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회색기계와 아빠, 그리고 IMF
아스팔트 길은 온통 노란색, 붉은색 또는 연두색을 띠고 철 지난 바싹 마른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나동그라진다. 봄의 바람은 생명을 알리는 온갖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흩날린다.
나는 따뜻한 봄날을 좋아한다.
하지만 바람 속에 있는 작은 생명 때문에 뜻 하지 않는 곤란한 일을 치르기도 한다.
눈가와 콧속은 늘 축축했고 그것이 심해지면 눈은 퉁퉁, 부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닐 때도 많았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때인 나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도 난, 이 작은 생명들이 움트는 봄이 사랑한다.
나는 작년만 해도 매년 겨울 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늘 긴장했다.
학년이 올라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니까, 봄에 새것들이 움트는 것처럼 말이다.
친구도 담임도 공부도 모든 게 달라진다. 하지만 난 이제 때마다 변화하는 그런 것들에 익숙해졌고 누구보다 더 담대해졌다.
고등 과정을 일 년 남겨 두고 11년의 시간이 되고서야 익숙해진 것이다.
국민(초등) 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아주 긴 시간이지만 나는 또는 우리는 나름대로 이 작은 사회 속에서 정착하며 온전한 평화를 얻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것은 굉장히 치열한 것이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너희 때가 가장 좋아,라는 말은 어른들은 그 과정을 겪었고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쉬운 거라 말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우린 아직 어른이 돼 보지 않았음에도 정말 잘해 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 년을 남긴 이 학교생활에 아직도 긴장을 갖고 임하는 아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평온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나란 아이도 넘어온 시간이니, 너도 할 수 있다고,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해 내면 된다고 말이다.
내가 만약 지나친 최선을 다했다면 11년이 되기도 전에 묵사발 됐을 것이다.
우린 작년보다 더 성숙해졌다.
우리의 허리는 매끈한 곡선이 두드러졌고 어깨는 동그랗게 여성스러움을 뽐내고 엉덩이는 어른을 말해도 될 만큼 동그랗게 매력적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이것을 굉장히 불편해하며 몸을 옥죄는 옷을 입거나 아예 큰 옷을 입고 몸이 드러나지 않는 방향을 늘 찾곤 했다. 우린 가끔 서로를 보며 놀란다. 여자아이들은 그렇다.
너 가슴 정말 크다?
와 너 엉덩이 되게 커?라고 말이다.
이런 장난도 우리가 어른이 되면 지금의 어른들처럼 그때가 좋았지, 라며 내뱉을, 종류의 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고3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같은 반 아이들과 그대로 학년만 올라갔다.
담임도 그렇다. 그것은 고3이라는 입장 때문에 변화라는 것을 조금 덜어준다는 학교의 방침이라고 한다.
나름대로 적응을 아주 잘하고 있는 우리에게 뭐 그리 새롭거나 감사한 일은 아니었다.
현아와 나는 여전히 짝꿍을 하고 있었고 수진도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요즘 수진의 모습은 내가 본모습 중 가장 안정적이고 긴장감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듯이.
우린 고3이라는 타이틀에서 나름의 압박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을 가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워낙 수가 많아진 대학은 단 한 명이라도 자신들의 학교에 채워 넣으려고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집 근처의 대학도 가지 못한다면 그건 낭패다.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나의 엄마 아빠는 당연히 나를 다른 지역의 학교로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우정이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겠지,라는 생각에 입안이 시금털털하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은,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으로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나는 꿈을 키워야 했다.
수진이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 나의 옷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느지막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시기를 놓쳐버린 수학 같은 과목은 일찍 포기한 후, 찍는 연습이라도 해야 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수학 포기자인 나에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단어는 수학 선생의 수업 끝, 이라는 기쁨의 단어뿐.
수학 선생이 말했다.
“수업 끝, 인사는 생략”
키가 큰 선생은 빠른 걸음으로 교실 밖을 나섰다.
요즘 학교에서 술렁이는 소문은 수학 선생과 영어 선생의 교제다.
뜬구름 잡는 소문일 수도 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 법. 늘 무뚝뚝하고 웃지 않는 수학 선생은 요즘 자꾸만 실실 웃어 댔다.
수진과 나는 영어 선생을 좋아한다.
우리가 봐도 매우 소녀 같았고 귀여운 얼굴을 했고 가장 중요한 건 아주 실력 있는 영어 선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도 무척 어리다.
