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독한 감가와 사춘기
그렇게 나는 또 다른 붉은 성에 입학했다.
그러고 보니 세 개의 붉은 성은 모두 가까이 붙어 있다.
낭패인 건, 마치 같은 학교인 것처럼 그 겉과 속도 다르지 않다는 거다.
일 년 동안의 통학 생활은 절대 몸에 배지 않았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의 고난을 누구도 함께할 수 없었고 그 깊이를 알 수도 없다.
당연히 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정말 열심히 해 보려 해도 나의 생활은 버스로 시작해서 버스로 끝났다. 나의 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다른 아이들보다 40분 정도 일찍 끝낸다.
담임선생은 막차를 타야 하는 나의 편의를 봐주었다.
집으로 가는 막차는 딱, 오후 9시 30분이다. 나는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늘 서둘러야 했다.
어떤 날은 시간도 지키지 않고 조금 일찍 가 버리는 막차는 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럴 땐, 중간지점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 번째 내 집으로 오는 길은 험하고 또 험했다.
아이들로 북적거리던 버스 안은 작은 시골길을 지나면 청소기로 밀어낸 듯, 사라졌고 버스가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애써 달리는 오래된 기계 소리만 들렸다.
마치 버스 바퀴 귀신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나는 그 어두운 밤길이 공포스러웠다.
점점 초췌해지고 있는 얼굴로 40분 정도를 가다 보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는 흙길을 더듬거리며 걸어야 한다. 누군가 나 하나만을 위해 가로등을 촘촘히 심어 놓을 리가 없지, 나는 매일 공포 속에서 홀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난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할 때는 내 나름의 기대도 있다.
혹시나 엄마가 나를 마중 나오지 않았을까, 어둠은 어린 나를 두렵게 하니까, 엄마도 겁 많은 나의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같은 것.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 믿으며 나의 희망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한 반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처럼 우린 같은 반이 된 것이다.
정희는 어른스럽게 늘 자리를 양보했다.
그게 아니라면 혼자 앉는 것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정희가 양보한 거라 그렇게 믿고 싶다.
참, 준수 놈과 정희의 일은 그렇게 준수 놈의 짝사랑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그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우리는 그것을 다시 되뇌지 않았다. 그렇게 정희의 배려로 수진이와 나는 거의 매일 짝이 되어 앉았고 나의 앞이나 나의 뒤는 정희가 앉았다. 왜냐면 이번에도 우리는 등교 순서대로 앉아야 했고, 이것도 물론 담임 혼자서 결정한 일이다.
이제 이런 그들의 독선적인 결정 따위는 고등학교 1학년이나 된 우리에겐 습관 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세뇌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다.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 선생의 조건에 우린 로봇처럼 네, 하며 받아들였다.
환경은 정말 무서운 속도로 우리가 세뇌하도록 만들었다.
우린 거짓말처럼 다시 중학교 2학년이 된 것처럼 반의 모든 아이와 친했다.
그러고 보면 세 번째 붉은 성의 시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수진이와 정희의 우정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담임선생은 경력이 얼마 안 된 남자 국어 선생이었는데 이 선생은 늘 학생들에게 끌려다녔다.
물론 눈에 띄는 못된 아이들에게만 그랬다. 담임선생은 공중에 붕 떠서 우리를 위해 책임을 다하는 모습보다는 겉으로 맴도는 모습이 더 많았다.
선생의 얼굴은 뭔지 모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성격에 아마도 우리 반 아이들의 이름도 다 외우지 못했을 거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내가 담임선생의 학급 아이인지 다른 학급 아이인지 잘 몰랐을 거다.
뭐, 나는 그리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약간의 무관심한 담임선생 덕에 우리는 조금 자유분방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모두 친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새로운 얼굴의 친구들도 많았다. 영주가 살던 곳보다 더 시골인 곳에서 온 아이도 있었다.
무엇 보다 나는 은주란, 아이가 영주가 살았던 곳이 집이라는 얘기를 듣고 너무 반가웠다.
나는 이유를 불문하고 이 아이와 친하게 지냈고 정희와 수진도 그랬다.
은주는 영주와 이름 끝 자도 비슷했다. 나는 혹시나 영주의 소식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주에게 영주를 물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영주의 아빠가 돈을 가로채 도망갔다는 사실만 알 뿐, 시간이 흐를수록 영주에 대한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나쁜 상황을 만든 사람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은 법이다.
영주가 아니라 영주 아빠의 잘못이지만 영주,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남은 그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그녀의 의지와 다르게 찍혀 버렸다. 그 점을 생각하고 있으면 영주는 그 울타리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을까,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란 상상에 나는 종종 심장이 아렸다.
우린 야간 자율 학습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분식집을 가는 대신 자주 은주 집으로 향했다.
붉은 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가장 큰 장점은 부모님이 따로 시골에 머물고 있다는 것, 은주는 오빠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들이 없는 틈을 타 우리의 독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성 문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지, 아니 이 이야기만 하기 시작했는지는 경계점이 생각나지 않는다. 우린 정말 이성이라는 존재 때문에 뇌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 친구,라는 단어에 관심이 없었다.
