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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금봉
Nov 06. 2024
초록바람
2. 슬픈 냄새
나는 쓸쓸하다, 외롭다, 는 감정을 잘 모른다.
워낙 잘 단련된 환경 덕분에 쓸쓸해도 외로워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집어삼켰다.
새로 이사 온 집이 썩 내키지 않은 건 사실이다.
십 년 동안 남은 건 각자의 짐뿐, 갈 곳 없는 짐을 두기 위해 빠르게 계약했다.
이 주택을 처음 보게 되던 날, 이층 안방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짐을 마구 구겨 넣었을 것 같은 조급했던 흔적이 남았다. 특히 작은 아이의 옷과 물건들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고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사진까지 그대로 놓여있었다.
이층 베란다 난간에는 진짜가 아닌 조화가 마치 행복을 거짓으로 꾸며 놓은 것처럼 방실, 웃으며 복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크지 않은 안방은 거울이 세 개나 있었으며 하나의 거울을 보면 반대편의 거울이 보였고 반대편 거울 속은 또 다른 거울을 보고 있었다.
계약을 하자마자 할 일 없던 난 집 안을 꼼꼼히 정리하고 또는 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살았던 집이 아닌 새 집인 것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내 안의 작고 소중한 빛과 함께 살 그곳을 초록과 생화로 꾸민 행복한 집으로 만들고 싶었고 이제 됐다, 고 숨을 골랐다.
처음 내 안의 빛이 사람이 될 수 있구나,라는 믿음은 나와 비슷한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처음 가져 보았다. 정말 그 작은 빛은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뛰고 있었다.
성제 옆에 누워 심장 소리를 들었던 그 소리와 같았다.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아, 그러니까 정말 사람이 된다는 거죠?”
의사는 나를 빤히 보며 입꼬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애써 웃어 보이려던 모습 같았다.
“아, 하하 네 그럼요
지금부터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초산이고, 여욱님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여욱님이 몸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처음 입덧한 그날처럼 헐떡거리며 웃었다.
그날 이후 5센티쯤 되는 구두를 모두 상자 안에 모아 지하실에 보관했다.
그리고 하얀 셔츠와 어두운 색깔의 투피스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처음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을 때 직장 동료들은 갑자기 바뀐 모습을 보고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게 직접 한 말이 아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책상 밑에서 화장실 변기 속에서 탕비실 개수대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들은 그렇게 나를 관찰했고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강 선배 말이야, 좀 이상하지 않아?”
“원래 소리 없이 이상한 사람이잖아”
“아니 스커트에 저 괴상한 운동화는 뭐야? 그리고 이 날씨에 발목 워머는 또 뭐야?”
매일 다른 운동화를 신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갈 때 팀장이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난 팀장에게 할 말이 있었다.
나는 팀장이 말을 꺼내기 전 먼저 입을 열었다.
“팀장님 휴가를 내겠습니다”
팀장의 엉덩이가 조금 들썩였다.
“뭐?”
“출산 전 휴가를 쓰겠습니다”
팀장의 엉덩이가 완벽히 날았다가 다시 앉았다. 그리고 구석진 서랍을 열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아,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었나? 자기 결혼했어?”
팀장은 늘 내게 자기,라는 호칭을 쓴다.
“아, 그... 그 사람?”
팀장은 내가 성제와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불쑥 튀어나온 아랫배를 만지며 다시 강조하듯 말했다.
“휴가서 내겠습니다”
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억지스러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젠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나의 이야기가 수없이 들려왔다.
“팀장님이 벌써 십 년째 아이가 없잖아?
미혼 임신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보통 사람 아닌 건 알고 있었는데...
대단하다, 미혼모 임신 축하 휴가야? 이거 맞는 거니?”
나는 퇴근 후 다시 운동화를 사러 갔다.
하루만 신어도 닳은 티가 나는 운동화가 혹시 몸조심해야 하는 지금, 조금이라도 해가 끼칠까, 조바심이 났다.
“사장님 더 좋은 운동화 없을까요?”
가게 주인은 벌써 며칠째 새 운동화를 사 가는 여자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아무리 달래고 설명해 봐도 하루만 신어도 운동화는 한쪽만 닳게 되면 넘어질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
가장 맘에 드는 안전한 운동화를 살 때마다 귀속으로 기쁨의 심장 소리가 울렸다.
쿠궁 쿠궁 쿠궁
여욱은 오늘도 새 운동화를 신고 생화가 만발한 집으로 행했다.
반복되는 휴가를 보내고 직장 생활을 원만히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늘 듣고 지내던 수많은 소문은 이제 내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배는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팀장을 비롯한 동료들은 내 배를 보고 생명의 귀함을 마치 처음부터 고귀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소문에 반대되는 행동과 눈짓을 보였다.
“세상에, 축하해
출산예정일은?”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딸이야? 아들이야?”
“선배 닮은 예쁜 딸, 아닐까요?”
팀장이 말했다.
“여욱씨는 왜 아이에 관해 말이 없어?”
나의 별난 입덧은 배가 불러오는 것처럼 점점 더 심해졌다.
팀장의 아이,라는 말에 나는 좀 긴장했고 곧이어 구토가 올라왔다.
창백한 내 얼굴에 진저리라도 치듯 팀장이 말했다.
“휴, 또 시작된 거야?
일찍 들어가는 게 낫겠어”
팀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유난이다 참...”
나의 입에서 그에 맞는 대답이 나오려던 찰나, 그 꿈에서 지독하게 콧속으로 스며든 슬픈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이 쭈뼛, 다리는 마비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썩어가는 배설물 위에 다리가 꽂혔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의 배설물이다.
좁은 골목 외,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고약한 냄새의 정체가 흐물거렸다.