그런데 나이도 많고 약간 징그럽게 생긴(이 시기 우리는 나이 많은 남자들을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수학 선생과 연애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영어 선생은 위험할 정도로 남학생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떤 남학생은 영어 선생의 자취방까지 가서 밤새도록 기다리기도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닌가.
왕뚜껑 라면을 호로록호로록 잘도 먹는 수진이 말했다.
“아씨, 진짜 너무하지 않아?
왜 하필 수학 선생이야?”
노란 단무지를 입에 물고 내가 말했다.
“근데 진짜 사귄대?”
“야, 사귀는 게 아니라 결혼한다잖아”
나는 정말 놀랐다.
그 징그러운 남자와 결혼이라니, 세상에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눈을 뜨고 밥을 먹어야 한다.
안 그래도 커다란 나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거봐 너도 충격적이지?”
우린 라면의 남은 국물까지 다 마셨다.
수진이 징얼거렸다.
“흐엉, 밥 말아먹고 싶다”
사실 우린 아침밥을 먹은 지 세 시간도 안 되었지만 이렇게 또 먹고 있다.
이제 겨우 2교시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우린 야간 자율 학습도 해야 했다.
이것은 2학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마치 선택된 사람처럼 난, 미리 학교에서 나와 막차를 타고 가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배웅도 받지 못한다. 철저해진 고3을 단속하는 선생들의 몽둥이가 이리 저리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를 써야만 가는 곳이 대학이라니, 새삼 고3이라는 무게가 쇳덩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수진의 헤어지기 싫어하는 손짓의 배웅을 받지 못한다.
그것보다 수진은 그 늦은 밤 오르막길을 지나 홀로 집을 가야 한다.
무엇보다 나는 그게 걱정이 된다.
수진이에게 물었다.
“안 무서워? 집에 갈 때?”
수진은 연습장에 또 내 얼굴을 그려 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이, 엄마가 반은 걸어서 내려와 있어”
“다행이네”
나는 순간 수진이가 부러웠다.
수진의 엄마 얼굴을 보면 수진이를 얼마나 아끼고 걱정하는지, 모든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나의 엄마는 같은 배에서 낳은 자식들이지만 나를 정말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일까?
나도 수진의 엄마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수진이 다 그린 그림을 내게 밀어 보였다.
수진이는 기가 막히게 나를 잘 그렸다.
물론 눈만 동그랗게 크게 쌍꺼풀을 그려 내면 그건 무조건 나다.
확실히 내 얼굴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을 만한 얼굴이다. 그렇다고 예쁘거나, 못생겼다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눈 코 입이 크다는 얘기다. 또한 눈 옆의 점은 더 그랬다.
수진이가 마무리로 점을 찍어 내며 미친 듯이 웃는다.
그리고 당연한 것을 내게 묻는다.
“누구게?”
“칫, 나잖아”
이렇게 대답하는 나를 보면 수진은 그때부터 웃음을 멈추지 않고 더 크게 웃었다.
수진은 더욱 담대해졌다.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칠판 가장자리에 나를 그리고 다녔다.
그리고 반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거 누구 게?”
당연히 특이한 나의 얼굴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말한다.
“김우재”
나는 달려가 칠판의 나를 열심히 지우고 도망가는 수진을 잡는다.
우린 옥상까지 가는 계단을 뛰다가, 다시 일 층으로 뛰다가, 를 반복하며 서로 동시에 지칠 때쯤, 나는 수진이를 안아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하지만 이것은 장난이다.
절대 가냘픈 수진이를 내동댕이칠 수 없다.
그렇게 다시 내가 안아 올리면 나의 승리로 잡기 게임은 끝이 난다.
나는 아빠 엄마와 고집불통 싸움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후, 가족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우정이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나의 불편한 심기를 빠르게 눈치챘다.
정말 신기한 일이지만 우정이는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나를 흘겨보지도 않았다.
우정은 알아 버린 것일까?
불쑥 커버린 내 세상에서 이젠 일방적으로만 자기의 권위가 앞서지 않을 것이란 것을 말이다.
누군가 먼저 서로를 건드린다면 우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전쟁을 겪을 것이란 걸, 우린 서서히 스스로 눈치채고 있었다.
우정이는 고3 때도 늦게 귀가했다.
물론 그때는 공부 따위를 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간 후, 귀가 시간은 더 늦어졌다.