그 관심을 유도한 건 주위의 환경이었던 것 같다. 마치 이쯤이면 너도 사귀어?
그리고 또 너도?라는 식의 대화로 관계가 형성되었다.
나는 그 선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배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죽기보다 싫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위에서 좋아한다, 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말도 안 되는 사귄다, 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니 정말 그렇게 되어 버렸다.
나는 그 분위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누구나 보면 아, 우재는 저 선배를 좋아하고 저 선배는 우재를 좋아한다, 고 정의를 내렸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 선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놈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긴 건 하얀 각진 주사위 같았고, 하얀 얼굴은 마치 다른 인종의 얼굴과 같았으며, 걷는 모양은 나는 멋있어,라고 말하듯 굉장히 자신만만하거나, 약간 밉상인 모양이다.
아, 정말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나는 정말이지 이 상황이 너무 싫었고, 그 선배는, 아니 그놈은 더 싫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사귄다는 의미로 충현 오빠를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나는 충현 오빠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 이상한 분위기는 난 그러지 않을 거야, 싫어, 난 충현 오빠가 있어,라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고 나를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죽어도 오그라드는 선배라는 단어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선배라는 단어를 말하거나 듣는 것도 나는 아직 너무 힘이 든다.
오그라드는 기분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감정이니까.
그 단어를 생각하면 나의 치아가 마치 달달거리는 기분이 든다.
그 사람의 이름은 근수, 다. 난 근수를 잘 알지도 못했다.
처음엔 사실 걔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몰랐다. 우린 체육 시간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왔고, 수진이가 내 책상 위에 놓인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이라는 그림이 생각나는 색깔의 봉투이다.
뭐 그 색을 지닌 봉투는 좀 마음에 들긴 했다.
“엇, 이게 뭐야?”
나는 역시 관심 없는 말투로, 오히려 되물었다.
“그게 뭐야?”
은주와 정희가 동시에 수진이가 들고 있는 그것에 눈을 모았다.
은주와 정희는 이때 짝꿍이었다.
“우재 네 이름인데? 우와”
나는 아이들의 소원대로 봉투를 뜯어 두 장의 편지를 활짝 펴 보았다.
세상에, 무슨 남자가 글씨를 이렇게 잘 쓰는 거지?
그 편지를 보자마자 나는 그 생각부터 들었다. 혹시 대필한 것인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근수는 글씨를 정말 잘 썼다.
징그러울 정도로 글씨체는 단아했고 옷매무새는 말할 것도 없다.
마치 결벽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걔는 한마디로 정사각형 같았다.
우린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그 분위기 때문에 설렜던 것이지, 걔 때문에 설렜던 건 절대 아니다.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그만하라는 말에도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나를 놀리며 또는 놀라며 또는 손바닥을 치며 또는 발을 동동거리며 난리를 쳤다.
이 사건은 우리들의 어떤 이성 간의 관계에 대한 시동과 같은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장점보다 큰 단점을 만들며 친구들의 우정에 관한 시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나는 근수라는 남자가, 누구인지 아이들에게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유난스러운 아이들 덕에 근수의 얼굴도 확인했다.
모두가 잘 생겼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심장을 처음 두근거리게 한 사람은 충현 오빠다.
하지만 우린 관계라는 것에 얽매이거나 그런 것에 집중하지 않는 사이이다.
그래서 난 충현 오빠가 좋았다.
이 지랄 맞은 분위기란 것은 내가 근수라는 남자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왔다.
난 등 떠밀려 근수에게 답장을 썼다. 물론 자의적 힘으로 의해 나의 뇌에 의해 나의 감정에 의해 쓰지 않았다.
그 답장의 편지는 지금도 나의 기억에 없다.
분명 첫 단추를 잘못 뀐 것이다. 난 근수에 대한 모든 편지 속, 한 글자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다만 나를 버스 안에서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이 좋았다, 는 글만 기억에 남았다.
대충 내용은 좀 뜬구름 잡는, 마치 멋을 부리긴 했지만 뭔가 어색한 느낌의 시와 같은 글이었다.
우리에게 남, 여가 사귄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린 아주 자연스럽게 근수, 를 떠올리면 우재, 우재를 떠올리면 근수,라고, 오그라드는 상황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 와서 난 근수를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 정말이라니까?라고 말하면 수진이는 믿지 않는다.
아, 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가스라이팅 당한 첫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정말 깜짝 놀랐다. 들러리들이 부르는 대로 답장을 강압적으로 쓰고 난 후, 또 두 번째의 편지가 왔다.
알고 보니 근수는 나처럼 통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난 버스를 타면 어느 곳도 잘 훑어보지 않는다. 근수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 그렇지도 않다.
수진이는 그가 잘 생겼다고 말했으니까.
