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반짝이는 작은 별
우리의 빛나는 시간이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 그 시간을 아주 꼼꼼하게 놓치지 않고 쓸 것이다. 겨울 방학이 끝나자마자 우린 각자의 길로 헤어질 것이고 아무리 빛나는 시간을 잡으려 애를 써도 조금은 놓치기 마련이고 그 속에는 별의별 감정들이 모두 섞여 있을 것이다.
방학을 앞두고 있던 우리의 얼굴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하루 중, 마지막 수업을 하는 중,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와 선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평소에 절대 이름을 부를 일 없는, 선생이 번호를 정해 문제를 풀라는 의도가 있을 때도 잘 걸리지 않던 정희가 불려 나갔다. 정희가 얼떨결에 불려 나가더니 선생과 함께 복도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정희는 선생의 말에 갑자기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고 말을 주고받았다.
몇 분 후, 정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들어와 가방을 챙기고 우리들을 한 번 돌아본 후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정희의 표정과 목소리는 오히려 그 소리를 들은 우리들보다 더 침착했다.
우리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정희는 빠르게 뛰어갔다.
나는 죽음을 아주 조금은 안다.
우리에게 닥친 죽음은 어른들이 알아서 하는 뭐, 그쯤의 일, 그리고 슬퍼하기엔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내내 놀라워하거나 당황스러워야 한다는 것, 그쯤은 알았다.
그리고 꼭,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픔이 가슴에 닿아 그제야 눈물이 펑펑, 흐른다는 것이다.
왜 어른들은 죽음에 대해 당연히 슬퍼할 시간과 슬퍼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는 걸까?
정희의 부모님도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정희에게 과연 죽음에 대해서 넌 몰라도 돼,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거야,라는 말을 들었을까? 나는 정희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연락할 수 없었고, 우린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며칠 후, 정희를 다시 학교에서 보았다.
생각보다 정희의 얼굴은 아주 밝다.
정희가 말했다.
“난 할머니를 미워했어
엄마가 아들 하나 못 낳았다고 얼마나 구박했는지...
어릴 때는 더 했거든, 어떨 때는 가끔 할머니가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생각했어
근데,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했고, 그렇게 미웠는데, 이렇게 가실 줄은...”
아마도 정희는 죽음에 관해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정희의 부모님은 나와 다르게 어린 자녀들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느끼는 공허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그림을 설명해 줬을지도 모른다.
모든 어른이 다 같지는 않다.
그 정도로 정희는 침착했고 죽음에 관해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른처럼 자연스러웠다.
결국, 그것이 다가왔다.
겨울 방학은 우리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린 정말 본격적으로 헤어지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난 멀리 있는 정희보다 그나마 가까운 수진이와 더 자주 만났다.
엄마는 내게 공부의 대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엄마는 오직 내게 만은 공부 좀 하라던가,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던 사람이다.
“우재, 넌 공부 취미 없지?”
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학생이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취미는 뭐 영화 보기 그림 그리기, 이런 것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공부가 취미인 아이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난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해야 하는 거지 취미 따위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이니까 공부해야지”
또 나의 이상한 대답에 엄마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공부가 하고 싶다는 거야? 하기 싫다는 거야?”
아, 갑자기 엄마가 내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뭘 하든, 중2가 된 지금까지도 나에 대해 관심이란 것을 빠르게 포기한 사람이 아닌가, 갑자기 내게 보이는 이 열의를 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좌불안석이다.
그렇다. 난 늘 그게 문제다.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하면 내 식대로 답하면 될 것을 어떤 대답을 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살피게 된다. 그건 즉, 내 의견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난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공부는 하기 싫어도 해야지”
“아 답답하다 그러니까 하기 싫다는 얘기지?”
엄마는 마치 내가 어,라는 대답을 하길 원하는 것 같다.
“그럼, 고등학교는 그대로 여기 다닐 거야?
친구들도 그대 로고...”
엄마는 마치 모자란 내가 학교를 옮기면 닥칠 위험을 미리 방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난 화가 났다.
왜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건지, 갑자기 의아했다.
우성이도 우정이도, 그들의 학교는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었고, 당연하게 엄마가 선택한 길로 그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내겐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지금 내게 나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라는 얘기가 아닌가, 어른들은 정말 이기적이다.
필요에 의한 말과 행동은 늘 달라졌다. 일관성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꼭 내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때는 모른 척, 선택하기 힘들 때나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는 말도 안 되게 신경을 쓰며 위하는 척, 말했다.
