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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Oct 14. 2024

안녕, 나의 작은 사회

17. 잘 가, 영주야



새로 이사한 집은 그야말로 새하얀 색깔에 수도꼭지까지 낯설어 새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시 연습해야 했다. 아, 인생은 연습 또 연습의 연속이다. 연립 아파트에서 쓰던 수도 사용법은 몸에 완전히 녹아들어 불현듯, 나도 모르게 새 화장실을 쓸 때마다 그 습관이 나온다.


참 신기하다. 눈으로 새 수도꼭지를 보았음에도 내 몸은 전과 같은 방법을 기억하려 했다. 

안방의 반짝이는 레이스 커튼은 당연히 엄마의 선택이다. 역시 엄마의 눈은 따라갈 수가 없다. 

레이스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들어오는 그림은, 영국 여왕이 사는 곳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굉장히 넓은 베란다를 보고 그곳에 방을 하나 더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말 그러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언니 우정이와 함께 방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라디오를 들으며 더 이상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아도, 나쁜 아이가 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성이를 생각하면 나의 이런 생각은 정말 이기적인 것에 불과했다.


할아버지와 방을 함께 쓰는 내 동생, 우성이, 솔직히 무슨 공부가 될까.

방 안에서 피우는 담배 냄새, 특유의 할아버지 냄새, 이것만 생각해도 나는 우성이에게 미안했다.

내가 우성이처럼 할아버지와 방을 함께 쓴다면, 상상만으로도 나는 벌써 이 지구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성이는 왜 자신의 방은 없냐는 식의 불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일이지만 난 우성이가 그 일로 불평을 하거나 생떼를 부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 우성이도 나의 아빠처럼 대단한 효자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성이는 아예 잠을 거실로 나와 잤다. 밤마다 이불을 들고 이사를 가는 듯, 움직이는 이 아이를 보면 너무 속이 쓰리다. 


할아버지 말로는 우성이의 잠버릇이 너무 안 좋다고 했다. 

나는 그럴 땐 또 속으로 말한다. 그럼, 할아버지가 거실에서 주무세요, 그게 아니면 고모 집으로 또는 할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시면 되잖아요,라고 말이다. 


여긴 우리의, 아빠 엄마의 우정이, 우성이 그리고 내 집이 아닌가. 

난, 참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쓴 아주 못된 아이다.

이런 내 말을 아빠가 들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닌 내가 쫓겨나겠지. 

나의 아빠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기적인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왜 내 동생이 허허벌판 사막같이 뻥 뚫린 거실로 나와서 잠을 자야 하지? 

나는 추운 겨울에 우성이가 거실에서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화가 났다. 그리고 요즘은 외출을 자주 하거나, 고모할머니 댁이나 고모, 또는 지인의 집에 가면 아주 넉넉한 시간을 보내다 오는 할아버지의 그 발길을 조금씩 줄이는 모습이다. 

그렇게 우성이의 자유는 할아버지로부터 억압되고 있었다. 


언니 우정이는 예전에 악마의 탈을 쓰고 있었다, 고 말할 수 있다면, 이젠 그 탈을 벗어던졌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탈을 뒤집어쓴 것이 아니라, 우정이는 진짜 악마였다. 


우리의 연립 아파트에서는 나를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제 그 대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나로부터 우성이에게 옮겨 가고 있었다. 

그때 우성이는 몹쓸 사춘기 병에 걸려서 늘 눈알을 부라리고 다녔는데 우정이는 그것을 보고 어디서 눈을 치켜뜨냐는 둥, 도끼눈을 뜨냐는 둥, 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자주 했다. 

이상한 건 우정이는 자신의 위치가 굉장히 권력을 남용해도 되는 자리로 착각하고 있다는 거다. 

자신이 잘못했어도 그 자리에서 괜찮다, 고 우리에게 합리화시켰다.


그럴 때마다 우성이는 매번 당하는 나보다 한 수 위다. 

우성이는 지지 않고 어릴 적 배워 둔 태권도? 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특이한 방법의 돌려차기를 우정이 앞에서 보이기도 했다. 


아, 나는 그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뻗쳐서 미칠 지경이 된다. 

안타까운 건 처음 그 돌려차기를 우정에게 시도했을 때, 아직 우성이보다 키가 큰 우정이에게 발을 잡혔다는 것이다. 우성이는 한 발로 우정이가 움직이는 대로 깨금발을 디디며 끌려다녔다. 