숨을 멈추고 싶었다. 얼굴에 벌건 핏줄이 치달을 때까지 숨을 참고 걸었다.
끝내 프, 하며 내쉬고 들이마실 수밖에 없다.
배설물이 오랫동안 썩고 또 썩고 또 썩어간 모양이다.
어디선가 흘러내린 오수가 골목길을 모두 적시고 있었고 시커먼 시멘트와 끝없이 자신의 영역을 뽐내고 있는 이끼가 펼쳐졌다.
빛이 보였다.
골목길 끝의 빛은 분명 깨끗한 무엇이 있을 거란 생각에 물컹거리는 배설물을 빠르게 밟고 뛰었다.
빛을 끼고 무언가 움직였다. 빛의 길을 나서려면 그것들을 밟아야만 했다.
그것들을 밟자마자 갑자기 슬픔을 가득 담은 전율이 발을 통해 머리끝까지 뻗어나갔다.
역한 슬픔의 냄새, 고통의 물컹거림.
다리 사이로 보이지 않은 엄청난 고통이 들어와 모든 것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다시 또 배설물의 썩은 냄새가, 슬픔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텅텅 비어버린 육체가 배설물 속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겨우 남은 살색의 코가 그 속에서 계속 슬픔을 맡고 또 맡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엄마가 내 손에 먹을 것을 쥐며 말했다.
“우리 욱아, 먹고 코 자고 있어
알았지? 금방 올 거야”
엄마는 한 번 더 노래를 읊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바다 냄새가 났다.
그 소리와 냄새는 나를 깨워주는 자명종과 같았다.
눈을 뜨면 매서운 바람에 얼굴이 붉다 못해 검게 얼어붙은 엄마가 보였다.
검게 얼어버린 터진 피부 위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바른 썩은 돼지기름이 반짝거렸다.
“우리 욱이 깼구나?
배고프지?”
엄마의 얼음 손이 나의 볼을 스치며 다시 바다 냄새를 풍겼다.
나는 엄마 냄새, 바다를 가득 코로 집어넣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흐으음 화, 잠이 와”
엄마는 다시 섬 집 아이를 부르며 얼음 손으로 내 배를 토닥거렸다.
엄마의 입에서는 달고 쉰 냄새가 풍겼고 가끔 코를 마시며 한 박자 느리게 다시 섬 집 아이를 읊었다.
나는 깊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보일러가 들어오고 밝은 형광등이 천장에 붙어있고, 나 같은 아이들이 비비적거리는 곳에서 잠이 깼다. 더 이상 바다 냄새도 엄마의 치마저고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의 첫눈은 엄마가 바른 돼지기름처럼 반짝거리는 여자에게 멈췄다.
혹시 엄마인가?
여자가 반짝거리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욱이 일어났니?”
여자의 입에서는 달고 쉰 냄새는 나지 않았다. 크레파스 냄새가 풍겼다.
나의 눈이 허공을 맴돌았고 아플 정도로 내리쬐는 형광등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말을 뱉으려 애를 썼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소리 나지 않는 엄마를 수천 번 수만 번 불렀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면 하루의 마지막은 탈진으로 끝이 난다.
탈진으로 잠이 들면 눈뜨기 전 바다 냄새를 찾았다.
더 이상 슬픈 냄새는 나지 않았고 수많은 날을 나는 형광등 아래서 눈을 떴다.
여러 개의 바퀴가 꽤 고른 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차가운 손가락이 나의 볼을 탁탁, 거리며 말했다.
“여욱씨, 일어나세요! 강여욱씨”
낯선 냄새다. 만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역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소리쳤다.
“강여욱씨, 눈 좀 떠 보세요”
아랫배가 뻐근했고 온몸이 떨렸다.
아, 형광등이 눈을 찌른다.
성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욱아 정신이 들어? 여욱아 눈 좀 떠봐”
내 볼에 따뜻한 성제의 손이 느껴졌다.
성제와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산부인과 의사의 얼굴도 함께 있었다.
내 손목에는 주삿바늘이 꽂혔고 성제의 얼굴은 파리했다.
순간 나는 배를 확인했다. 감각이 죽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귀를 기울였고 촉각을 곤두세워 작은 것의 심장 소리를 느껴야 했다.
통증이 밀려왔다.
“여욱아”
곧이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의사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의사는 멈추지 않았다.
역시 내 배속의 그것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나는 분명 될 수 없다는 확신을 두고 의사에게 물었었다.
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는 내게 사람이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허황과 지옥을 안겨준 이 의사를 벌하고 싶었다.
난 희망이 없는
내 삶은 더 온전했다.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접은 후, 처음 가져 본 희망이었다.
다리 사이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통증은 나를 더욱 분노시켰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느껴지지 않은 감각을 찾으며 의사의 옷깃을 잡았다.
“죽여 버릴 거야”
성제는 나를 가로막으며 끌어안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십 년 동안 그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포옹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 치지만 성제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결국, 지칠 대로 지쳐있는 나는 성제에게 말했다.
“이 손 놔, 안지 마
쉬고 싶어”
아마도 내 눈에 불길이 솟았으리라.
성제는 그 어떤 말도 없이 스르르 사라졌다.
나는 다시 긴 잠에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끈적한 액체 속에서 유영했다.
꿈에서 눈 뜨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쳤다.
아주 깊은 곳, 엄마의 자궁과도 같은 물컹한 그곳, 드디어 찾아낸 그 작은 무엇, 그것을 잡으러 속도를 내지만 내 몸은 점점 더 위로 밀려나고 있었다.
갑자기 검은 액체가 그 작은 무엇을 삼켜버렸다.
좁은 문이 닫혔고 역한 슬픈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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