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봉 Oct 11. 2024

안녕, 나의 작은 사회

15. 수레바퀴 아래서



      

맙소사,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의 연립 아파트는 또다시 과거로 들어갈 참이다. 


우린 세 번째 이사를 했다. 우리 가족은 우성이와 언니 우정의 학교가 있는 곳으로, 더 큰 도시로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엄마의 독단적인 움직임으로 행해졌다. 우성이는 그렇게 더 이상 촌에서 도시로 통학하는 아이가 아니다. 


이사를 한 후부터 우성이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점점 이목구비가 또렷해졌고 그로 인한 자신감은 위로, 위로 하늘로 쭉, 뻗어 나갔다. 키도 전봇대처럼 삐죽, 빛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눈빛,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항할 수 없는 남자로 자라고 있었다. 

나의 바람처럼.


겨울 방학이 끝나고, 못생긴 호빵도 사라졌다. 

여전히 쌍꺼풀 없는 매력적인 눈으로 내게 미소를 짓는 수진이로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그리고 나의 선생님. 


우리는 단체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고, 서로서로에게 나눈 롤링 페이퍼, 또는 각자의 단짝을 위한 구구절절한 편지들, 우린 그것들을 잊지 않으려 가슴속에 깊이 박아 두었다. 

결국, 나의 선생님은 눈물을 터트렸다.


“선생님이 되고 가장 기뻤던 날은 너희들 담임을 했다는 거야

 너무나 고맙고, 사랑하고, 너희와 함께해서 선생님은 너무 행복했다"


아, 나의 영원한 담임 선생님, 나의 영원한 음악 선생님, 그때 내가 말했었나요? 

선생님의 학생이라서 저도 너무 행복했다는 것, 정말 감사합니다.


수진이와 나는 선생님의 선물을 함께 샀고,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손 편지를 썼다. 

난 나의 중학교 2학년 시절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때 선생님과 뜨거운 안녕, 뜨거운 포옹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정희야, 수진아, 잘 가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반장도 잘 가.     


우린 대대적으로 이별을 하고, 각자의 반으로 나뉘어 느린 걸음을 걸으며 옮겨갔다. 

그 느낌은 내가 처음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기분과 같았다. 

또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단골손님처럼 머리에 박혔다. 

모두 아는 얼굴이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 달리 놀라울 정도로 모르는 얼굴뿐이다. 


나는 수진이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한 시간 공부 후, 다시 친구들과 만나 서로 미소를 맞대고 또 한 시간을 공부하고, 또 만나 재잘거렸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일이 될 줄이야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내가 수진이에게 한 말들이 스스로 내게 덫을 놓는 일로 되어 버리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면 난 옆 반의 수진이에게 간다. 

또는 수진이가 온다. 또는 나의 학급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정희의 학급으로 걸음을 옮긴다. 

또는 정희가 나에게 온다. 


나의 이런 일상은 점점 공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바쁜 하루하루가 또 고달팠다. 

나처럼 감정을 담고 있는 공간이 작은 아이는 쉴 수 있는 시간, 그러니까 홀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적극적이던 우리들의 행동은 나부터 조금씩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어쩜 우리의 작은 사회는 참으로 전쟁과 같다. 

어른들은 모를 거다. 우리의 작은 사회가 이렇게 잔인하고 치열하며 전쟁과 같아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을.


우린 서로에게 나태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기를 꺼렸다. 

쉬는 시간에 누군가 오지 않아도, 왜 오지 않았어? 무슨 일 있었어? 또는 언제 와?라는 말을 서서히 하지 않고 있었고 미소는 억지 미소가 되어 번지고 있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서로가 이해하자,라는 신호를 준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린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난 이 치열한 작은 사회가 너무 피곤했다. 

얼른 어른이 되어 내가 원하는 작은 상자 안에 숨어들고만 싶었다.


나는 중간에 있는 나의 위치도 고통스러웠다. 

수진에게만, 정희에게만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냉랭해 갔고, 한 번의 이별을 잘 넘겼던 것처럼 두 번째 이별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암묵적인 서로 간의 이해로 발길은 각자 자기 학급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난 자연스럽게 나의 짝과 그 주변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희는 워낙 많은 친구와 잘 어울렸던 아이라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수진이는 분명 나와 암묵적인 이해를, 고개를 끄덕이며 또는 눈빛을 교환하며 나눠 놓고, 내가 변했다며 나를 오랫동안 원망하고 미워했다.