우정이는 그 발을 순간 탁, 놓으며 미친 듯이 악마처럼 또는 마귀처럼 웃어 댔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터진 웃음은 나의 인간성을 우정이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내가 세상에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우성이 앞에서 웃어 버린 것이다. 

우성이는 우정이보다 나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그 도끼눈은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 고 내 이마에 글씨를 새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그 돌려차기를 본 이후, 웬만하면 우성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역시 남자아이라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하지만 우정의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틈만 나면 우성이를 놀렸다. 


엄마는 완전한 우리의 집, 완벽해야만 한 우리의 집, 그러니까 회사에서 지원해 준 집이 아닌 이건 우리 집, 이라는 표현을 했다. 나의 엄만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집 안을 쓸고 닦고를 로봇처럼 움직였다. 

보이지 않은 구석구석으로 걸레를 잡은 손을 뻗기 위해 하는 동작은 정말 기괴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엄마의 무릎과 손목은 미래에 닥칠 통증에 점점 무방비한 상태가 되고 있었다.


바닥은 하얗게 늘 반짝거렸고 내가 좋아하는 반짝이는 해가 전면이 커다란 창으로 들어올 땐 와, 이곳이 정말 천국이다.라는 생각도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들과 여러 선인장의 모양은 들쑥날쑥 이상해 보이지만, 꽃을 피우는 여러 가지 식물들은 싱그럽고 온화함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우린 이사 후 엄마의 깊은 한숨을 얼마 동안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는 지금 누구보다 더 행복한 것이다. 


물론 아직도 밥을 먹을 때 엄마의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음에도 꿈을 이룬 엄마는 행복했다. 

그래서 난 더 이상 그 부분에 있어서 할아버지를 미워하는 건 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어차피 우리는 각자 끼니를 해결하는 날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좁기만 했던 식탁과 의자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구석에 쓸쓸히 남기 시작했다.


하지만 골칫덩이 그 요강만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다, 고 얼굴로 쓰고 다니는 요즘 엄마는 요강쯤 문제도 되지 않아,라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를 아주 조금만 미워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으로 엄마가 집을 비웠을 때 내가 스스로 할아버지의 점심 식사로 라면을 끓여 준 이유도 그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그 행동을 했을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나쁜 아이라고 손가락질할 사람이 있을까? 

아빠 외에는 아마도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통학 생활은 하룻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눈 밑에 새카만 어둠을 드리웠다. 

나는 사나운 겨울바람을 뚫고 버스를 타러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단지가 크다. 그리고 예전 살던 그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를 들면 슈퍼를 가는 길도 아주 험난했다. 그만큼 장애물이 많았고 건물 사이로 부는 바람은 세찼다. 


그 넓은 길을 지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은 정말이지 험난했다. 

난 통학 버스가 있는 사립학교를 다니는 우정이가 정말 부러웠다. 

더군다나 겨울은 해가 늦다. 

시간은 정확하지만 해는 왜 겨울만 되면 왜 그렇게 늑장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우주의 원리를 따지고 싶지도 않다. 그저 추운 게 싫다. 


겁 많은 내게 새벽의 어스름은 시작이 아닌 끝의 어둠과 꼭,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모양의 옛 기와지붕과 한 마을의 밭고랑을 지나야 했다. 그 길은 매끄러운 시멘트 길이 없었다. 

딱딱하거나, 또는 눈이 녹으면 질퍽한 그 흙길, 그 좁은 길을 걸어야 했다. 

어쩌다 비가 오면 발은 쑥쑥 빠지기 일쑤였고 꼬물거리는 지렁이는 나뭇잎처럼 나부끼며 흙과 함께 뒹굴었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성당에서 배운 십자가의 길을 떠올렸다. 

예수님이 알면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다. 그 고통을 어떻게 고통이라고 하느냐,라고 나를 질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고통의 무게는 나 외에 아무도 쉽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오직 나만이 아는 깊이의 고통이니까.


어른들의 시각에 맞게 만들어 놓은 나의 교복은 한겨울에도 치마를 입어야 했다.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나의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종아리를 감싼 검은 스타킹 속으로 바람이 달고 온 날카로운 칼로 살을 베는 것 같았다. 


내가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그곳은 아주 큰길이다. 

그 길은 새벽이나 밤이나 낮이나 아파트만큼 큰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쌩쌩거리며 달리는 곳이다. 