난 막차를 타면서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근수는 늘 나와 같은 버스를 탔다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섬세하지 못한 눈을 가졌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아니 뇌는 참 신기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버스를 탈 때마다 신경을 써야 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렇다. 나는 근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못생겨 보이거나,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 숫기 없는 아이다.
누가 먼저 말을 걸어 주어도 대답도 잘하지 못하는 그런 아이다.
근수와 나는 아주 오랫동안 편지로 대화를 나누었고 실제 만남을 가진 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생각해 보면 근수도 숫기가 없는 아이가 분명하다.
햇살이 아주 따뜻했던 날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연한 연두색과 노란색, 가끔 보이는 붉은색, 그리고 하얗고 분홍 꽃을 달고 있는 나무들, 신에게 또는 자연에 고맙다는 말을 전해도 모자랄 그런 날이었다.
나는 한 여름의 짙은 녹음 보다 이제 막 깨어나는 색깔과 소리가 좋았다.
달력을 보다 붉은색의 숫자가 이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의 손뼉은 절로 나온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근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 일은 내게 참 생소한 일이었다.
내가 스스로 어딘 가에서 일을 한다는 건, 나는 상상을 해 본 일이 없다.
그 점에 관하여 나는 근수를 아주 높이 샀다. 그날 근수와 근수의 친구, 그리고 수진이와 정희, 우리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를 갔다. 그곳은 김치볶음밥부터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는 곳이다.
시골에 이런 카페가 생겼다는 건 그곳이 아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라는 얘기가 된다.
그땐 이런 곳이 흔하지 않아서 근사하단 생각을 했던 거지 그곳이 정말 근사하거나 대단하지는 않았다.
근수와 나는 이때가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근수는 꼭 친구를 대동한다. 그건 물론 나도 바라는 바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친구와 함께 늘 만났다.
다행히 우리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마주 보고 앉은 서로의 어색함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근수의 친구는 말이 많았다. 듣기는 거북했지만 그나마 친구의 끊임없는 말 덕에 어색함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었다. 사실 참, 이런 만남은 의미가 없다.
내 맘대로 싫다, 좋다, 를 말할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이럴 시간에 충현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잔디를 거닐며 웃음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현 오빠는 요즘 굉장히 바쁘다. 갑자기 서글퍼진다.
이 말도 안 되는 만남을 하고 난 후, 남는 건 군것질을 하고 나면 매번 돌아오는 물에 대한 갈증처럼 기분이 나쁘다. 음료수나 빵을 먹고 잡담을 나누고 헤어지는 게 다다.
정말 하기 싫고 재미없는 일 중 하나다.
왜 사귄다는 의미를 만남의 행위와 연관 짓고 꼭 사귄다는 단어를 써야 하는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우린 일찍 근수와 헤어지고 우리의 아지트로 향했다. 이제야 나는 숨을 제대로 쉬고 입술에 침을 바르지 않아도 되고 눈동자를 내가 보고 싶은 곳을 향해 돌릴 수가 있다.
은주는 삼겹살을 준비해 놓고 있었고 우린 서툰 솜씨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우리가 삼겹살을 구워 먹다니 난, 어른이 되어서 마치 함께 소풍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를 채우고 우린 따뜻한 날을 맞으러 밖으로 나갔다.
우린 함께 있으면 어떤 장소라도 좋았다. 길을 걸으며 우린 미친 듯이 웃었고 고기로 채운 배 속은 기억을 하지 못했는지 과자를 씹어 먹으며 뛰다가 걷다가, 를 반복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배경을 한 계절에 나 홀로 시간을 다 하지 못하고 다시 버스를 타야 한다고?
아, 내 발이 버스 안에 들어간 순간에도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직 해가 반짝거리며 친구들을 비추고 있었지만 난 다시 직사각형에 바퀴가 달린 매연 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그것을 타야 한다.
나의 의리 넘치는 친구들은 내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고 손을 흔들고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류장에 서서 또는 앉아서 나를 배웅했다.
그중 수진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반짝이는 햇살이 아직 집에 가지 않았음에도 수진이는 내가 버스를 타면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 점을 아이들은 눈여겨보며, 약간의 서운함과 얄미움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점을 수진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아이들은 입을 조금씩 삐죽거리긴 했지만 난 그걸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난 그렇게 수진이가 아이들에게 꽤 오랫동안 미움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땐 정말이지 아름다울 정도로 잘 지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친구, 란 속 모를 무서운 관계이기도 하다.
나의 빈자리는 말하지 않은 수진이를 불안하게 했고 애달프게 만들었다.
한여름 체육 시간은 지옥이다.
우린 시원한 강당을 가까이 두고도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노동하는 중이었다.
수진이가 뒤에서 말했다.
“저기 봐, 보여?”
“뭐?”
수진이는 다시 검지로 근수의 교실을 가리킨다.
“저기 한근수 교실, 쟤 한근수잖아?”
“그래?”
“어머 너 보는 거 아냐?”
나는 얼토당토않은 수진의 말에 웃었다.