우성이도 우정이도 않던 그 선택을 나는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앙, 다물고 엄마의 반대가 될 수 있는 생각을 일부러 말했다.
“나, 열심히 공부해 볼 게”
엄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주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안다. 아주 잘 안다.
엄마는 나에게, 까지 관심과 빠른 발과 에너지를 쓰기에는 지쳤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길 바라서?
정말 쳇, 이다. 나의 오기가 어디까지 뻗칠지, 내 속의 악마는 하나가 아니고 복수형이 될 것만 같았다.
아니 무한대가 될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에 대한, 미래에 대한 엄마와의 계획은 이게 끝이었다.
정말 이게 다다. 나에 대한 계획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마음속조차.
방학이 되면 연립 아파트의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것 때문에 아주 내가 미칠 지경이다.
가장 싫었던 건, 우리 집 일 층에 사는 나와 같은 또래 남자아이다.
내가 알기로 그 앤 공부를 특별하게 우세하게 잘하는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애 엄마는 늘 우리 집에 와서 나의 엄마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앞에 두고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라 말할 수 없는 나는 너무 답답했고 비교당하는 건 더 억울했다.
사실, 그 애가 직접 나에게 잘못한 건 없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로 인해서 나는 그 아이가 미치도록 미웠다.
간혹 그 아이가 내게 말이라도 걸어오면 난 독설을 뿜었다.
내 속에 자리만 잡고 튀어나올 날을 기다린 악마들이 이제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어쩌면 처음 악마의 기질을 뿜은 내 모습을 그 애가 처음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독설은 정말 칼날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너무 타격이 큰 인신공격이었다.
“야 우재, 너 보충 수업하냐?”
뾰족하고 긴 그 남자애의 턱을 보며 말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왜 물어?
그 턱 주걱으로 집에 가서 밥이나 퍼
그리고, 내가 수업을 듣든지 말든지, 신경 좀 꺼라
제발 말 좀 시키지 마”
하지만 그 놀림을 받고도 그 앤 그냥 실실거리며 웃는다는 거다.
정말 대인배던가, 아니면 그 말을 이해 못 하거나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조금 미안해, 하거나 사과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걸까?
나는 꼭 후회할 짓을 연타로 폭발하듯 계속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랑을 일삼는 아주머니, 거기다 대고 난, 그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말하고 싶다.
아 정말, 아주머니 아들요, 걔 공부 딱 중간 뒤라 구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알고 있잖아요? 왜 자꾸 나의 엄마에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거죠? 라 단호하게 말이다.
이렇게 아주머니의 자랑을 듣고 있던 엄마는 내 이야기가 아닌 우정의 이야기를 한다.
난 정말 엄마에게 단 1 프로의 자랑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다.
난 오늘도 가방을 둘러매고 밖으로 나섰다.
오로지 내게 관심을 주는 그 애에게 달려가기 위해서다.
수진이도 나처럼 언니가 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있다. 그리고 아주 불친절한 남동생까지 셋이다.
나뿐 아니라 남매, 자매 사이는 다 그런 가 보다.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다는 것 말이다.
수진이도 나처럼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고 언니들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수진이도 꿈에 그리던 방을 홀로 온전히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던 자유를 만끽하며 서로의 우정과 반짝이는 감수성을 나누었다.
방학 동안 이곳에 올 때면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
낮에는 아저씨도 없었고 아주머니도 거의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난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 이층을 향해 올라가거나, 수진이 방의 창문에 대고 수진이 이름을 크게 부르면 수진이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온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고 수진이가 아닌 아주머니의 얼굴이 툭, 튀어나오며 내게 아주 끔찍한 말을 했다.
“수진이가 다쳤어”
나는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주머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 그냥 자전거는 왜 타고 다니는지 원, 올라가 봐”
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법도 잊고 수진이처럼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수진이의 방문은 옛날 전통 초가집에나 있는 쇠로 된 동그란 문고리가 달려 있었고, 한지를 바른 아주 작은 문으로 되어 있다.
난 그 쇠 문고리를 손으로 잡아당길 때마다 내는 삐익, 하는 소리를 들으면 늘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내가 온 것을 미리 알았을 수진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감싸고 있었다.
“수진아”
수진은 아무 말 없이 눈만 빼꼼, 보이게 이불을 내렸다.
마치 내 얼굴이 다친 것처럼 일그러졌다.
순간 알았다. 수진은 얼굴을 심하게 다친 것이다.