나는 추위보다 그 큰 트럭들이 내 앞을 지나며 먼지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먼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공포를 느끼며 두려워했다.


으악, 이번에는 트럭 세 대가 연타를 치며 내가 느끼는 공포의 감정에 더 이상 들어갈 곳 없는 뇌에 마구 짓이겨 넣고 있었다. 정말 터질 지경이다. 

보이지 않아도 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윗니와 아랫니에 힘을 주어 꽉 다물었다. 그리고 새 수도꼭지를 트는 방법을 몸에 익힌 것처럼 기도문을 외웠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맹세하며 가슴으로 울었다. 

아, 드디어 천국으로 나를 데려갈 파란색 버스가 오고 있다.


지금 순간 흐를 눈물이 달랑거리며 천국행 버스를 희미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버스는 내 앞에 착지하며 취이이,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하아, 드디어 난 고통에서 벗어났다. 


버스 안 공기는 내 집보다 더 안락하다. 

이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큰 트럭들이 옆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김이 서린 창문도 꽤 추웠나 보다. 

금세 바뀐 따뜻한 공기가 나의 이마와 코와 목을 녹여 주었다. 

그 덕에 맑은 콧물은 연신 폭발 중이다. 그렇게 나는 가느다란 목으로 무거운 머리통을 받치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잠이 들었다. 


천국행 버스에서 자는 잠은 아주 달콤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버스는 자주 있지 않아서 나는 꼭 일등 또는 이등으로 등교했다. 

한 가지 좋은 점은 교문 앞에서 감시하는 주임 선생에게 눈에 들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갈아 신어야 하는 실내화도 신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편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신고 떳떳하게 교실까지 간다. 

선생들은 모를 것이다. 

실내화를 신고 다녀야 하는 학교는 흙더미만 보이지 않을 뿐 꽤 더럽다는 것을 말이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의 학교처럼 신발을 신고 다니면 안 되는 건가? 

실내화는 의미가 없다, 는 것을 난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모든 학생은 그렇게 나처럼 신발을 신고 아주 자주, 학교 안을 배회한다. 

실내화 신는 것을 폐지한다면 돈도 절약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난 청소도 열심히 할 것이다. 


아침 일찍 등교한 나는 책을 펼쳤다. 

고입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이사한 곳으로 학교를 갈 거라는 희망이 아직 사라진 건 아니다. 


혹시 모른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곳으로 갈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내 성적으로 나는 월등하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는 것을, 그 힘든 통학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그 후로 난, 진심으로 아주 열심히 엄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냥 내게 관심이 없었다. 그 사실은 정말 사실로 증명이 되고 말았다.


뭐 좋게 말하면 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를 엄마가 몰랐다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초등학교 때부터 도시로 통학을 한 우성이, 고등학교를 도시로 다니고 있는 우정이, 이건 모두 엄마의 통찰력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래, 결론은 전자일 것이다.          


여전히 수진과 정희는 사이가 좋지 않다. 

나의 고집으로 또는 나의 눈치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함께 떡볶이도 먹고 라면도 먹고 나란히 걷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냉기는 마치 드라이아이스와 같았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만지기만 해도 화상을 입었다. 마치 영원불변할 것처럼.


수진이가 좋아하는 준수는 성격이 좀 이상하다. 

굉장히 우유부단한 건지 아니면 여자들에게 모두 그렇게 다 잘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수진아, 나는 그놈 바람둥이 같아”


수진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야, 원래 인기 많으면 그렇게 보여”


수진이는 준수 이야기만 하면 활짝 핀 장미꽃처럼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수진이 전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달라고 했다. 함께 등교하자는 얘기다. 

이사 후, 나의 이른 등교 시간은 수진과 맞지 않았다. 

흩날리는 눈발이 발밑에 빠득빠득, 하며 밟혔다. 

오랜만에 나는 붉은 벽돌의 집 앞에 서서 수진이를 불렀다.


“수진아”


수진이는 다를 것 없이 우당탕 계단을 내려왔다.


“가자”


수진의 목소리가 힘이 없어 보인다. 

수진이 변함없이 나의 팔짱을 끼며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있잖아”


나는 버릇처럼 말한다. 수진이 늘 있잖아,라고 말하며 난 뭐가 있는데?라고 받아친다. 

똑같은 말을 해도 수진은 똑같이 웃었다.


“준수 오빠, 사귀는 사람 있데”


나는 너무 놀라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기며 섰다.