“야, 너는 쟤 눈동자가 보이냐? 소머즈야?”
“푸핫, 야, 그럼 누굴 보겠어?”
수진이 말 대로 허연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긴 하다.
속닥거리던 우리는 결국 체육 선생에게 들켜 버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체 선착순, 젠장 나 때문에 반 아이들이 모두 뛰게 생겼다.
억울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난 선착순이고 뭐고, 그냥 걷다시피 뛰며 꼴찌를 도맡았다.
하다 보면 끝이 있겠지,라는 생각에 나는 계속 꼴찌를 했고 덕분에 반 아이들은 쉴 수가 있었다.
체육 선생은 내게 반항하는 거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끝내 선생은 나를 답답하다고 말하며, 벙어리냐?라는 말을 해 버렸다.
내가 정말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저 선생은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정말 어른들은 자기 멋대로 얘기하는 습관이 있다.
예의는 절대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이라고 배울 게 하나도 없는 게 참, 한심했다.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나를 선생은 수업이 끝나는 음악 소리에 맞춰 짧은 지휘봉으로 내 머리통을 때렸다. 누구 맘대로 나를 때리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이 선생의 행동에 나도 똑같이 머리통을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아, 그래도 선생이지 않은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입속으로 욕을 읊었다.
제발 계단을 올라가다 엎어져 머리통을 처박길, 바란다고 하늘을 올려 보며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결국 오늘의 체육 시간에는 선착순을 배운 시간이었다.
선착순이란 게 시험에 나오기라도 하나?
이런 망할 체육 시간.
수진이는 내 머리통 혹을 만지며 말했다.
“그러게 왜 자꾸 도발해? 좀 가만있어”
“저 선생은 가만있으면 가만히 있다고 난리난리
말하면 말대꾸한다고 난리잖아? 정신병자 같아”
시간을 다 마치고 나서 야 나는 창피함이 올라왔다.
수진이 말 대로라면 내가 선착순 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텐데 말이다.
악, 나는 한근수가 싫다.
머리통을 맞고 걸으며 뛰는 척하는 내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싫다.
왜, 지켜보면서 마음이라도 아팠을까?
마음껏 웃었겠지. 나의 삐딱거리는 마음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아니, 이제 시작인 건가.
며칠 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그리고 아주 부끄럽고 치욕스러울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집이 이사한 후로 나는 주말이면 학교가 있는 그곳에 자주 올 수가 없다.
그렇게 정희나 은주의 주말 생활은 잘 알지 못했다.
수진이는 늘 나와 자주 연락을 했고, 주말의 일들을 모두 월요일 아침,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말해 버리기 때문에 알 수밖에 없었다.
수진이가 말했다.
“있잖아”
나는 또 그 짓을 했다.
“뭐가 있는데?”
“아 정말, 이번에는 심각한 얘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수진이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너 놀라지 마”
“응”
나는 미리 해 오지 못한 숙제를 친구에게 빌려 노트에 베끼며 들었다.
“어제, 슈퍼에 가다가 한근수 봤어”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글을 베끼다 근수,라는 말에 속도가 줄어들었다.
“근데 있잖아, 정희랑 같이”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걔들은 나를 못 봤고, 나는 슈퍼에서 나와서 걔들이 걸어가는 거 봤어
빵집 골목으로 들어가더라?”
“알바 안 하고 어제 여기 왔었나 보네”
“나는 근수 친구도 있는지 알았는데 단둘이었어
너무 웃기지 않아?”
“근수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었나?”
“아니, 그 분위기가 아니었다니까?”
나는 솔직히 둘의 만남의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 한 건 그렇기 숫기 없는 근수가 단둘이 정희와 만났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나는 절대 수진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난 그 소식이 조금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수진이는 괜찮다는 나의 말을 뒤로하고 자꾸만 씩씩거렸다.
결국, 며칠 후 일이 터져 버렸다.
정희와 나는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수진이가 내심 걱정했던 일들을 내게 매일매일 보고하듯 늘어놓았던 말들이었다. 정희는 글자 하나도 다르게 말하지 않았고 솔직하게 내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한근수 란 애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왜 너는 걔가 좋아?라고 묻고 싶었다.
나는 그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분위기란 존재는 상황을 그렇게 끌고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드라마나, 만화책이나,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애인을 빼앗아 간 친구,라는 타이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처럼 상황이 흐르고 있었다.
“정희야, 나는 정말 괜찮아
처음부터 개랑 별 사이도 아니었고…
걔가 시작한 거지 난 아무 생각 없어
어우 야, 난 진심으로 걔 안 좋아해, 풉, 진짜야”
정희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커다랗고 쌍꺼풀 없는 눈을 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정희야, 더 일찍 말하지...
너도 나도, 우리 좀 곤란해진 거 같지 않아?”