우정이를 정말 사랑하는 아빠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빠는 정말 모르는 게 너무 많다.
3교대로 근무하는 아빠는 밤 열두 시가 넘으면 퇴근하거나, 밤 열한 시에 출근한다.
그리고 밤 열 한시가 넘는 시간에 출근하고 아침 일곱 시에 퇴근한다.
언니 우정이의 잔머리가 그냥 넘어갈 리 없지 않은가.
우정이는 아빠가 밤 열한 시에 출근하는 날이면 열한 시가 넘는 그 시간에 밖으로 나간다.
물론 엄마는 잠이 든 상태다. 그리고 아빠가 밤 열두 시가 넘은 시간에 퇴근을 하면 우정은 열두 시에 딱 맞춰 집에 들어왔다.
난 우정의 긴 꼬리는 왜 밟히질 않는지, 보이기만 하면 내 발로 꽉, 밟아 줬을 것이다.
아빠는 거의 사기꾼과 같은 우정의 계략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거다. 쯧.
내게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잠을 잘 때 빼고 방을 거의 홀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공부했다.
아니 노력했다, 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버렸거나 외워야 했던 것들에 능숙했기 때문에 갈 길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난 선택했다.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자며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학 능력 평가,라는 이름의 달라진 방식의 입시를 처음 겪는 당사자가 되었다.
늘 그랬듯이 우리가 원하지 않든 원하든 그렇게 이루어졌다.
모의고사를 한 번 치를 때마다 곤혹스러운 건, 문제의 예, 서술형으로 늘어놓은 글자 박스의 길이는 어지러울 정도로 커다랗고 길다는 것이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 할 때도 많은데, 내용을 습득한 후, 문제를 보고 다시 또 읽어야 했다. 다시 문제를 읽는다. 글자 박스를 또다시 읽어야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몇 번의 반복을 하고 나면 답의 번호를 선택한다.
당연히 선택한 번호는 확실하지 않거나 가득한 의심으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사지선다형의 찍기 프로그램에서 오지 선다형이라니, 나 같은 찍기를 해야 하는 아이들은 아주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험 시간은 흘러만 갔고 결국 망했다, 는 단어를 읊조리게 된다.
그나마 언어 영역은 나름 재미있고 실력도 있었다.
좋아하는 문학 작품이나 자주 읽어서 완전히 습득한 내용들도 많았다.
언어 영역의 모의고사는 늘 아주 빠르게 문제를 풀었고 번호를 선택하는 손가락의 힘도 정직했고 힘도 있었다.
우리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은 시간이 갈수록 공부를 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초조함을 느끼는 시기였다. 고3이라는 입장이 뉴스에서 입시의 시기만 왔다 하면 떠들어 대는 것이 정말 할 일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엄마와 아빠는 좀 달랐다.
고3이 나라서 인지, 나의 입시에 관하여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나의 부모님이 그렇지 않다, 고 비겁한 변명을 지금이라도 하겠지만 나는 안다.
정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진실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처음 겪는 고난과 흩어짐, 그리고 원망, 무관심, 복수, 등의 감정을 갖고 가장 중요한 돈, 이란 것에 집착하는 시기를 겪는다.
이제까지 참, 우린 부족함 없이 아니 너무도 넉넉하게 아주 넘치게 살았다.
넘치게 산다는 의미의 삶을 우리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하게 되어 버린 삶을 부정하고 싶었고, 부족함에 절대, 길들여지지 않았다.
길들여지지 않음은 또 다른 문제, 또는 결핍과 절망이라는 단어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엄마는 한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 그리고 여동생이 있다.
말 그대로 엄마도 나와 같은 중간, 아무것도 아닌, 무관심을 달고 사는 그쯤,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엄마는 나만 구박했어, 얼마나 구박했는지 눈물도 말라 버렸지,라고 말했다.
맏언니와 나이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당연히 현실감 떨어진 자매 사이였을 것이다.
부딪힐 일이 없었다는 건 싸움할 입장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내게 작은 이모, 그러니까 이 작은 이모는 어린 나의 눈에도 아주 못된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 심술이 얼굴에 녹아 있어 너무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나의 외삼촌, 삼촌은 당연히 아들이며 그것도 사대 독자였다.
당연히 그 시절 삼촌은 대단한 보살핌과 우정이 부리던 권력보다 더 대단한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삼촌은 할머니만의 온실 속에서 왕자처럼 자랐다고 한다.