“많이 아파? 어때? 병원 갔다 왔어?”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진의 눈이 부었다.
“좀 봐봐”“
“괜찮아 가라앉을 거래”
수진이가 이불을 내린 그 순간, 으아악,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새침하고 작은 콧구멍과 쌍꺼풀이 없는 매력적인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작은 코와 눈은 퉁퉁 부어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난 망연자실하며 울었다. 수진을 위로할 겨를도 아픈 곳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이런 얼굴로 평생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그렇다면 내가 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더 놀랐고 아픈 환자 앞에서 엉엉거리며 울었다. 오히려 수진은 놀라 이불을 걷어차며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우재야, 울지 마, 나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 돌아올 거래”
수진은 특유의 징징거리는 말투로 나를 위로했다.
난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으어, 엉엉, 으엉, 이 얼굴로 계속 살면 어떡... 해, 으어엉”
수진이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으아하하, 아니야, 아니래도, 괜찮다니까?”
수진이의 웃음소리에 금세 전염이 된 난, 수진처럼 입을 벌리고 눈물을 그대로 흘리며 괴물이 된 얼굴을 보며 미친 듯 웃었다. 우린 다시 눈이 마주쳤고, 웃음을 또 터트렸다.
걱정을 미루고 솔직히 그 얼굴을 보고 웃지 않을 자가 누가 있으랴.
수진의 다친 얼굴의 이야기 전말은 이랬다.
수진이의 집은 언덕에 있었고, 시내로 나가기 위해서는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한다. 아직 자전거를 다루는 실력이 서툰 상태였던 수진은 무슨 용기에서 인지 그 가파른 경사를 자전거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아무튼 수진이나 나나,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용기는 늘 이렇게 문제를 일으킨다.
아뿔싸!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멀쩡했던 자전거가 갑자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그땐 그랬다고 한다. 내리막길에서 붙은 속도는 수진이가 자전거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을 정도의 속도였고 그대로 식당 앞, 전봇대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빠른 속도로 수진의 얼굴과 전봇대는 마주 보며 인사를 했고 서로의 충돌을 인식하게 될 때 가늠할 수 없는 통증이 따라왔다. 그렇게 얼굴이 호빵이 되고만 것이다.
수진의 일이라면 그 어떤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 못지않은 수진 엄마는 미친 듯 내리막길을 달려와 빠르게 병원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수진이가 말했다.
“아, 방학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큽”
수진은 거울 속 얼굴을 보며 계속 웃었다.
“다행이야 되돌아오니까”
수진이 나의 말에 다시 미친 듯 웃었다.
이날 우리는 바닥이 따듯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진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고 수진을 정말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자신에게 놀랄 정도로 수진을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다는 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수진은 요즘 고민이 생겼다.
학교에서 또는 이 작은 동네에서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사람, 그 뺀질이,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수진이는 그 사람을 준수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라는 말은 아직 내게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물론 충현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만 아직은 부를 때마다 나의 모든 신체의 구석구석이 오그라든다.
그래도 수진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수진 앞에서는 오빠라고 불러줄 생각이다.
준수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도 너무 많아 늘 소문의 한중간에 머물렀다.
들은 바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우정의 친구 희경 언니와 오랫동안 사귀었다는 사실이다.
근데 이 준수란 사람은 늘 다른 여자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돌아다녔다.
동성 친구가 아닌 이성 친구들과 늘 그렇게 다녔다.
뭐, 희경 언니와 지금도 사귄다? 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난 정말 그놈이 맘에 들지 않는다.
아니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딱 봐도 바람둥이가 아닌가, 늘 여자들 틈에 끼어 느끼한 미소를 날리거나 느끼한 목소리로 배려하는 척하는 모습에 나는 정말 절레절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수진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
난 구구절절 수진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또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준수는 정희와 친밀한 관계라고 한다.
정희의 집은 내 집에서 언덕을 넘어야 갈 수 있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솔직히 방학 동안 뭘 하고 지내는지 모든 것을 잘 알 수는 없었다. 아주 가끔 연락하는 것 외에는 정희의 생활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정희의 언니들은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고, 정희도 늘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을 것이다. 나는 정희의 그때 시절 이성과의 일이나, 그 비슷한 일들에 대해서 솔직히 잘 모른다. 정희가 말을 잘하지 않았던 점도 있었지만, 솔직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수진이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호빵이 화를 내니까 조금 무섭다.
“왜 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똑같이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응?”
솔직히 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방바닥의 따뜻한 기운을 받아 조금 졸고 있었다.
