾아주었고, 반 아이들에게 경고도 했었다. 


“누구인지 다 알고 있어, 모를 거 같아? 
 다시 한번 우재 실내화가 없어진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모든 사실을 안 엄마가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엄마가 나와 함께 등교하고 나와 함께 책상에 앉고 나와 함께 화장실을 가줄 리는 없는 것 아닌가.


“너 그럼, 지금까지 실내화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이제까지 계속...”


엄마가 말끝을 흐렸다.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엄마가 미웠다. 

엄마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난 엄마의 눈을 똑바로 보며 씩씩, 거렸다. 내 안의 악마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악,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그만, 그만, 난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우재, 그만 울어 응?”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너 그만 울라고 했다”


엄마는 내게 경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발 없는 귀신처럼 스르르륵, 문 뒤로 사라졌다. 


잠에서 깨는 것이 두렵다. 왜냐면 나는 학교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식탁에 앉았다. 당연히 우정은 나를 기웃거리며 삐죽거렸다. 

나를 비웃는 게 틀림없다. 나도 예전에 나의 삼촌이 화났을 때 했던 것처럼 밥그릇을 우정이 쪽으로 확, 엎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아예 뜨거운 저 된장국이 더 나을 법 싶다. 


아빠는 오늘 출근하지 않는다. 교대 근무가 바뀌는 날이라 자정 전 출근을 한다고 한다. 

나의 아빠는 다정하게 우성의 손을 잡고 나갔다. 우성이는 늘 나보다 먼저 학교를 가야 했다.

부지런한 내 동생, 넌 전쟁터로 가는 것에 불평 한 번 하지 않는구나. 멋진 놈.


나는 밥알에 쇠붙이가 붙어 있는 것처럼 씹어 넘기지 못했다. 그래 난 이렇게 점점 죽어 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난 쌀쌀한 날씨와 타협하듯 식은땀을 흘렸다. 엄마가 실내화 주머니에 새로 산 실내화를 넣었다. 

우성이가 부지런한 건 엄마를 닮았나 보다.


“자, 보여? 너 이름이야, 절대 가져갈 수 없어”


엄마가 생각한 것이 이거라니, 영주가 써먹던 방법이다. 

하지만 영주가 사라지고부터 이 이름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이 이름을 하얗게 잘도 지우니까. 난 귀신에 홀리듯, 현관문을 열었다.


“우재, 잠깐 기다려”


엄마는 또다시 짙은 초록색 투피스를 입고 머플러를 둘렀다. 

이 아침부터 어디를 갈 모양이다. 난 엄마의 저 자유가 부럽다. 갈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영주가 있는 서울로 달려가고 싶다.


“가자"


엄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이 아침부터 나의 손을 잡다니 꿈일까, 엄마는 나와 지금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난 묻지 않았다. 왜냐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면 실망할 테니까, 말이다. 


엄마가 먼저 말했다.


“엄마가 선생님을 만날 거야”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선생을 만난다면 내가 오줌싸개라는 것도 실내화를 매일 도둑 맡는 멍청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제 와서 그걸 안다고 해도, 난 잃을 것이 없는 삶이다.

난 체념하며 계속 걸었다.


“하, 멀다”


이렇게 먼 거리라는 걸 엄마는 몰랐다는 얘기일까? 

엄마는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더니 내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우재야, 이리 와 봐”


영문은 몰랐지만, 엄마의 꽉 잡은 손과 토닥거리는 다른 손이 싫지는 않았다.

엄마는 먼 거리를 잘 걸어 다니는 내가 기특했던 모양일까, 아니면 지옥 같은 붉은 성을 다니고 있는 내가 불쌍해서 인가, 아, 어느새 우린 붉은 성에 도착했다.


나와 엄마는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의 안내로 응접실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나는 식은땀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의 무지막지하게 튀어나온 잔 머리카락을 넘기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웃었다.


“우재, 너 이마 진짜 넓다, 예쁘다는 얘기야”


넓은 나의 이마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나를 놀리는 것인가, 장식장 유리문에 비친 나의 툭, 튀어나온 이마를 보니 외계인이 따로 없다. 

나의 퉁퉁 부은 눈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키가 큰 그리고 새카만 얼굴, 마치 인도 사람처럼 생긴 나의 담임선생이 예쁜 잔을 들고 들어왔다. 

어른들이 먹는 커피일 것이다. 

선생은 나를 다시 어떤 문 속으로 집어넣으며 책을 쥐여 주며 말했다.


“우재는 여기서 잠깐 기다려”


문틈 사이로 엄마의 고개가 오랫동안 끄덕이고 있었다.


“네”


난 담임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었다. 