그 시절 엄마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쉽게 말해 집에서 일을 도맡아 해주는 사람이 여럿이라고 했다.
지역에서 손에 꼽혔다면 뭐, 상상만으로도 그 생활은 눈에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할머니는 외삼촌에게 미쳐 있었다고 해도 엄마는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모든 재산을 외삼촌의 교육을 위해 썼다.
넓은 땅을 팔아 서울의 집을 사서 무작정 올라왔다고 한다.
딱히 할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일들은 없었고 점점 가세는 줄어들었고 할머니의 짜증은 온통 중간, 그러니까 있어도 없어도 잘 모르겠는 엄마에게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이유가 없어도 이유를 붙여 가며 구박덩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왜 엄마라는 존재는 집 안의 사정에 따라 또는 금전적인 크기에 따라 딱, 한 명의 자식을 두고 모든 원망과 분노를 퍼붓는 것일까?
나의 엄마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엄마도 자신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그러했으니까.
어쨌든 엄마가 형제들에게 치었다는 건, 대충 이야기만 들어 보아도 엄마가 얼마나 고된 어린 시절을 겪었을지, 알만 하다. 물론 형제들에게 치이게 만든 건 부모의 탓도 크다.
하늘에서 엄마가 나를 대하는 모습을 할머니가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할머니도 조금 반성을 하지 않을지, 참 궁금하다.
난 그런 엄마를 조금은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했다.
그나마 엄마는 내게 구박덩어리 취급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우리의 그 복잡한 문제는 이랬다.
나의 작은 이모는 부자다. 이모부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사
업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했다.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다.
물론 큰돈도 만져본 사람이다. 액수는 말도 못 한다.
이모부가 굴리는 돈이란 것은 우린 상상하지 못할 금액이었다.
이모부의 가족을 마지막으로 본 건 편의점, 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막 생겨나고 있을 때쯤이다.
그때의 편의점은 아주 개방적이었다. 술도 편의점 안에서 먹을 수 있었고, 작은 술집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땐 손님이 정말 많았다. 이모는 그런 편의점을 몇 개씩 운영하고 있었다.
우린 작은 이모 집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있고,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눈치 주는 작은 이모의 얼굴은 정말 못된 팥쥐 엄마와 같았다.
아직도 난, 그 얼굴이 생생하다.
큰돈을 만지면서 사업하던 이모부는 작은 이모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더 큰돈을 만질 수 있다, 는 것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즉, 나의 아빠가 남들이 잠자는 그 어두운 시간에 충혈된 눈으로 기계의 고장 난 부분을 만지며 손톱 밑에 검은 기름때를 남기고 목 속 깊은 곳에는 하얗거나 회색의 시멘트 가루를 가득 담고 콜록거리는, 그 숱한 날들이 남긴 황금보다 보물보다 더 귀한 그 돈, 그 사람들은 그 돈이 필요했고 그 돈에 욕심을 내고 있었고, 두리번두리번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거다.
사실 엄마와 아빠는 아빠의 형제나, 엄마의 형제들과 아주 돈독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애가 정말 강했다. 그렇게 우린 늘 함께 여행을 다니며 함께 웃었고 함께 먹었다.
우린 그랬다.
그런 나의 부모는 그 형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리 없었고, 나의 아빠는 늘 가족, 형제, 부모, 이런 단어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켰을 때 나는 가장 빛이 난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봉고차의 운전대를 잡고 있고 그 옆에는 엄마, 그리고 뒤에는 외삼촌, 이모들, 그리고 우리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외삼촌이 뜻도 잘 모르는 과연 이런 노래가 있을 법 한가?
라는 의문이 드는 노래를 맛있게 부른다.
나는 뭔지 모를 그 노래가 너무도 웃겨 배를 잡고 콧물을 흘리며 웃었던 기억과, 장난기 어린 목소리와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렇다, 그래서 그 큰돈을 위한 아빠의 역할은 당연한 희생이었다.
결국, 아빠는 이모부에게 큰돈을 빌려주었고 더 큰돈을 위해 보증도 서 주었다.
그때의 억, 이라는 단어는 공포감이 들 정도의 큰돈이다.
엄마의 동생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던 나의 아빠, 그런 나의 아빠에게 엄마는 당연한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오래된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불안했지만 잘 흘러갔고 잘 버텼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 이야기를 풀어낼 때마다 나는 치미는 화와,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내가 피해자라서가 아니라, 하얀 시멘트와 기계 속에 아빠가 갇혀 영영 나올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 우린 정말 그때 너무 아팠다.