나는 정희가 수진보다 좀 더 일찍 내게 말을 해 주었다면 수진에게 나는 무한대의 상상을 하지 않도록 미리 얘기를 해 줄 수도 있었고, 쓸데없이 내가 한근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 아이들에게 내게 조금 안 됐다, 는 식의 동정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 점이 조금 억울했을 뿐이다.
“정희야, 너 한근수가 진짜 좋아?”
정희는 어른이 된 얼굴처럼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걔는 진짜 너 좋아해?”
“어, 편지도 받았어”
정희는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한근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한근수를 좋아했다는 것? 뭐 그쯤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도 편지를 받았고 나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근수에게 들었다.
나는 이놈이 똑같은 수법을 쓰고 있다, 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희의 얼굴을 보니, 정말 한근수를 좋아하고 있었다. 정희 앞에서 그놈을 욕할 수는 없었다.
그놈의 수법을 모조리 말해 정희의 희망과 빛을 한순간에 꺼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하튼 나는 조금 더 큰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다.
정말 속이 다 시원했고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충현 오빠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지트에 모인 우리들에게 난 아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정희의 일을 누구보다 더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건 조금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나만 몰랐을 뿐, 아이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나를 다시 동정하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에 들썩거리지 않았다.
수진이는 아예 절망을 맛보았다는 얼굴로 입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뒤통수로 정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꽤 자연스럽게 그 시기를 넘어가는 듯했다.
정희와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솔직한 감정을 나누었고, 우린 누구보다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정희와 나의 주변인들은 오히려 당사자인 우리보다 더 들썩거렸고 난리 쳤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아주 섬세하고 남의 기분을 잘 알고 눈치가 빠른 아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틀린 얘기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정희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정희는 홍수처럼 불어난 소문 때문에 굉장히 힘든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난 정말 몰랐다.
내 생활에서 달라진 건 그저 자유를 좀 더 많이 얻었고 신경 쓸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 그래서 난 요즘 학교생활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던 참이다.
여느 때처럼 난 버스를 탔고 수진이와 손 인사를 애절하게 했다.
그날따라 몸이 아주 둔하게 느껴졌고 눈알은 피곤했다.
절로 숙어지는 고개는 버스 기사 뒤통수에 대고 예의 바른 인사를 한다.
지금 네 바퀴가 움직이고 있는 걸까?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니 꿈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발.
버스 기사 아저씨도 졸았는지 아저씨는 아주 길고 급박한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졸고 있던 나의 상체는 앞의 의자 뒤에 바짝 붙어 버렸고 반사적으로 나는 손잡이를 꽉 잡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는 목적지에 내렸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한근수가 너무 미웠다. 그리고 씩씩거렸고 버스는 나를 어둠 속으로 내려놓고 무심히 가버렸다. 눈물이 났다. 내게는 눈물이란 아주 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좀 다른 슬픔이었다.
지금 흐르는 눈물의 성격은 아주 확실했다.
계속 곤란해질 정희 때문이었다. 그놈이 모든 일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를 이용해 먹은 그놈이 원인이다.
나는 억울했고 분했다. 저 뻔뻔한 얼굴의 한근수가 밉다, 고 했다가 나는 결국 정희도 밉다, 는 말을 중얼거렸다. 왜 하필 그런 놈을 좋아했던 걸까, 바보 같은 정희가 미웠고 사기꾼 같은 한근수가 미웠다.
붉은 성을 두 번이나 졸업했는데 난 왜 아직도 이용당하고 있었던 걸까.
왜 평화를 사랑하는 나를 이렇게 자꾸 피곤하게 만드는 걸까, 정말 싫다.
나의 자존심은 비가 내리기 전 지렁이가 물을 피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바닥을 기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나를 안타까운 눈빛 비슷한 것으로 대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은 흙을 신발 앞 코로 찍어 내리며 욕을 했다.
나의 분은 삭이지 않았으며 그것은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땀이 온몸을 적셨다.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길지 않은가, 나의 꺼질 줄 모르는 화 때문에 몸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나의 이마는 뜨거웠고 아랫배는 한근수가 내게 발길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팠다.
목적지가 보인다. 들어가도 나를 반길 사람 아무도 없는 저 목적지, 나의 세 번째 집.
역시 집 안은 캄캄하다.
요즘 부쩍 우정이는 나보다 더 늦는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얄미운 언니 우정이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정이니?”
아니, 엄마 나 우재야, 우재. 나도 이름 좀 불러 줘. 나 너무 아파,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엄마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나를 보더니 엄마의 눈은 우정이가 아니네, 라 분명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엄마 얼굴을 보고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도시락 빼서 물 부어 놔”
난 현관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엄마를 빤히 보았다.
나를 보지도 않고 저렇게 말하는 엄마는 우정이처럼 악마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착한 아이 가면을 쓰고 있는 아이가 아니고 싶다.
잘 익은 복숭아를 쥐여 준 볼이 발간 나의 엄마가 사라졌다.
밤마다 오줌을 싸던 나를 걱정하는 엄마가 사라졌다.
