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겨울방학

로댕 <달아나는 사랑 지나가는 꿈>

by 희힣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일 학년 이학기 중간고사를 공부하던 중 전공 공부에 과부하가 와 시험공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나는 갑자기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선 발행하기 위한 글이 필요하다길래 앉은자리에서 두 편의 글을 써내리고 작가 등재 신청을 했었다. 이후 감사하게도 작가 신청이 승인되어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된 후 이런저런 핑계로 글을 쓰는 것을 미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위한 글감을 열심히 모았다. 엄청나게 특별한 사건들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나의 인생에 미루어볼 때 짧은 시간 동안 매우 다양하고 깊은 감정들을 느꼈던 한 해였다. 고등학교 다니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이게 내가 맞나 신기해할 것이다.

이런 나의 변화들을 글로 남긴 후 읽어보고 싶어 브런치북을 발행하기로 결심했다.



종강하고 대학생으로서의 첫 번째 겨울방학을 맞이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종강보다 개강이 한참 가까워졌다. 지난여름방학은 너무 지루했다. 정확히는 처음으로 맞이한, 아무런 제약 없는 너무 긴 방학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방황했다. 대학교에서의 첫 학기는 즐겁기도 했지만 연고 없는 타지에서 이방인의 감정이 때때로 들었으며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들이 꽤 있었기에 기말고사만 끝나면 본가에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었다(정확히는 절대 뛰어가진 못하는 거리이고, 캐리어를 바리바리 싸 고속버스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 종강하고 내려간 본가는 내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지내온 동네라는 것도 무색할 만큼 어색했다. 마치 그곳엔 내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것만 같았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도 없고 친구들도 각지에 흩어진 터라 방학 동안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모교에 친구들과 방문해 후배들을 위한 멘토링을 진행하고 선생님을 만났을 때에도, 보고 싶던 고향 친구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 순간만 좋았을 뿐 나의 행복함은 지속되지 않았다. 무언가에 몰두할 수 없어 무력한 기분이 자주 들었고 잠도 많아졌다. 내게 방학은 학원 특강과 독서실, 그리고 가끔 주어지는 휴일이 전부였기에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 습관을 어디 보내지 못해 나는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고, 오전에는 수학학원에서 조교를 했으며, 오후에는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토플 학원을 다녔다. 이렇게 최대한 열심히 채웠던 여름방학의 끝에서, 겨울방학에는 절대 본가에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1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끝으로 자취를 시작하기로 계획했었으며 - 최소 4년간의 대학생활을 이 도시에서 보내게 될 텐데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 도시의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의 끝자락에서의 다짐대로 나는 1학년 2학기 종강 이후 자취를 시작했다. 주민등록증 뒤편에 새로운 주소가 적힌 스티커가 나의 독립을 실감시켰다.



방학, vacation, 의 사전적인 뜻은 학생 및 교사의 건전한 심신의 발달을 위하여 실시하는 장기간의 휴가이다. '심신의 발달'을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고 스스로를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라고 재정립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으로서의 첫 번째 겨울 방학을, 나에 대해 알아가며 스스로를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시간으로 보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번 겨울방학은 꽤나 만족스럽다. 만 점은 아니지만 가까스로 A+는 줄 수 있는 그런 점수랄까.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로 지난 학기부터 학교 박물관에서 서포터즈 학생 큐레이터로의 활동을 시작했다. 지하 수장고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보고, 하고 싶은 활동들을 기획하고 수행해 볼 수 있었다. 학기 중에는 선배, 동기와 함께 매주 생태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방학 동안은 할 수 없어 지하에서 표본들을 분류하며 다음 학기를 위한 공부를 진행했다(이렇게 쓰면 내가 누군지 특정될까 조금 걱정이다. 제가 누군지 알 것 같은 분은 연락 주시길...~ 브런치는 되도록 솔직하게 쓰고 싶다. 이 정도로 쓴 것도 많이 생략한 것이다). 처음 서포터즈 신청서를 쓸 때 내가 이 분야에 관심과 열정이 매우 많다고 어필했었는데, 열정에 비해 아는 것은 매우 없었다. 일을 하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때도 있지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라 되뇌며 출근했다. 방학 동안 친구와 함께 천 오백 점이 넘는 표본을 분류했다. 각 분야에 전문가이신 상사분들과 학생 큐레이터분들 사이에 있으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열정이 더욱 커졌다. 이젠 식물의 종 까진 아니더라도 과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졸업하기 전까지 박물관에서 활동하며, 나의 전공에 전문성을 띤 학생이 되고 싶다. 이번 주에는 관장님, 차장님과 함께 올해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전시회도 진행하면 어떨까 이야기했는데 상상만으로 벅찼다. 2025년도의 끝에는 어리바리한 신입이 아니라 일 인분 하는 박물관의 멋진 선배가 되고 싶다.