연속적인 불안함은 숨을 가득 불어넣은 풍선과 같아서 터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겪은 IMF, 한국 사람들은 모두 겪어야 했던 그 경제 위기 속에 아빠와 우리가 속해 있었다.
나라의 부족한 자금은 당연히 기업을 파산 또는 위기라는 위치에 놓이게 했다.
그것은 즉, 한 가족과 가장의 위기와 같은 의미이다.
아빠가 다니고 있던 회사는 그나마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정리 해고라는 좋게 말해서 희망퇴직이라는 것을 시행했다.
천하장사 아빠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라의 위기, 기업의 위기라는 뉴스는 당신들의 작은 사회, 그리고 나의 작은 사회를 서서히 아주 섬세하게 작은 곳까지 파고들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한때 친절하고 자상했던 이모부와 그 식구들은 이제 나의 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소리 소문 없이, 아주 조용히 아빠를 회색 기계 속에 가둬놓고 사라져 버렸다.
평생 회색 가루를 음식과 함께 삼켜야만 했던 아빠의 노력과 가족이라는 의미로 꼭 지켜내려 했던 노력과 반짝거렸던 그 모든 순간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아빠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사라진 전 재산, 갑자기 생겨 버린 빚, 그리고 사라져 버렸지만, 반짝이던 가족의 의미였던 그들, 그리고 다시 갈 수 없는 일터, 나의 아빠는 그때도 묵묵했다.
만약에 나라면, 내가 아빠라면 엄마가 원망스러워 얼굴을 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함께 산다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 후로부터 단 한 번도 엄마에게 그들에 대한 또는 돈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원망 섞인 말도 원망 섞인 표정도 엄마에게 보이지 않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이렇게 순식간에 아빠가 지키고 있던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렸다.
난 이때부터 희망, 이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정말 희망이 있어야 쓰는 단어다.
그런데 희망퇴직이라니, 물론 퇴직을 희망한다, 는 뜻이라는 건 안다.
왜 하필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밖에 없었을까, 이건 절대 희망적이지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진심으로 희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퇴직, 무직, 이라는 뜻이었다.
아빠는 희망퇴직을 했다.
그때 동생 우성이는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 동생 우성이가 회사의 가장 높은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아빠를 회사에서 계속 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다.
난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이때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내 안에 가득 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혼자 그 흔한 눈물을 또 흘렸다.
난 아빠는 절대 멈추지 않는 시계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계는 아주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의 보이지 않은 그 대단히 폭력적인 발버둥은 회색 기계 안에서 그렇게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후 아주 오랫동안 아빠는 집에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때쯤 나의 기억도 잠시 멈추었던 것 같다.
우린 그렇게 계속 아팠고 또 아팠다.
우성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동생 우성이도 대학을 갈 것이다. 우정이는 아직 대학을 마치려면 더 많은 돈을 갖다 부어야 한다.
하지만 아빠의 생산성이 멈춰 버렸다.
자리를 메우고 있었던 돈이란 존재도 그들과 함께 날아가 버린 것이다.
찬란했던 엄마의 시간은 이제 회색 기계처럼 잿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미간 사이의 십일 자가 점점 더 깊어졌고 효부처럼 할아버지를 대하던 그 모습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난 엄마의 한 층 더 깊어진 한숨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보통의 대화가 아닌 화가 나 있는 상태의 대화를 했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 나의 어깨가 짓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더 심해진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에 두고 겨울 보충 수업을 시작했다.
엄마는 말한다.
“추운데 무슨 보충 수업이야, 가지 마
안 가도 돼”
대학 입시를 앞둔 내게, 엄마는 학교에 가지 말라는 소리를 했다.
물론 이 대화법도 화난 상태의 말투였다. 난 엄마가 미웠다.
엄마와 나의 사이는 멀어질 대로 멀어져 남한과 북한과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엄마도 말을 하지 않았다.
유일한 우리의 대화이던 밥 먹어, 다녀왔습니다, 는 단어도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 입시 당일이다.
난 이날도 엄마와 말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밖은 영하 11도라고 한다.
시험을 보는 것보다 나는 추위가 더 신경이 쓰였다.
엄마가 뭔가를 식탁에 올려놓으며 내게 밥을 권했다.
오늘 같은 날, 엄마도 내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앉았다.