“뭐? 누구?”


“칫, 거 봐 넌 진짜 몰라”


“응?”


“에이 몰라 나도 포기야”


수진은 뭔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이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놈은 분명 바람둥이가 분명했으니까.


“뭐 잘됐다”


“생각해 보니 너 말이 맞아, 진짜 별로야”


나는 갑자기 변한 수진의 말을 듣고 좀 의심스럽지만, 그냥 웃으며 넘겼다. 

내가 수진 앞에서 분노를 폭발하던 날, 며칠 후, 나는 수진에게 편지를 썼다. 

길바닥 사건이 아닌 나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하는 반성문을 말이다. 

그리고 며칠 후, 수진은 정희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상황을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결론이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내민 손은 해연이 수진이에게 또 다른 사과를 하도록 만들었다. 

정희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정희 또한 해연도 더 이상 서로를 떨어진 체, 또는 모른 척하며 지내는 것이 불편했을 거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였고, 수진은 우리에게 자존심이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그것을 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나 때문인가? 


하, 마음이 몽글거린다. 

나는 이때 티 내지 않았던 수진의 행동을 조심스레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 고마움을 난 여전히 가슴속에 간직했고 그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

수진은 종이 한 장처럼 마음이 여린 아이다. 

그래서 스스로 거리를 두거나 스스로 마음을 닫는 일이 종종 있다. 

그건 자신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책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아이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았다. 얄밉다거나 이기적이거나 또는 이유 없이 밉다, 는 말을 들었다. 주위에서 하는 그런 말들을 나는 듣지 않았다.


수진의 방어책을 난 너무 깊이 이해했고 수진은 내게 그저 따뜻한 존재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방 한편을 남에게 내어 준다는 건 수진에게 굉장한 일, 또는 겁이 난다, 는 뜻임을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수진에게 나란 존재는 어마어마한 빛이었고 반짝이는 존재였다는 것도 이제 나는 잘 안다. 


영주도 나를, 내가 수진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했을까?

오늘도 나의 반짝이는 영주가 너무 간절하게 보고 싶다. 


수진의 편지나 쪽지는 하루의 시간도 비워 두지 않았다. 

수진은 별밤 라디오를 들으며, 꽃게랑 과자를 집어 먹으며, 수학 문제를 풀며 좁은 정원에서 셰퍼드가 컹컹, 하고 짖는 소리를 들으며, 내게 편지를, 쪽지를 쓴다. 

그것은 마치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기 숙제처럼.


수진과 나는 작전을 짜고 있었다.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날, 그리고 아스팔트 위 눈이 꽁꽁 얼어붙은 날, 버스가 끊겨 집을 가지 못한다는, 갈 수가 없다는,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만들어 냈다.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이것은 수진이가 오랫동안 열망하고 계획했던 일이다. 

그렇게 나는 수진이와 작은 창문과 다락방이 있는 그리고 옛날 창호지를 덧댄 그 문고리를 잡아당길 수 있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아주 치사한 방법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다시 또 착한 아이가 되겠습니다, 를 운운하며 눈이 펑펑 오길 땅이 얼어붙길 온 세상이 얼음이 되길 기도했다.


아빠 엄마는 나의 외박을 꿈도 꾸지 말라는 식의 언어로 나를 좌절하게 만든 적이 있다. 

연립 아파트에 살 때 한 번 시도했던 외박은 오 분 만에 산산조각이 났고 아빠 엄마의 말처럼 꿈도 꾸지 않았다.


나의 아빠가 말했다.


“어디 지지배가 남의 집에서 잠을 자?”


“남의 집, 아니라 친구 집이에요”


나는 아빠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해서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준 것뿐인데, 나의 이 설명은 아빠의 화를 돋우는 일이 되었다.


“그게 남의 집이지 뭐야?
 계속 말 안 되는 소리 할 거면 들어가”


난 아빠가 무서웠다. 그렇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짧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무너진 계획은 수진의 인내심으로 끝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아빠의 이런 점은 조금 모순이라 생각한다. 

왜, 성당을 함께 다니는 친구의 집은 남의 집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성당 친구와 함께 이야기하며 한방에서 잠이 드는 걸 원한 적이 없다. 이 또한 어른들의 의해서다. 

물론 어른들이 함께 술을 마시거나 얘기가 길어지면 우리의 수면 시간을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지만, 결론만 따지자면 이건 정확히 모순이다.