차라리 다시 오줌싸개가 되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가 푸석한 얼굴을 말했다.
“왜?”
엄마,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버스 타는 거 정말 힘들어, 그리고 그 캄캄한 길 걷는 건 더 힘들어, 엄마, 나를 데리러 와 주면 안 돼?
엄마아, 엄마 아아,라고 외치고 있다.
나의 눈을 나의 진심을 나의 애절함을 제발 알아주길 바랐다.
“얘가 왜 이래? 불러 놓고 왜 또 말을 안 해?”
나는 또 말을 하지 않은 아이가 되어 버렸다. 나의 이마가 점점 펄펄 끓어올랐고, 할 말을 잃은 나는 엉뚱함을 뱉어 놓았다.
“배고파”
“저녁 안 사 먹었어?”
나는 도시락을 두 개씩 들고 다니다가 저녁은 이제 엄마가 쥐여 주는 종이 쪼가리로 해결해야 했다.
하루 종일 쥐여 짜는 듯한 아랫배의 통증 덕에 나는 저녁을 굶었다.
배가 아프다는 말이 어떻게 배고파,라는 말로 튀어나온 걸까, 난 멍청이가 맞을 것이다.
엄마의 얼굴은 짜증이 가득했다.
“아니야, 괜찮아”“
“뭐가 괜찮아? 안 먹었냐고?”
“안 먹어도 돼”
“아니 쟤가, 왜 그래?
밥 있어, 라면이라도 끓여 먹던가”
엄마가 주방 형광등을 켰다.
눈이 부셨다. 순간 어지럼증에 조금 휘청거렸다.
엄마가 나를 봐야, 휘청했던 나를 알은척, 이라도 할 텐데, 역시 관심의 눈빛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뒤따라온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미안했던 건가?
“라면 먹을 거야?”
“아니”
번에는 화가 난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라면 끓여 줄 테니까, 먹으라고”
엄마의 억지스러운 말은 늘 티가 난다.
악마가 대답했다.
“아씨, 안 먹는다니까, 안 먹는다고 오”
엄마는 놀라 푸석했던 눈가가 긴장감에 주름이 사라졌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어디서 소리를 질러? 응?”
엄마는 체육 선생처럼 나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나의 흔해 빠진 눈물이 또 또르륵, 흐르고 있다. 이 눈물은 시도 때도 없다.
나는 이 눈물이 정말 저주스럽다.
“야 니가 왜 울어? 응?
뭔 일이야? 대체? 얘가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어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엄마는 그제야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 되어버렸다.
“배가 아파, 배가 아프다고”
나는 천천히 침대 위에 쭈그려 앉았다.
“뭐?”
엄마는 조금 놀란 눈치로 나의 펄펄 끓고 있는 이마를 짚었다.
그때 우정이가 들어왔다. 역시 우정이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그게 나를 본 언니의 인사다. 기분 나쁜 계집애다.
“열이 나네? 언제부터 그랬어?”
“아까부터…”
“아까부터라니? 참나 원, 배는 어디가 아파?”
난 아랫배를 가리켰고, 엄마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더니, 대뜸 속옷을 확인하라는 것이 아닌가, 앗,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잊고 있었던 나의 그것, 늦다고 생각했던, 나의 그것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에 내 눈으로 확인한 선혈에 순간 눈앞이 캄캄, 머리가 어질, 아랫배의 통증은 더욱 심해진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엄마는 내게 분홍색 포장지로 싸인 생리대를 내밀었다.
엄마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말했다.
“신고식도 참 거창하게 한다… 배 아파를 배고파, 로 말하는 건 맞아?
어이구, 참 알다 가도 모르겠다 너 속을...
가방에 넣고 다녀, 내일 하나 더 사고”
엄마는 돈과 분홍색 알약을 책상에 놓았다.
“이건 지금 먹어, 열도 나고, 그리고 배 아픈 건 정상이야”
나는 분홍색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엄마가 답답하다며 소리를 친다.
“야앗, 누가 씹어 먹으래? 응? 하아, 정말...”
우정이가 으이, 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째려보았다.
지금 나의 기분 같아서는 저 악마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저 악마의 머리채를 잡고 공중으로 마구 흔들고 싶은 심정이다.
우정이가 소리친다.
“야, 뭘 봐? 눈 깔아라”
나는 이날 처음으로 우정이에게 대들었다.
나의 용기는 정말 분노와 같은 무게였을 것이다.
“니가 보지 마, 니가 보니까 보이지?”
우정이의 그 작은 눈알이 흰자가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야 너 미쳤냐? 돌았어? 어디서 니야?”
이 악마는 엄마처럼 체육 선생처럼 나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밀쳤다.
“하지 마 왜 때려?”
정말이지 나는 발악했다.
우정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왜 까불어? 조용히 해라”
“늘 니가 먼저 시비 걸잖아?”
“이게 또 니야?”
엄마가 말했다.
“니들 그만해라, 밤이다”
우정이가 이를 갈며 말했다.