“내가 준수 오빠를 좋아하는 것도 아는 거 같아”
“네가 말했어?”
“어? 내가? 정희한테?”
내가 실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쳤냐? 내가 그걸 말하게”
“끙,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
“준수 오빠가,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아니까”
“어?”
“준수 오빠가 말했을 수도 있지”
“어머, 그걸 알고 말한다고? 정희한테? 왜? 거참, 미친놈이네”
수진은 내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욕해도 그 소리에 박장대소를 했다.
“정희랑 엄청 친해, 정희 둘째 언니와는 더 친하고”
“네가 정희한테 먼저 말해”
“뭘?”
“정희가 알고 있어도 네가 직접 걔를 좋아한다고 먼저 말하면 골치 아픈 일은 안 일어나
정희가 그런 거 이해 못 하는 애도 아니고, 정희는 그놈 안 좋아할걸?”
“아니야, 내가 말해도...”
“왜에? 네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모른 척할 애는 아냐”
수진이의 표정은 순간, 진짜 야수처럼 일그러졌다.
“쳇, 또 편드냐?”
난 그 소리에 잠이 번쩍 깼다.
“뭘 편을 들어? 다 같이 친군데, 우리 잘 지내고 있잖아, 또 그런다?”
“쳇, 우재 넌 나랑 정희가 물에 빠지면 누구 먼저 구할 거야?”
수진이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와 손가락이 내 겨드랑이를 간질인다.
난 그랬다. 농담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진지했다.
바보처럼 말이다.
“둘 다”
“거봐, 넌 항상 그래”
“그럼, 수영 못하는 사람부터?”
“에이 쳇, 됐어”
그때 너 먼저 구할 거야,라는 말을 꼭, 해 줄 것을, 나는 지금도 그것을 후회한다.
수진이는 내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아도 쳇,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라면 끓여 먹을까?”
“응”
수진은 몇 시간 전 자전거 사고가 난 사람 같지 않게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우리에게 라면이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존재다.
수진은 짙은 풀 색의 냉장고 문을 열어 총각김치, 오뎅(우린 어묵을 이렇게 불렀다) 볶음을 꺼낸다.
자극적인 맛을 너무 좋아하는 수진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끓는 라면에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뿌렸다.
우린 매운맛에 쿨룩, 하면서 고불거리는 면발을 잘도 입에 넣었다.
나는 해가 지기 전까지 수진의 방에서 함께 있었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걸까?
방학을 맞아 우성이 우정이가 있는 집에 돌아가기가 싫다. 나는 점점 이렇게 집과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 집으로 가는 길로 내리막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나쁘다. 전봇대 귀신이 나를 부를 것만 같고, 수진이의 얼굴을 호빵처럼 만든 길이 아닌가, 난 시내 쪽이 아닌 산이 붙어 있는 길로 쭉 걸었다.
해가 진 겨울 하늘은 마치 새벽과도 같다.
이 길은 조금 무섭지만 조금만 견디면 떡볶이 가게를 지나가며 매운 고추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침이 돌았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 보면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갈빗집이 나온다.
달콤하고 짠, 간장 양념 냄새가 입안을 못살게 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건널목이다.
오늘따라, 참, 집이 가까운 것이 아닌가, 교회 십자가에 붉은 불이 들어왔다.
“아, 깜짝이야”
난 왜 저 붉은 십자가만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성당의 십자가는 저렇게 붉게 물들어 있지는 않다.
엄마의 말대로 내가 잘못한 것이 많아서 그런 걸까?
난 교회를 피해 건널목이 없는 곳에서 차가 없는 틈을 타, 냅다 뛰었다.
놀이터를 조금 벗어날 무렵, 나의 발이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느린 뜀박질을 하려던 순간, 그 고요한 겨울 저녁 놀이터에 우성이가 홀로 있었다.
“앗, 뭐야?”
난 우성이가 맞는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목이 없는 귀신에게 맞서기라도 하듯 가까이 다가갔다.
우성이가 맞다.
“우성아? 이우성”
우성이가 담벼락 쇠 사이로 뒤돌아본다.
“니는 어디 갔다 오냐?”
그럼 그렇지, 어느 순간부터 우성이에게 누나라는 말을 듣지 못했던 건 좀 오래된 것 같다.
“너 혼자 뭐 해? 아무도 없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이람, 난 쇠로 된 담벼락을 손쉽게 타고, 뛰어넘었다. 연립 아파트 정문까지 갔다가 돌아오기엔 우성이가 너무 우울해 보였다.
