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여행의 끝에서

삶을 여행하는 중이에요

by 희힣




2월 28일, 개강 전 마지막 출근을 했다. 곧 개강이다.

3월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만 출근해도 된다. 아예 출근하지 않고 활동 보고만 해도 된다고 하셨다.

통근시간이 꽤나 길어 오고 갈 때 피곤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지만 앞으로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웠다. 아무래도 지난 6개월 동안 정이 든 모양이다.



새 학기를 맞이하며 앞으로 어떻게 프로젝트를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에 대해 들어보신다는 그럴싸한 명목 아래 면접의 형태를 가까스로 갖춘 담소 시간을 가졌다.



차장님께서는 대학생 때 휴학을 하고 두 달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무런 계획과 제약 없이 훌쩍 떠나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도시의 정취를 느끼며 끌리는 것을 즉시 해보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며, 지금껏 내가 해온 여행들은 여행이 아니라 관광, 휴양이라고 말씀하셨다. 젊을 때 여행을 많이 해 보아야 견문이 넓어진다며 대학생인 지금 한 번씩 훌쩍 떠나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더라도 당당하게 말을 하면 웬만해선 알아듣는다며 주눅 들 필요 없다면서. 게다가 요즘은 번역 애플리케이션도 잘 되어 있으니. 친구와 둘이 같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모든 것을 선택하는 여행은 스스로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누군가와 하루 일정을 공유하는 것이 즐거우니, 친구와 함께 여행하고 싶다면 5일 동안 서로 다른 지역을 다닌 후 이틀간 만나고, 다시 5일 동안 다른 지역에 가는 것을 추천하셨다. 꽤나 신박한 방법이다. 친구들 내지는 가족과 함께 여행하면 즐겁기도 하지만 온전한 나만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시간을 만들 수 없기도 하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 시간을 투자해야 할 수도 있으며 이 과정이 반복되면 서로 멀어질 수도 있고,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기회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실 요즘 여행에서 그다지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방학이라 원한다면 계속 훌쩍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가난해지겠지만) 최소한의 여행을 다녔다. 야경이 멋있어서, 건축물이 화려해서, 요새 유명한 관광지여서 부푼 마음을 갖고 방문해도 그 순간 잠깐만 놀라울 뿐이지 감정이 연속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여행을 가면 모든 것들이 신기했는데 요즘은 다 익숙하다고만 느껴진다. 이번 겨울 방학에 방문한 일본 도쿄와 부산 역시 즐겁긴 했지만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라기엔 그 즐거움이 너무 미약했다.'여행'이라는 행위의 가치가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이더니 지각도 뚫고 들어간 기분이다.



지난 학기 교양 교수님께서 종강 날에 대학생의 방학을 '아주' '값지고' '보람차게' 보낼 것을 강조하셨다. 교수님의 수업을 너무 인상 깊게 들었던 터라 뒷 타임 수업도 양해를 구하고 도강했었다. 역시나 뒷 수업에서도 방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더라. 교수님은 방학이라고 다들 놀러 가는 나라에 가서 인증사진 찍고 인스타 피드를 꾸미는데 급급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는 것은 개뿔, 며칠 동안의 여행으로는 견문을 넓히는 '척'을 하는 것이지 진정한 배움은 그곳에 없다고 하셨다. 여행을 하고 싶다면 모두가 가는 관광지가 아니라, 직접 돈을 벌어서, 배낭여행을 하길 강조하셨다.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아야 느끼는 것이 있다면서.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돈 많이 벌어 크루즈 여행을 하라며 지금은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고, 물론 고민만 하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짓이며 그 목표를 향해 촘촘하게 계획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강조하셨었다. 잠깐 딴 이야기로 새자면, 교수님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행위도 탐탁지 않아 하신다. 잠깐 스스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빈 시간이 없어지기에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공 공부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맞는 말 갖기도 하고, 그렇다고 공부만이 옳다고 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 어쨌든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공부하고 책 읽고 아르바이트하는 게 낫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있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교수님의 의견에 100% 동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행'에 대한 차장님과 교수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 따라다니는 여행이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나가는 여행이 진정한 여행임을 이야기하셨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장님은 여행을 적극 권장하시는 반면 교수님께서는 여행의 중요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강조하셨다.



두 분을 비롯해 친구들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스스로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 정의한 여행은 다음과 같다.

여행은 특별한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온전하게 느끼면 그것이 여행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동안 내가 있는 곳을 온전히 느낄 여유와 시간이 없었다.