“들었지? 조용히 해, 마지막 경고다”
나도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럼 너도 입 다물어"
우정이의 눈에서 불이 번쩍한다.
역시 저 악마가 내게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던졌다. 나도 질 세라 그 두루마리 휴지를 던졌다.
이제 우리는 엉겨 붙었다. 난 우정이의 손이 나의 어디를 치고 있는지 잡고 있는지 모른다. 고통도 없다.
결국 엄마는 빗자루를 들었고, 엄마의 센 욕설을 듣고 말았다.
우정이는 분이 덜 풀렸을 거다. 당연히, 나의 손아귀에 우정이의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하루 쌓인 나의 분노를 반은 덜어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오랫동안 방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우정이와 난, 우린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고 누구도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영화나 성교육을 받을 때 보면 여자에게 처음 일어나는 몸의 변화는 아주 신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말을 잘도 꾸민다. 현실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내가 느끼는 점이 그럴 수 있겠지만 다른 건 다른 거다.
엄마의 친절한 설명도,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부모님의 축하 인사도, 또한 파티도, 그런 낭만적인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불편하거나 배가 아프거나 찝찝하거나 손발이 차가워진다는 것쯤, 이다.
요즘은 모두 생리휴가가 있다. 학생들에게는 왜 그런 휴식, 하나쯤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자 보아라, 어른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나의 발악을 담은 늦은 사춘기가 내게 대차게 노크했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러 나와도 더위는 잠을 자지 않는다.
해가 보이지 않아도 더위는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날 죽이려 들 것처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꽉 끼는 운동화도 싫고 꽉 끼는 속옷도 너무 답답했다.
역시나 트럭은 지저분하고 더운 먼지를 일으켰다.
버스 의자에 앉는 때가 되자 나의 몸은 조금씩 평안을 찾기 시작했고 태풍과도 같은 한숨이 버스 바닥에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인가, 이 시간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십 분 정도를 더 가면 남자 고등학교가 있다.
내가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은 굉장히 이른 시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시간에 학생들이 버스를 탈 리가 없었다. 늘 피곤한 내게 이 일은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이른 시간에 이미 버스를 타고 있는 남학생들은 아주 짓궂기까지 했다.
당연히 난 늘 모른 척 넘어갔지만 때론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상상을 해 보아라, 우르르 몰린 남학생들 속 여자는 나 혼자였고, 아무리 눈에 띄지 않으려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한 명 없이 나는 오늘도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닫고 그들이 빠르게 사라져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나는 토요일 오늘 하루를 양호실에서 보낼 작정으로 등교했다.
참, 난 영화 속에서 자주 보는 축하 한다, 는 말을 오늘 수진에게 들었다.
역시 수진은 영화 같은 아이다. 그리고 수진은 아주 친절한 선생님처럼 생리 선배가 내게 첫 생리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나는 말했다.
“너 성교육 선생 해도 되겠다 영화 속 예쁜 선생”
수진이 작은 눈으로 배시시 웃는다.
수진은 하루 동안, 마치 나의 수호천사인 것처럼 굴었다.
나를 대신해 선생에게 손을 들어주었고 덕분에 계획한 양호실행은 순조로웠다.
그리고 수진은 쉬는 시간마다 나를 찾아왔다.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수진이 주고 간 크림빵을 주머니에 넣고 누웠다.
마치 수진의 마음처럼 빵에 온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기가 가득한 이곳이야말로 천국이다.
얼마 전 우리 반에 전학을 온 아이가 있다.
아주 키가 크고 말할 때는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아이이다.
그리고 짧은 커트 머리 스타일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아이는 비어 있던 정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둘은 자연스럽게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 아이, 호연이는 나와 막 차를 함께 탔다.
호연이의 집도 멀었다. 왜 더 먼 곳으로 학교를 전학 온 건지, 묻지 않았지만, 사정이 있어 보였고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붉은 성과 나의 세 번째 집 중간이 딱, 호연이의 집이다.
그렇게 난 버스 친구도 생겼다. 반의 시간은 외로웠지만 반의 시간은 외롭지 않았다.
정희와 나는 한근수, 사건 이후로 사이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렇다고 함께 다니지도 않고 말을 하지 않는 정도는 아니다. 나는 정말 괜찮았으니까.
정희와 그놈은 별일 없이 잘 지내는 모양이다.
나의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그 일을 잊기로 마음먹었다.
수진의 말처럼 나는 다른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양호실은 굉장히 쾌적했다. 내 집에서 잠을 자는 것보다 더 편안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나는 이곳이 나의 공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데 그 누군가가 문을 열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정희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따뜻한 크림빵을 만지작거리다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엇, 어떻게?”
정희가 발개진 얼굴로 말했다.
“화장실 간다 했지”
“진짜 놀랐어”
정희가 웃었다.
“많이 아파?”
“힛, 쬐금?”
우리는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정희는 분명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하러 왔을 것이다.