나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그리 나쁘진 않다. 난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후, 무엇인가에 놀라 난 발을 버둥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사이 난 잠이 들었고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둘 다 나를 잊고 나가 버린 건 아닐까, 난 그 공간이 너무 답답했고 심장이 조여왔다. 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때 엄마는 새하얀 봉투를 선생에게 내밀고 있었고 인도 선생이 말했다.


“우재야, 안에 있으라니까”


엄마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다 말씀드렸어요, 우재 이리 와”


인도 선생은 자신의 책 중 한 곳에 새하얀 봉투를 끼워 넣었다. 그 순간 손가락은 빛의 속도였다.

선생은 나의 엄마를 뚫어져라 보았다. 하긴 내가 보아도 나의 엄마는 정말 미인이다. 

선생과 엄마는 한 번만 해도 되는 인사를 몇 번씩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다. 한 번 한 인사를 잘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니, 보이는 것도 쉽지 않은 가 보다. 

엄마는 내가 실내화를 신고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재야, 잘하고 와, 뭔가 힘든 게 있으면 꼭 선생님께 말씀드려, 알았지? 
 이젠 괜찮을 거야 우재야, 넌 문제없어”


뭐가 대체 괜찮다는 거고 뭐가 문제없다는 건가, 나는 정말 괜찮지 않은데 왜 또, 무엇이 엄마를 괜찮게 했다는 건지 말이다. 난 엄마에게 악마의 본성을 드러내며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먼 거리를 나의 초특급 미인 엄마가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난 창문 쪽을 보며 엄마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앗, 짙은 초록색 투피스는 어디를 가도 눈에 띈다. 엄청나게 예쁜 나의 엄마다. 


앗, 엄마가 위를 보았다. 난 왜 숨었을까, 다시 빼꼼, 엄마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엄마도 혹시 쓸쓸한 것일까? 엄마는 친구가 많다. 쓸쓸할 일은 없을 텐데, 혹시 엄마도 신발을 잃어버린 걸까?

왜 엄마의 걸음이 꼭, 지치고 외로운 나와 비슷해 보이는 걸까? 


혹시 집에 갈 일이 막막한 것인가, 아니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가시면 아주 늦게, 돌아온다. 

할아버지도 집에 없는데 엄마는 왜, 잠시 멈춰 서서 심장을 두드리고 있는 거지? 

꽤 오랫동안 엄마는 심장을 두드렸다. 

왜 그 행동을 하는 거지? 나 때문인가? 

분명 심장이 아프다는 거다. 난 너무 슬퍼 눈물이 맺혔다. 


담임선생이 교실로 들어오더니 기다란 막대기로 선생님의 책상 바로 앞쪽에 앉은 아이를 가리켰다.


“민철이 일어나서 우재랑 자리 바꿔라”


에? 이게 무슨 일이람, 난 죽어도 싫다. 

선생의 책상 바로 앞이 내 자리라니, 엄마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지? 

이제 보고 싶지 않아도 선생과 가까워진 이상 길게 뻗어 나온 저 시커먼 콧구멍 속의 털이 보일 것이다.


“얼른 바꿔라 첫 수업 시작해야지 우재야”


악 우재야, 우재야, 언제부터 나의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불렀다고, 아침부터 이 짓거리를 시키다니, 가식적인 새하얀 아니 아주 아주 새까만 봉투의 친절함이 배어 나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재빨리 짐을 싸서 민철이와 자리를 바꿨다. 

당연히 영문도 모르는 민철이는 나를 죽일 듯, 우정이처럼 나를 째려보았다. 

담임선생이 수업을 마친 후, 나를 제외한 모든 반 아이에게 경고했다.


“요즘, 자꾸 실내화가 없어지는 일 들이 많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알고 있다 그게 누구누구 짓인지도 다 알아
 이름은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다시 한번 누구의 실내화 든 없어지는 날에는 
 부모님 모시고 와야 할 일이 생길 거야, 모두 다 잘 알아듣길"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다시 민철이가 나를 노려보았다. 

앗, 아무래도 범인은 민철이 인가? 


나는 빠르게 다시 앞을 보며 입술에 약간의 미소를 띤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실룩였다. 다행인 건 한참 동안 난 실내화를 신고 화장실을 갈 수 있었고, 불행인 건 역시 반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밉살맞은 고자질쟁이가 되고 말았다. 

한 가지가 해결되면 왜 꼭, 한 가지의 문제가 또 생기는 걸까, 이것도 내가 앞으로 알아야 할, 어른들이 말하는 그 몹쓸 교훈이라는 걸까.


교훈은 쥐뿔, 나는 세상의 보이지 않은 뒷거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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