아주 지독하게.

하지만 수진이는 나처럼 나를 위해 나의 학급에 들러 나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도 수진이를 조금 원망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린 아예 만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우리라고 한다면 아, 쟤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린 꼭 함께 하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랬던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어떤 계약과도 같은 것이어서 어떤 한 명이라도 오지 않았다면 시곗바늘이 땅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갈 때까지 우린 그 한 명을 위해 기다렸다.


어느 날 나는 바로 옆 학급인 수진이 학급을 피해 계단을 내려가 돌고 돌아 정희의 학급에 도착했다. 

이것은 시간의 쫓김과 수진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수진이와 내 사이는 살얼음이 언 강물 위를 걷는 느낌처럼 불안한 시기였다. 

그 불안함을 가득 싣고 있는 수진이의 얼굴을 보기가 난, 참 버거웠고, 힘들었다.


정희의 학급 교실 문을 열었다. 

역시 점심시간은 아이들의 입이 오물거리느라 조용했고 온갖 음식 냄새가 났다. 

난 나의 도시락을 들고 정희를 찾았다. 그런데 정희는 여느 때처럼 우릴 기다리지 않고 다른 여러 명의 친구와 함께 우르르 몰려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난, 그때 아마도 발을 뒤로 두어 걸음 걸었던 것 같다. 

갑자기 난 사막 한복판에 홀로 서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 낯선 느낌에 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정희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정희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던가? 모르겠다. 

내가 대체 어떤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건지, 난 정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 충격으로 난 정희의 미소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예 뒤를 돌아 교실 밖을 나왔다. 


그들의 틈을 비집고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정희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과연 어떤 말을 내게 하고 싶었던 행동이었을까, 그 기억하기 싫은 의미의 웃음은 무엇이었을까? 


난 정말 혼란스러웠고 나의 온몸을 감싼 외로움에 소스라치게 놀랬다. 

난 각자가 모두 떨어져 있다면 서로의 소중함을 더 간절하게 느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반대이거나 간절한 소중함 때문에 심신이 허약해짐을 알아 그것을 거부하고 싶거나 중 하나일 것이다. 


용기 잃은 자는 수진이의 학급으로 발을 옮겼다. 역시 수진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난 다시 나의 교실로 돌아와 내용물이 비워지지 않은 도시락 가방을 고리에 걸고 창밖을 보고 앉았다. 

식어 빠진, 정희의 웃음처럼 냉랭한 도시락이 지금 이 기분에 넘어갈 리 없었다. 

이것은 초등학교 때 내 실내화를 누군가 훔쳐 갔을 때의 심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제대로 충격이 찾아왔다.


정희는 왜 눈을 마주한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모른척했을까?

나의 궁금증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후에도 난 그들에게 다시 다가갈 수가 없었고 기어코 끌어 내려간 내 자존감은 이미 깊은 바다에서 숨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비실거리며 영주에게 있는 나의 영혼에 대해 울먹이며 다시 블랙홀로 빠졌다.

불안감은 줄곧 새벽에 눈과 귀가 잠에서 깨도록 만들었다. 

점점 날이 밝아 올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학교를 가기 위해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가방을 메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나는 곧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처럼 될 것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 감정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등교를 했고 아이들의 말소리와 웃기지도 않은 일에 짝의 얼굴을 보며 웃는다. 

내게 가장 좋았던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청소 시간이 이젠 가장 절망적인 시간으로 변해갔다.

혼자임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수업 시간은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평화를 찾는다. 


간혹 나의 번호를 선생이 호명할 때면 난감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 한 곳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나의 수업 시간은 그나마 평안했다. 그 나머지 시간마다 재잘대는 아이들, 함께 걸레를 빨며 물을 튀기며 투덕거리는 아이들, 빗자루로 교실을 쓸고 쓰레받기로 쓸어 놓은 더러운 것들을 담는 궁합 좋은 서로의 단짝들, 넋 놓고 그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혼자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럴 땐 쓸쓸함이 치욕스러워서 화장실 안으로 도망간 후 문을 걸어 잠갔다. 

아주 자주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 시간에 아주 오래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변기 물을 끊임없이 내려보냈다. 

마치 나의 쓸쓸함을 내려보내기라도 할 것처럼.

아이들은 늘, 하나같이 둘, 셋, 이렇게 짝을 짓고 무리를 지어 다닌다. 