정희는 또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거 주려고”
딱지 모양으로 여러 번 접은 쪽지를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토요일인데, 집으로 바로 갈 거야?”
나는 수진이네 집에 들러 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글쎄”
“그래? 음… 알았어, 이따 봐”
무슨 일일까, 나는 그 쪽지를 천천히 읽었다.
내가 몰랐던 정희의 이야기다. 정희는 온갖 소문이나, 아이들의 눈치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게 그것을 정희는 티 내지 않았다. 나는 정희는 원래 그런 아이니까, 원래 어른스러우니까,라는 생각으로 힘들어, 할 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희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쪽지에 세 번이나 적었다.
그리고 친구들 눈치가 보인다는 말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는 말까지 적었다.
난 쪽지를 읽고 난 후, 정희가 내게 뭘 바라는 것일까, 왜 이런 얘기를 또다시 늘어놓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끝났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는 게 아닌가.
난 그때 정희에 대한 서운함, 을 모두 털어냈다.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다시 화가 나는 것이다.
한근수란, 놈이 너무 싫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런 놈이 맘이 들지 않을 뿐, 왜 자꾸 생각하지도 않는 일을 자꾸 회상시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씨, 왜 또…”
눈을 감고 수진이가 준 크림빵을 안고 잠에 들고 싶었지만 모두 허사가 되어 버렸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나는 친구들에게 정희에게 말도 하지 않고 수진이와 일찍 나와 버렸다.
우린 팔짱을 끼고 수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난 오늘, 이곳에 있다가 해가 지는 시간을 맞춰 버스를 탈 거다.
우린 작지만, 효과 좋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바람을 맞았다.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이 정말 하늘색만 보인다.
이렇게 예쁜 색을 하고 있다니, 저런 곳에 살고 있는 신이 참 부럽다.
적어도 나처럼 골치 섞는 일이 있지 않을 테니까.
난 처음으로 정희의 이야기를 수진이에게 했다.
“미안하데, 정희가…
왜 자꾸만 그 얘기를 하는 건지, 몰라”
“응?”
“양호실에 찾아왔어”
“그러엄, 미안해야지 당연한 거 아냐?”
“난 그놈을 안 좋아했다니까?
소름 끼쳐 걔 생각만 해도, 그래서 그 얘기는 좀, 안 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근데 정희는, 자꾸만 얘기해, 너무 불편해”
“에잇, 또 그런다?”
“다 끝난 얘긴데...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수진은 나를 더욱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정말 이게 아닌데 말이다. 내가 변명할수록 수진이는 나를 더 안쓰럽게 생각할 것이다.
“정희 때문에 네가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그렇게 되는 거지, 안 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답답했다.
이럴 때 영주가 있었더라면 아주 속 시원하게 정리를 해 주었을 것이다.
“수진아, 나 진짜 걔가 싫어, 싫다니까
걔는 약간 인간을 이용해 먹는 놈이야
그리고, 일부러 그러는 거 절대 아니야, 내가 화가 났던 건 나를 기만해서 지
내가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을 정희가 좋아해서가 아니야
그리고 그것을 계속 설명해야 하는 일이 너무 싫어”
수진이가 창밖을 보며 턱을 괴었다.
“그게 그거 아냐? 아무튼 나도 싫어”
수진이의 싫다는 말은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다. 영혼의 친구인 나를 안쓰럽게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우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물론 수진이의 요즘 관심사인 남자 이야기다.
수진이는 한근수의 친구 이재경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 말 많고 부끄러움이란 조금도 없는 놈을 말이다. 이재경은 우선 못생겼다.
당연히 얼굴이 못생겼다고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는 것쯤 잘 안다.
하지만 한근수의 친구라서 인지 나는 아주 더 못되게, 독하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에게 말했다.
“지지리도 못생겼어, 아마 보이지 않는 심장도 못생겼을 거야”
수진이는 나의 이런 표현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이재경은 키가 훤칠하다. 그리고 동그란 안경을 썼다.
새까맣고 동그란 얼굴은 동그란 안경과 비슷하다. 수진이는 깔끔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인데, 예로 들자면 예전에 좋아했던 그 바람둥이 준수와 비교하면 정말 너무 다른 스타일이다. 극과 극의 겉모습이다.
준수는 늘 머리카락을 빗어 올려서 그것들이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늘 하얀 셔츠와 청바지를 입었고 손톱 밑까지 깨끗했다. 하지만 이재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게 그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 그게 매력적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이재경은 한근수 보다 여자아이들에게 꽤 인기가 많았으니까, 그건 나도 인정이다.
“음, 걔는 약간 매력 있는 스타일이야, 처음엔 몰랐는데 좀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수진이는 또, 준수를 말할 때처럼 뭔가 꿈에 가득한 얼굴로 이재경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꽤 기분이 좋았다.
수진이는 꽤 순수했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수진이는 홀로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고 홀로 끝을 맺는 법을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자주 한다.
이쯤 말하면 순수함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이번에는 얼마동안의 짝사랑을 할까?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