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부장이 결론을 내리는데 분명히 이상한 방향이었다. 내용도 맞지 않고, 마무리 일정은 너무 무리였다. 그런데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옆자리 과장은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선배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날 이후 나는 회의에서 말을 줄였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줄인 게 아니라, 말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경계를 배운 것이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 없는 그 경계를, 저 한마디가 가르쳤다.
당신도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회의에서, 회식 자리에서, 인사 시즌에. 어떤 때는 위로처럼 들리고, 어떤 때는 충고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의 실제 기능은 위로도 충고도 아니다.
한 가지만 생각해 보자. 이 말을 누가 하는가.
이상하게도 이 말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이익을 가진 쪽에서 불만을 가진 쪽으로. 임원이 실무자에게, 기득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갑이 을에게.
반대로 가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부당한 지시를 받은 신입이 임원에게 "좋은 게 좋은 거죠, 이사님"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없다. 그 말은 위에서 아래로만 작동하는 일방통행이다.
이 말의 본질은 이렇다. 현재 구조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그 구조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의 입을 닫게 만드는 장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느끼는 쪽이 참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의의 포장 아래 벌어지는 일은 단순하다. 비용의 전가다. 조직의 불합리를 바로잡는 비용을 조직이 지불하는 대신, 그것을 감지한 개인에게 침묵이라는 형태로 떠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이 반복되면, 이상하게도 침묵한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 된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피곤한 사람이 되고.
우리는 이것을 조직문화라고 부른다.
주역(周易)에 혁괘(革卦)라는 괘가 있다. 변혁의 괘다. 이 괘가 말하는 핵심은 하나다. 바꾸려면 반드시 비용이 따른다. 피를 묻히지 않는 변화는 없다.
"좋은 게 좋은 거지"는 이 비용을 회피하는 말이다. 바꿔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꾸는 데 드는 비용을 치르기 싫으니, 문제를 감지한 사람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하는 것이다. 비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직이 치르지 않은 비용은 개인의 에너지로 청구된다.
혁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변혁은 때가 되어야 한다. 너무 이르면 실패하고, 너무 늦으면 썩는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때를 영원히 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때를 기다리는 것과, 때를 없애버리는 것. 이 둘은 겉으로는 똑같이 "가만히 있기"로 보인다. 하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전략이고 하나는 포기다. 전략적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눈이 깨어 있다. 포기한 사람은 눈을 감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일 회의에서 테이블을 뒤집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이 말이 나올 때, 지금 비용을 누가 지고 있는지를 보라.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 뒤에서 편해지는 사람이 있고, 삼키는 사람이 있다. 그 역할이 항상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구조다.
구조가 보이면 삼키더라도 삼키는 이유가 달라진다. 몰라서 삼키는 것과, 알고 삼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소모되고, 후자는 축적된다.
주역에 지뢰복(地雷復)이라는 괘가 있다. 땅 아래에서 양(陽)의 에너지가 한 줄 올라오는 모양이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빛이 돌아오는 순간. 이 괘의 핵심은 거창한 반격이 아니다. 알아차림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다.
당신이 느낀 불편함은 틀린 게 아니었다. 다만 이름이 없었을 뿐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구조가 보인다. 구조가 보이는 사람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소모되지 않는다.
오늘 이 말을 들으면, 한 번만 속으로 물어보라.
지금, 누가 편해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