우리들이 따뜻했던 2학년 때처럼 말이다.


난 쓸쓸했다. 

가을 나무에 위태롭게 달랑거리는 나뭇잎보다도 쓸쓸했다. 

그때 나는 생각하면 안 되는 무서운 생각을 처음 해 보았다. 

사람이 죽는 다면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아프지 않을까, 또는 가장 멋있을까, 또는 가장 남아 있는 사람들을 과연 괴로움에 치 떨리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라고.


어른들은 말한다. 

그깟 별일도 아닌 것으로 사람이 죽어?라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고단함이 남보다 더 무거운 건 절대 아니지만 우리 모두의 고단함은 난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봐주길 바랐다. 

어른들이 고단함을 느끼는 것과 내가 고단함을 느끼는 게 뭐가 다르단 말인가? 

누가 더, 누가 덜, 이 없이 그저 같은 고단함으로 봐주길 바랄 뿐이다.   

  

성당에서의 생활은 늘 같았다. 

달라진 나는 달라진 것 같은 하느님도 싫었고 그를 믿는 그곳에 아이들도 싫었다. 

선을 요구하고 선을 말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날 홀로 두지 않는가.


나의 저주스러운 생각들은 성당과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난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받은 이 신앙심은 아주 얄팍함이 그지없어서 나 스스로 용서가 되지 않았다.


성당을 다녀오면서 성당 친구 정애와 난 떡볶이 맛집 중의 최고 맛집에 가기로 했다.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잘 됐다, 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오늘은 정애의 단짝 시끄러운 윤분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편하게 난 떡볶이만 먹으면 된다.


예전 우리들이 자주 갔던 그곳, 그 분식집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앗, 그곳에 우리 중 한 명, 그러니까 친구 수진이가 앉아 있었다. 수진이와 나는 눈을 마주했다. 

그때 벼락은 왜 치지 않았을까, 내가 벼락을 맞아 말문이 막혔어야 했다. 

아주 꽁꽁.


수진이는 나도 잘 아는 친구와 함께, 나와했던 행동들, 다정했던 행동들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게 늘 징징거리며 우정을 논하던 수진이가 다른 아이와 우정을 나누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 인지, 정말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벼락을 맞았어야 한다. 

나는 분명 나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라 착각하며 중얼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쁜 년”


난 인사를 이런 말이 되지 않는 소리로 시작했다. 

나는 입구에 꼿꼿하게 서 있었고 수진이는 그런 나를 당황스럽게 쳐다보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나쁜 건 너야”


나는 벼락이 치길 바라며 다시 소리쳤다. 

이번에는 나의 정신이 뱅, 하고 돌았던 것 같다.

나는 다시 말했다.


“거짓말쟁이, 나쁜 년”


수진이는 어떤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 말을 하려 다 동행한 친구에게 속삭이며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빠르게 나온 떡볶이를 정애는 눈치도 없이 쫩쫩,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난 정애에게 말했다.


“내 것도 먹어”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은 왜 나온 걸까? 생각해야만 했다. 왜 내가 수진이에게 배신감을 느끼는지 말이다. 

난 모두가 다른 반이 되길 원했고, 그렇게 현실이 되었으며 나도 아이들도 똑같이 우린 서로에게 소홀해졌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근데 난 그 잘못을 수진이에게 그 원망을 수진이에게 비친 것이다. 

나의 고달픔을 마치 알아 달라는 징징거리는 꼬마 아이처럼.


아니다. 난 모두가 다른 반이 되길 바랐지만, 나만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수진이는 그러지 않았다. 

수진이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수진이는 내가 아닌 다른 이와 우정을 나눌 생각이 없다, 고 늘 말해 왔다. 하지만 수진이는 우리의 우정을 다른 이와 나누고 있었고, 나는 우리의 우정을 다른 이와 나누지 않았다. 


나의 주변은 온통 암흑으로 둘러싼 채 겁먹은 햇살은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이 시간이 아직 몇 달 더 남았다는 것이 잔인했다. 

나도 엄마가 우성이와 우정이가 학교를 옮겼던 것처럼 내게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난 오늘밤도 뜬 눈이다. 

한 번 무서운 가위에 눌리기 시작하면 헤어 나오기가 정말 힘들다. 

또다시 그것을 경험할까, 난 눈을 부릅뜨고 자지 않은 날이 허다하다.


아, 난 참, 고되다.

     

영주야, 넌 행복하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