아침부터 나는 잘 삶아진 라면을 먹었다.
난 생각했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고 언제든지 먹고 싶은 음식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난 대학 입시 당일 고불고불하고 맛있는 라면을 먹었다, 고 지금도 생각한다.
꼭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난 추위를 뚫고 소집 일에 갔던 그곳까지 걸었다.
사실 이 거리는 충분히 걸어도 되는 길이 맞다. 그런데 왜 난 그 흔한 눈물이 또 흘렀던 것일까, 지금 부려도 소용없는 오기가 생겼다. 꼭 시험을 잘 볼 것이라고 말이다.
헛된 생각이지만 난 그런 오기가 생겼다.
마치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로.
교실 안은 삼엄했다.
모두가 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나만 이곳에 떨어져서 시험을 봤기 때문에 수진도 정희도 만날 수가 없다.
교실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 보온 물통을 갖고 왔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내가 아니라 엄마는 왜 생각을 못했을까, 가 맞다. 아닌가, 내가 챙겼어야 한다. 이렇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뚱한 생각에 빠졌다.
갑자기 치민 분노가 조금 전 먹은 라면이 소화되어 나오는 트림 소리에 허, 하는 기막힌 소리가 배어 나왔다. 엄마는 내가 집에서 나올 때까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 흔한 잘 다녀와, 또는 시험 잘 봐,라는 소리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고개를 계속 숙여야 하는 불편함은 코가 먼저 알아차린다.
영하 11도의 내 콧속은 난로 앞에서도 소용없다.
변화무쌍한 온도에 맑은 콧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아, 내 얼굴은 눈치 없이 흐르는 것투성이다.
나는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고, 휴지를 들어 보이며 코를 닦는 시늉을 했다.
감독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고개를 들 기회를 주었다.
나의 집중력은 당연히 바닥이 났다.
눈앞에는 고불거리는 라면의 면발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만 같다.
미끄러져라, 미끄러져.
점심시간이다.
난 도시락을 챙겨 오지 않았다.
엄마가 따뜻한 보온 도시락에 밥을 싸주지 않았다.
이날은 모두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엄마는 우정이의 입시를 경험했다.
그렇다면 알았을 텐데, 왜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을까, 거의 다섯 시간을 온통 엄마,라는 단어에 에너지를 썼다.
이제 너무 힘이 든다.
엄마가 점심값이라고 내놓은 돈으로 나는 또 만만한 라면과 김밥을 먹었다.
그래, 라면은 맛있는 거니까. 라면은 맛있으니까, 아, 이제 이런 뜻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래, 수진이도 지금쯤 라면을 먹고 있을 것이다.
난 그 생각에 드디어 웃음이 났다.
대학 입시를 치른 후, 우리들은 세상으로 날아가는 연습을 했다.
정말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자유는 어른이 되어서도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해진 수업 시간은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지 않았다.
더 이상 자율학습도 보충 수업도 없다. 그리고 빈 가방을 메고 등교했고, 아주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가거나 방해받지 않는 우리들만의 시간 속에 빠졌다.
나의 학창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때가, 이때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얼마 후 우린 각자의 성적을 확인했다.
나는 놀랐다. 온통 라면 생각에 빠졌던 그날, 나는 시험을 아주 잘 치렀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반대다.
물론 수학 포기자로서 이 정도의 점수를 받은 건, 공부를 열심히 했던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왜냐면 난 아주 잘 찍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실력으로 본 다른 쪽의 과목은 당당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시험을 잘 봤다니, 과연 언제든지 먹어도 맛있는, 언제나 먹고 싶은 라면은 엄마의 숨은 극약 처방이었을까.
수진은 시험을 망했다, 고 표현했다.
수진이는 조금 노력파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노력한 만큼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대학에는 무조건 갈 수 있다고 우린 믿었다.
엄마는 나의 성적을 알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냥 수고했다, 고생했다, 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엄마는 마치 아이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성적이 나오면 당연히 우리는 대학을 고른다. 물론 선택권 없이 무조건 정해진 곳으로 가야만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난 시험을 잘 치렀다. 주어질 많은 기회에 나는 기대가 컸다.
나와 엄마 아빠는 함께 어느 대학을 갈지, 에 대해 의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담임이 내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내 기억에 더 남는다.
우린 바쁘게 원서를 쓰러 다녔고 대학, 이라는 곳의 캠퍼스를 미리 보러 다녔다.
