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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봉 Nov 01. 2024

초록바람

1. 성제의 과한 친절함과 여욱의 거슬리는 짝눈



그날도 바람이 불었다. 

옷섶이 팔랑거렸고 차가운 바람이 갈비뼈로 들어와 심장을 돌로 만들었다. 

여미고 여며도 그 바람은 나갈 맘 없이 온기를 모두 빨아들였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옷섶을 더듬거리며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바람을 타박했다. 

이 순간에도 어색하지 않은 과한 친절함을 담고 있다니 하얀 손가락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성제와 나는 남들처럼 법에 따라 종이 위에 무언가 적어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서로 등을 보이면 아주 간단하게 우린 남이 될 수 있었다. 

이 참을 수 없는 간단명료한 이별에 결혼, 이라는 제도를 할만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참 쓸데없는 마지막 발악 같은.

나는 가까워진 성제의 하얀 손가락을 잠시 내려보며 말했다.     


“지금 이거, 의도 섞인 거야?”     


성제의 입에서 쉰 소리가 나왔다.     


“하아...”     


쉰 소리 하나로 나의 몸은 뒤로 물러났고 다시 찬바람이 몸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성제가 하얀 손가락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춥다 많이...

감기 앓지 말고, 그냥 좀 그러니까, 잘 살아”     


우리의 십 년 동안의 치열했거나 구질했거나 행복했던 연애는 이렇게 끝이 났다. 

성제의 말속에는 뭔가 지긋지긋함을 끝내줘,라는 애절함이 담겨있었다. 

그 지긋지긋함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난, 다시 그것을 꺼내어 반박하고 싶은 생각에 입이 간질거렸다.   

  

“변할 수 없었지”     


혼자만의 생각 끝에 뱉는 내 말투를 성제는 싫어했다. 

이번에도 난 끝을 구질구질하게 끝낼 것만 같았다. 

성제의 입에서 다시 쉰 소리가 나왔다.     


“하아... 갈게”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겨운 쉰 소리’     


마지막이다. 마음과 다른 말을 꺼내야 한다. 진심이었다.     


“잘 살아, 당신도”   

  

이젠 온몸이 차가워졌다. 

거리에서 이렇게 버티다간 따뜻해지기 위해 그의 품으로 안길지 모를 일이다. 

난 끝까지 그를 놓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따뜻함을.

     

“고마웠어 모두 다” 

    

이치가 맞지 않는다. 

모든 게 고마운데 그는 내게 이별을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말을 나는 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박하고 싶었다.     


“우린 끝까지 위선이다, 고마워하지 마”     


성제의 얼굴에 지긋지긋함이 또 배어 나왔다.   

   

“여욱아

내가 먼저 갈게”     


우린 끝내 마지막도 지긋지긋하게 구질구질하게 끝을 냈다.          

그와 난 아주 오래전부터 이사할 일은 없다, 고 생각하며 살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림을 합쳤고 십 년을 부부처럼 살았다. 

나는 간혹 새댁, 성제는 간혹 새신랑으로 불리며 2세를 갖는 시기까지 남에게 강요받았다. 

사실 성제와 난 결혼이라는 제도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고 법으로 옭아매는 그 제도도 썩 내키지 않았다. 성제와 나 그 누구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저 함께라는 것에 만족했다.    

 

십 년의 세월이 변화 없이 흐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난 자주 놀라곤 했다. 

십 년에 대한 서로의 기여도를 칭찬하며 우린 십 주년을 함께 축복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무르익은 활화산 같은 밤을 보내기도 했다.     


얼마 후, 성제의 모습에서 점점 과한 친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위선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과함으로 나의 한쪽 눈썹이 수없이 치켜 올라갔다. 

미심쩍음은 꼭 이렇게 나의 짝눈을 티가 나게 만든다. 

성제가 말했다.     


“당신 혹시 쌍꺼풀 할 생각 없어?”     


난 잠시 십 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 성제는 나의 짝눈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그 포인트 그러니까 한쪽만 길게 관자놀이로 올라간 눈은 성제에게 성적 도발을 유발한다고도 말했다. 

마치 두 사람과 함께 즐기는 듯한 기분이라고 말할 땐 섬뜩하기도 했다.     


“뭐?”     


“아니, 요즘 간단하니까, 참 많이들 하길래”     


나는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젠 나의 짝눈이 성제에게 거슬리는 그 조금의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변한, 이것을 난, 아주 심오하게 생각해야 했다.      

성제의 과한 친절함과 짝눈에 대해서.        

  



성제가 결혼한다. 그리고 성제의 2세가 배 속에 있다. 

성제는 그녀와 한 달 동안 불꽃같은 만남을 갖고 한 달 만에 2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나와 십 년을 함께 살았다. 한데 고작 그녀와 30일을 만나 30일 만에 다른 인생을 만들었다. 

성제는 이제 결혼만 하면 되는 거다.  

   

나는 기가 찼다. 

30일 만에 다른 인생을 품은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부러웠다. 

결혼이, 2세가 부러웠던 게 아니다. 아직도 불꽃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성제가 말도 안 되게 부러웠다. 

내겐 흐느적거리는 따뜻한 오징어에 불과했는데.     


사실,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않았다. 

이 감정은 왜?라는 의문을 스스로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난, 정말 배신감에 젖지 않았다. 

우린 마침 서로의 지긋지긋함에 정말 지긋지긋해져 있는 상태였고 십 년의 세월을 말하며 너무 했다, 는 식의 농담도 하던 찰나였다. 


정말이지 사랑? 은 세월의 흐름과 전혀 의미가 없다. 

글쎄 십 년 동안 사랑했다, 는 것 또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성제의 갑작스러운 이별 이야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겪었던 일처럼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였다. 서로 등만 돌리면 우린 그렇게 쉽게 남이 될 수 있었다. 아주 쉽게.      


우리가 등을 돌리고 또 다른 30일 만에 성제는 결혼했다. 

그 자리에 나는 초대받았고 남의 시선을 느낄 겨를 없이 앞자리에 앉아 성제를 지켜보았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는 30일 만에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가장이 된 것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불같은 사랑을 담은 젊은 그녀를 그리고 배 속의 신비한 존재를 맞이했다. 

십 년 동안 내가 함께 살았던 성제가 아니었다.


과연 그는 행복할까,라는 의문을 던져두고 난 배시시 웃으며 식장을 빠져나왔다.

친구 찬의가 내 귀에 속삭였다.     


“성제 녀석, 너 가는 길 끝까지 눈을 못 놓더라”     


나는 대답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성제는 두려웠을까.          



며칠째 감정이 물에 젖은 신문지처럼 축, 가라앉은 상태다. 

성제가 곁에 있어도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잠든 나였기에 이 괴이한 느낌을 인정할 수 없었다. 

홀로 이불을 칭칭 감다가도 누군가 있는 느낌에 이불을 양보하려 들었고 조심스럽게 뒤척거렸다. 

누가 잠에서 깰까. 조심하는 것처럼.


나는 점점 더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그날 밤 내 배 속은 겪어 보지 못한 정체 모를 호르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처음 입덧이란 덫에 빠진 그날, 나는 의사 앞에서 미친년처럼 헐떡거리며 웃었다.   

  

그 젊은 사랑의 불덩이 여신, 성제의 그녀처럼 내게도 빛나는 작은 어떤 것이 몸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내 나이 마흔 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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