정말 어렸을 때는 혼자 어딘가에 가는 것이 어려웠고,

머리가 크고 난 뒤에는 입시를 했기에 나의 초점은 입시와 학교 생활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먹고 입고 보고 쓰는 것 하나하나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선택하지 않았다(그 당시엔 내가 모든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가는 곳 역시 매우 한정적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여도 매일 가는 학교, 학원, 식당, 독서실 등을 위주로 방문했으니, 방학에 찾아간 본가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어색했을 수밖에.


그래도 13살때 갔던 캐년은 정말 멋있었다



내가 몇 년을 산 동네를 잘 알지 못하는데 며칠 동안 여행을 간다고 내가 그 장소를 온전히 느낄 수나 있었을까? 유명한 식당에 가고, 모두가 가는 장소에 가서 인증 사진을 찍고, 여행의 끝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 타 몇 백 장의 사진들을 보고 베스트컷을 고르는 것이 그동안의 내 여행의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즐겁긴 했었다. 후회와 아쉬움은 없다.




방황하는 사춘기가 학창 시절에 오면 다행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나름 최선의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큰 방황을 겪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방황을 하나보다.

겉으로 '나 방황하고 있다며' 티가 나지는 않지만 속으로 매일 방황을 하고 있다.

방탕한 방황은 아니다. 매일 마주치는 장면들이 익숙하지 않고 하루하루 새롭다. 지루하고 머리 아프게 느껴졌던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밤 새 가며 했을 정도로 몰두했던 것들이 재미없기도 하다.

내가 바뀌니 주위의 사람들도 바뀌었다. 한동안 떠나가는 관계에 슬퍼하고 붙잡으려고도 했었는데 모두 소용없었다. 내가 바뀌는 만큼 상대도 바뀌었으며 누구의 탓도 아니기 때문에. 한때는 변화하는 내가 싫었다. 모든 것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도, 우정도, 나를 둘러싼 환경들도.

몇 번의 변화를 겪으니 이젠 변화에 무뎌졌다. 새롭게 변화한 나의 모습과 환경은 또 어떤 모양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미리 걱정해도 걱정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들도 아니기 때문에. 변화하는 세상에 나를 의연하게 던지는 태도가 중요한 것 아닐까? 그래도 아직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익숙했던 것을 보내주는 것은 어렵고 아쉽고 슬프다.



요즘은 버스와 지하철을 여러 번 환승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재밌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출근하는 것도 재밌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재밌다. 이렇게 떠오르는 잡념들을 글로 쓰는 것도 재밌다(글은 왜 항상 무겁게 써지는지. 나름 유쾌한 사람인데). 늘 수능 끝나면 해야지 - 라며 미뤄뒀던 것들을 막상 수능이 끝나니 하지 않았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대학교 1학년 생활에 그냥 나를 던졌었다.

이리저리 부유하 고나니 내가 처한 상황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점점 무언가를 하는데 여유와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아직 어렵고 낯설고 부끄러운 일들도 많지만

하나씩 깨 부숴보니 나의 세상이 넓어지고 새로운 생각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구별 소풍'이라는 동화책이 있다.

엄마가 딸에게 사람들은 모두 지구별에 소풍을 온 것이고 소풍이 끝나면 떠나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생각해 보면 나도 세상을 여행하는 중이다.

모두가 구경하고 싶어 하는 관광지에 매일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내 주변의 장소들에 나만의 의미와 추억을 부여하는 중이다. 스스로 하나씩 헤쳐나가는 것이 꽤나 재밌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크게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다.

언젠가 내 주변을 여행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 질리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로 훌쩍 떠나보고 싶겠지?

그때의 나는 차장님과 같은 생각을 할지, 교수님과 같은 생각을 할지, 아니면 나만의 생각을 갖게 될지 궁금하다. 여행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모두가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이 놀랍다.

사전적인 뜻은 공통될지 몰라도 나만이 부여하는 의미는 저마다 다를 테니까.



2월 여행의 끝에서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과 소설, 그리고 1000피스 퍼즐을 샀다.

파마도 하고, 키우는 식물들 분갈이도 해줬다. 예쁜 봄옷도 몇 벌 샀다. 자취방도 깨끗하게 치웠다.

내일은 유학 갔던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3월의 여행은 어떤 모습일지,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된다.



개강하고 찾아올게요.

다들 행복한 3월의 여행을 맞이하시길!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