그렇게 아빠의 신앙심이 친구들을 갈라놓을 만큼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나의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례적인 폭설이었다. 

나는 계획대로 일요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수진이의 집에 도착했다. 

이미 버스를 타기 전부터 눈은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 창문 밖 풍경을 보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고 해가 지기 전, 집에 가야 하는 나의 운명은 오늘 뒤바뀔 것이다. 수진과 나는 아예 좁은 창문에 턱을 괴고 눈이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발 많이 많이 내려 주세요”


수진이는 하나님, 나는 하느님께 우리는 절실하게 기도했다. 

수진이의 방은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따뜻하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스르르 잠이 들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확인해야 했다. 

우린 빠르게 창문을 열어 밖을 보았고, 역시 똑똑한 기상 캐스터의 말은 옳았다. 

이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퍼붓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우린 배고픔에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향했다. 


앗, 깜짝이야 주방에서 수진이의 남동생이 우리를 째려보며 휙, 지나갔다.

나는 당연한 인사를 했다.


“욱이 안녕”


욱이는 나를 돌아보지도 자기 방의 문을 쾅, 하고 닫는다. 

수진이는 씩씩거리며 욕을 했다.


“싸가지 없는 놈, 그냥 모른 척해”


참, 재미있는 사실이다. 

어느 집을 가든 그 집의 왕초는 아버지가 아니라 따로 있다. 

내 집에서 우정이가 그렇듯 수진의 집에서는 욱이가 그러했다.


버스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의 심장은 쿵쿵쿵, 방망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 멈춘다면 나는 죽는 거겠지. 

지나가는 사람도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을 걸었건만, 우리의 머리통 위에는 하얀 눈이 쌓였다. 

수진의 집에서 그 내리막길을 우리는 미친 듯이 웃으며 나동그라지며, 제발 호빵의 얼굴은 다신 되지 말자고 떠들며 아슬아슬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다.


세상이 온통 새하얀 솜사탕이 되어 있다.

내리막길은 벌써 반들반들 해졌고 바퀴가 달린 그 어떤 것도 절대 내려가거나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린 드디어 공중전화박스에 도착했다. 

수진이는 전화기를 들기 전 다시 한번 당부했다.


“최대한 당황스럽게, 알지?”


나는 굳은 결심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도시에 있는 내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참 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엄마 나 우재”


가볍던 엄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반가운 엄마의 말, 은 이랬다.


“너 큰일이다, 눈이 많이 왔어, 버스가 다니겠냐? 큰일이네 진짜”


아빠의 목소리가 옆에서 뭐라고 큰 소리를 냈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수진이가 손짓으로 없다고 해 없다고 얼른, 이라며 입속에 공기를 넣어가며 오물거렸다.


“안 그래도 버스 타러 나왔는데 버스가 기다려도 오지 않아”


엄마가 악 소리를 질렀다.


“앗, 정말, 그러길래 너는 왜 눈 오는 날 거길 가?”


“수진이 엄마가 자고 가라고 하셔”


한참 동안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생기지도 않은 침을, 마른 목을 계속 꿀꺽거렸다. 

수진은 마치 수화를 하듯 온몸으로 난리를 떨었다. 이럴 수가,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역시 나는 아빠 목소리 앞에서는 개미만 해 진다.


“네 아빠”


“너 어디야”


아씨 왜 자꾸 알면서 묻는 거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수진이네 집이라고요”


“수진이네 집에 가서 어른이랑 통화할 수 있게 다시 전화해”


아빠는 당신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귀를 쫑긋거리던 수진이는 좁은 전화 부스에서 펄떡거리며 뛰었다.


“으아악, 됐다 됐어 됐어 으아악”


나는 기분이 뭔가 찜찜했고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다시 등이 쪼그라들었다. 

우린 이제 내리막길이 아닌 험난한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손을 꼭 잡고 전봇대를 잡고 올라갔다가 다시 누구의 집인 지 모를 벽을 잡고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평소에 오 분이면 갈 거리를 우린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도착했다.


늘 미소 지으며 늘 그래, 라 말하는 수진의 엄마는 역시 아빠와 통화에서도 말 보다 네, 걱정 마세요, 네네,라는 말을 했다.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고 우리를 바라보며 그래도 잠은 제시간에 자야 해, 란 말을 남겼다. 

우린 다시 계단을 우당탕거리며 올라갔다.