당연히 우리에겐 기대, 란 것이 있었다.
점점 더 우리의 얼굴은 하얘지고 있었으며 입술은 붉게 물들었고 머리카락의 모양은 화려해지고 있었다.
나는 우정이가 다니고 있는 대학을 제외하고 모든 대학에 붙었다.
아주 찰떡같이 떡, 하니 붙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다. 내가 선택한 과는 정말이지 그야말로 잘 나가는, 사회에 나오면 무조건 취직이 되는 그런 신설 학과였다. 난 당연히 나의 시험 결과가 말해 주듯 그 결과도 같은 것이라 믿었고, 또한 우정이가 다니는 학교쯤은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난 분명히 날개가 자라고 있었고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날아갈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치른 결과를 두고 가족들은 마치 내가 없는 듯, 행동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이며 내가 선택해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이 낯선 행동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붙은 여러 학교를 보지도 않고 우정이가 다니는 학교를 말하고 있었다.
아니 왜 내게 해당이 되지 않는 학교를 말하고 있는 거지?
난 입을 꾹 다물고 엄마와 아빠가 말하는 이야기와 행동들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내게 의견을 묻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꼭대기 층에 사는 우리들이 일 층까지 푹, 떨어져 내릴 만큼 무거운 한숨을 수십 번 뱉는 중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나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나의 불행이 나의 십자가의 길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 돈, 이란 것 때문일까?
난 순간 넋을 놓다가 엄마와 아빠가 하는 이야기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엄마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왜? 난 큰 이모의 자식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오랫동안 말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오빠는 이미 대학을 마친 사람이다.
그 경험 때문이라면 난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갑자기 전화기를 내게 들이밀었다.
이 행동은 모든 책임에서 난 벗어났다, 고 내게 말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은 솔직히 한결 가벼워 보였다.
큰오빠는 내게 말했다.
“너 혼자 다른 지역에서 학교 다니는 건 위험하고 좋지 않아”
아니, 뭐라고 하는 거지? 처음부터 나의 선택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선택으로 나의 선택을 무시한 채 미리 결론을 지어 놓고 있었다. 마치 작전이라도 세우듯, 나를 제외하고 말았다.
난 바보 같은 착한 아이 흉내를 내며 그때도 멀뚱거렸다.
“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사실 난 어,라는 대답과 동시에 속으로 세상에 없는 모든 욕을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를 조금은 안타까워하는 또는 편안함을 찾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엄마를 나는 확인했다.
엄마의 미간은 깊지 않았고 주름 없이 아주 미끈했다.
엄마가 말했다.
“일 년만 다시 공부해”
내게 이 말은 공부하지 마,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것도 아주 억압적으로 말이다.
난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많은 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실력도 별로 없는 이 학교를 가기 위해 일 년을 공부하라고? 말이 안 되는 거다.
내가 서울대학교나 하버드를 간다면 십 년이라도 더 공부하라는 말에 무조건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여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이 학교를 가지 못해서 공부를 더 하라니, 더 좋은 학교에 붙은 나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혹여 다른 학교에 붙은 결과물을 보지 못한 건 아닐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합격 통지서를 다시 만지작거리며 엄마 아빠의 눈 아래에 깔아 놓았다.
역시 엄마 아빠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아빠도 가세했다.
“일 년은 금방 지나가니까, 공부해서 가까운 곳으로 가”
엄마가 덧붙인다.
“가지 말라는 게 아니고 일 년 더 공부하라는 거야”
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 부분을 난 생각 해 보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는 이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렇다 엄마와 아빠는 우정이가 다니는 학교의 불합격이란 단어를 자신들의 방패로 삼아 내게 변명을 또는 아주 좋은 핑계를 늘어놓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그들은 나를 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 그렇다. 갑자기 작은 이모의 가족들이 내 눈앞에서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떠올랐고, 난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난 밤을 맞은 캄캄한 사막에서 홀로 서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의 손과 얼굴이 어디에 있는지 감각까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재야”
나는 엄마를 보며 눈을 깜박인 순간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내 눈물이 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흔한 눈물로 어떤 동정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난 잘 안다.
“어, 알았어”
나는 방문을 닫았다.
작은 창문으로 우울한 하늘 덕에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다.
빛줄기라도 있었다면 나는 조금 위로가 됐을 텐데, 나의 편은 오늘 아무도 없다.
그 흔한 빛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