우성이는 찬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두꺼운 티셔츠 하나만 입고 저러고 있다.
“야 너 안 추워? 집에 아무도 없다고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괜찮아”
“엄마는 어디 갔는데?”
“몰라”
“아빠는?”
“출근”
오늘은 아빠가 오후 시간이 근무라는 것을 깜박, 생각하지 못했다.
“우정 언니는?”
“아 몰라 없다고”
설마 엄마가 나는 몰라도 우성이만 두고 우정이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을 리는 없다.
“배고파”
“뭐라도 사 먹지 바보야”
우성이는 바보라는 말에 빠르게 발끈했다.
우성이는 요즘 말수도 많이 줄었고 줄곧 이렇게 청승 떠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리고 늘 반항적이다.
나는 마음이 찡, 아렸다.
“돈 없어”
우성이와 나는 그네에 나란히 앉아 바람에 따라 발의 반동에 따라, 쇠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뒤로 왔다 갔다를 했다. 그때 나는 우성이 몰래 주머니 속에서 아껴둔 오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어 흙 속에 파묻었다.
“너 땅 파면 돈 나오는 거 알아?”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우성이가 나를 보며 어린애가 보일 만한 웃음이 아닌 조소를 보낸다.
“진짜라니까?”
“아, 됐어”
난 나의 발밑을 발로 툭툭 차며 다시 말했다.
“여기, 여기 찾아봐 본 것 같아, 진짜야”
우성이는 그때 서야 쭈그리고 앉아 나와 함께 땅을 팠다.
내가 아끼던 동전, 나는 오늘 그것으로 수진이와 떡볶이를 사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호빵이 돌아다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우성이는 동전을 손에 쥐며 정말 놀라워했다. 저럴 땐 우성이는 진짜 아직 어린아이 같다.
정말 오랜만에 우성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
“거 봐 있지? 내가 아까 봤다니까?”
“우아, 너 뭐냐?”
“으하하 가자”
“어딜?”
“슈퍼 가서 크림빵 사고, 집에 가서 누나가 라면 삶아 줄 게”
키가 부쩍 큰 우성이는 두 밤만 더 자면 나보다 더 클 것이다.
조그마한 아기를 내가 안고 다녔는데 언제 이렇게 커 버렸을까?
이젠 앞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묶는다고 하면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우린 너무 빨리 커버린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자꾸만 뿌리치는 우성이의 손을 꽉, 잡았다.
“우성아, 통학하는 거 너무 힘들지?”
“아니”
“뭘 아니야, 힘들면서”
“그것보다 애들 때문에 더 힘들어”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내 동생이? 우성이가? 친구들 때문에 힘들다, 는 말은 정말 우리, 어린아이들에게는 너무 큰 상처다.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에?”
“여기랑 달라, 힘센 애들은 뭐든 다해”
“응? 뭐야? 너 무슨 일 있었어? 걔들이 괴롭혀?”
우성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눈을 부라린다.
“내가 가만있냐?
아직은 그런 일 없어, 근데 당하는 애들을 보게 되니까
보는 게 더 힘들어”
아직, 이란 말은 언젠가는 그럴 거야,라는 말과 같아서 세상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단어다.
아빠는 우성이게 항상 말했다. 맞고 들어오지만 말아라, 아무리 깡 센 내 동생이라고 해도 벌 때로 달려드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절대 맞고 그냥 있지 마, 돌이라도 들어”
누나라는 사람의 입에서 돌을 들라니, 하지만 내 동생을 지켜 주기 위해서 나는 뭐든 뱉어야 했다.
“쳇, 절대 안 당해”
“그리고 이제 중학교에 가니까
그 애들과는 헤어질 수도 있고, 운 좋으면 정말 좋은 친구도 생길 거야”
우성이는 말이 없다.
내가 우성이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용기를 내어 우성이를 위해 엄마에게 말했다.
그걸 알고 우성이는 나를 죽일 듯 덤볐지만, 가족은 그래야만 한다.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 한다, 아니 도와줄 수 없어도 해야 한다.
그리고 난 내 동생이 아무리 내게 버릇없이 굴어도 남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나의 주먹이 메추리알만 하고 힘은 기어 다니는 개미만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우정이도 혹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우성이는 별일 없이 아주 조용하고 안전하게 중학생이 될 수 있었다.
조금 더, 그리고 오랫동안 우성이가 반짝이길…
나는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