 

우리는 밤새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에 대해서 그리고 남자에 대해서 우리가 꿈꾸는 상대인 연예인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이다. 수진은 디자인 같은 걸 하고 싶다고 했다. 수진은 손 매무새가 꼼꼼하고 외적으로 꾸미는 걸 좋아했다. 

물론 우리 나이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지만 수진은 눈에 띄게 멋이 났다. 

그런 것을 보면 정희와 조금 비슷한 면도 있었다.

 마치 둘은 경쟁하듯 그렇게 비슷했고 조용함 속에서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했다.   

   

엄마는 또다시 너무 한다. 내가 친구를 만난다, 고 하면 꼭 차비만 챙겨주거나 어떨 땐 차비도 잘 챙겨주지 않았다. 모른 척하는 건지 정말 잊은 건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정한 용돈이 없던 나는 당연히 늘 쪼들렸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돈을 벌고 돈을 쓰니까, 잘 모를 것이다. 


돈을 벌 수 없는 상태의 나와 비슷한 또래 애들이 용돈 없이 얼마나 치사하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다. 

아끼고 아끼던 나의 코 묻은 돈은 이날 쓰기 위해 남김없이 털어 왔다. 하지만 눈 덕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난 돈을 쓸 일이 없었다. 그 돈을 가방에 다시 구겨 넣으며 나는 다시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웠다. 정말 미웠다.

우리 집의 모든 사람은 풍족하다. 하지만 나는 가난했다. 

아니 나만 가난했다. 내가 언젠가 엄마에게 말한 적이 있다.


“엄마, 나는 왜 용돈을 안 줘?

친구 중에서 나만 매달 받는 용돈이 없어”


“네가 필요할 때마다 달라고 하면 되지, 애가 무슨 돈이 필요해?”


나는 그때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시골에서 통학하는 우성이도 외갓집에서 학교 다니던 우정도 용돈이 있으면서, 나는 엄마 딸 아니야?라고 말이다. 또한 필요할 때마다 용돈을 달라고 하는 처지가 얼마나 비굴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인지, 그렇게 모른단 말인가. 

엄마는 틈만 나면 정당화를 시켰다. 

네가 말해야 줄 거 아니야, 넌 말을 하지 않잖아, 늘, 안 그래?라고.


어른들은 모른다. 

돈도 벌지 않은 내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히며 마치 받으면 안 되는 돈을 달라는 것 같은 나의 심정이 어떨지 아예 모른다. 그럴 때마다 난 정말 엄마의 딸인 게 싫었다. 


나도 맏이 우정이가 되고 싶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우성이가 되고 싶었다. 

중간은 어디에 내놔도 중간이고 중간은 진짜 중간처럼 어중간한 존재다. 

일등도 막내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내일은 꼭, 수진이가 좋아하는 분식집 라면을 사줄 거다. 

두 끼를 얻어먹은 내가 아주머니에게 할 수 있는 인사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밖에 없을 테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 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수진이와 나는 형광등을 끄고 주황색 불빛이 나는 작은 등을 켰다. 

그리고 눈이 내리길 멈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아마 날씨가 좋을 것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를 들으며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수진이가 말했다.


“맨날 너랑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를 이렇게 좋아해 줄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 아빠? 나는 마음속 모든 부정을 끌어올려 고개를 흔들었다. 

수진이의 말은 내 심장을 콕, 하고 찔렀지만 따뜻했다. 

수진이에게 나는 이렇게 늘 일등의 존재였다. 

아마도 수진이에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영주처럼, 내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솔직한 수진이는 네가 좋아 너는 내 친구, 영원한, 전정한 이란 단어를 쓴다.


누가 먼저 말을 끊었을까, 누가 먼저 잘 자,라는 말을 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우린 두 손을 꼭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잠을 자며 꾸는 꿈이 아니라 우리들의 꿈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수진이는 옷을 디자인하는 멋진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 직업이 없다. 

왜냐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으니까. 


멋진 수진이를 바라보았다. 

나의 치수를 재며 말했다.


“나의 친구 우재”


내게 만들어 준 옷에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별들이 박혀 있다. 

그것은 빛을 마주할 때마다 반짝거린다. 

마치 영주의 미소처럼, 이젠 수진의 미소처럼.


나의 친구 영주야

내 영혼을 이제 돌려줘도 돼 간직해 줘서 고마워


잘 가, 나의 빛나는 친구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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