학기 중 기숙사에서는 조리가 금지였기에 불을 쓰지 않는 간단한 음식만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학식은 너무 맛이 없었던 터라 자연스레 친구들과 매일 외식을 일삼았고 식비로 용돈의 80% 이상을 사용했다. 자극적인 음식임을 알면서도 술과 함께 밀어 넣었던 음식들은 나를 병들게 했다. 웃기게도 건강을 끔찍이 신경 써 주에 4번 이상 헬스장에 출석체크를 했지만 몸에 플러스가 되지 않는 음식들을 먹으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게다가 수업도 듣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출근도 하고, 약속들도 꼬박꼬박 참석했기에 잠잘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매일을 아이스아메리카노와 함께했다. 자취를 시작한 방학 동안 건강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그만두고, 잠도 7시간 이상 푹 자고, 빵과 자극적인 음식 대신 현미밥과 직접 만든 반찬을 먹었다. 자취방과 다니던 헬스장이 멀어 헬스장은 관뒀지만 홈트를 시작했다. 나만을 위한 방이 생겼기에 방도 내 취향껏 정갈하게 꾸몄다. 매일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며 침대를 정리하고, 나를 위해 장만한 홈웨어를 입고 예쁜 슬리퍼를 신고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하는 등 집을 위한 행위와 나를 위한 행위가 동일시되었다. 내 집에 대한 애정은 곧 나에 대한 애정임을 깨달았다. 내가 지내는 공간을 정갈하게 유지하는 것이 나를 정갈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특별한 곳에 가고 특별한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스스로 해내며 무언가 가득 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방학이 되고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한 번씩 책 읽기에 꽂히는 시기가 있다. 지난 2학기가 시작될 때 한 동안 책을 많이 읽다가 시험기간을 맞이함과 동시에 책과 굿바이 인사를 했었다. 방학 중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가 나를 다시 독서로 이끌었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필수 교양 강좌의 교수님이시다. 매 시간 수업을 정말 즐겁게, 열심히 들었는데 나의 열정이 교수님께도 전달되었는지 기말고사 시험을 보던 마지막 날, 방학에 밥 한 번 먹자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같은 교양을 들은 친구와 함께한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 함께하길 권유받았다. 독서 동아리에 정말 들어가고 싶었지만 사이비를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터라 가입을 주저했는데 교수님 직접 운영하는 독서 모임이라니!

생각만 해도 좋은 시간일 것 같아 너무 좋다고 교수님의 권유의 즉시 답했다. 교수님께서 "너희 책은 많이 읽니?"라고 물으셨을 때 요새 내가 책을 정말 안 읽었다는 생각에 다음 날부터 다시 책을 손에 잡았다.

<마흔에 읽는 니체>, <당신이 옳다>, <모든 열정이 다하고>,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불안>, <인간 본성에 대하여>,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을 읽었다. 다 읽은 책도, 부분만 읽은 책도 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묘한 부담감이 느껴져 그냥 읽고 싶은 부분을 읽는다. 그렇게 하면 책을 읽는 것이 일이 아니라 놀이처럼 느껴진다. '도파민 중독'의 일등공신인 릴스보단 잠깐씩이라도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이다. 요즘은 카페에 가 책 한 권을 음료를 다 마실 때까지 읽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여행도 다녀왔다. 가족들과 함께 일본, 친구들과 함께 부산. 일본과 부산은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어 새로움은 없었지만 함께해 즐거웠다. 잠깐의 여행은 일상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번 여름에는 돈을 모아 사막에 가보고 싶다.



자취하면 시작해야지 - 하고 미뤄뒀던 취미 활동도 시작했다. 3단짜리 유리 선반을 구매해 맨 위에는 식물들을 놓았다. 바질, 커피나무, 관음죽, 스파티필름을 플라스틱 트레이에 저면관수 방식으로 키우고 있다. 수경재배론을 이번학기에 수강하고 싶었던 이유 역시 저면관수 방식에 대해 학문적으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만 아쉽게도 개설되지 않았기에 혼자 공부해보려고 한다. 두 번째 층에는 적금을 깨 구매한 LP플레이어와 한 쌍의 스피커를 놓았다. 고등학생 때 홍대 LP샵에 놀러 가 구매했던 그린 데이의 American Idiot과 윤상의 클리셰를 재생했다. LP의 한 면의 재생 시간은 보통 15~20분이기에 타이머처럼 재생시키기 좋다. 디지털이 난무하는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좋아하는 앨범을 들으니 노래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원하는 LP를 한 장씩 구매해 책꽂이의 두 칸을 LP로 채워나갈 생각이다.



이외에도 고향 친구들도 만나고, 오랜만에 가족들도 만나고, 어찌저찌 토익 시험도 보고, 주식도 구입했다. 금방 잊기도 했지만 안 좋은 일들도 겪었다(그건 차차 적어야겠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채운 날도,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은 날도, 고민에 우울했던 날과 우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더 힘냈던 날도 있다. 브런치 북의 첫 글은 나의 겨울방학을 개괄하는 식으로 써 내려갔는데 다음 글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때의 제 생각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종강 전에 썼던 계획





요새 습관처럼 쓰는 말인데 ~입니다 이다. 언제부터, 왜 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정감 가서 매일 쓴다. 예를 들면 굿모닝입니다 또는 즐거운 하루입니다 또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 말입니다 등이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 굿모닝, 즐거운 방학 보내길 바라며 -



굿모닝, 즐거운 방학입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