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체감하는 보편성은 자연인가, 아니면 구조인가
1.
며칠, 친구와 상하이 여행을 다녀왔다.
오랜 친구와의 여행은
따로 또 같이가 잘 되어야 최고의 조건을 갖춘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뜨겁게 교류하지만
스스로의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냉정을 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나는 그런 류의 여행을 좋아한다.
한 커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로를 챙겨주며 먹는 식사도 아름답지만,
각자의 책이나 신문을 펼친 채
조용히 마주 앉아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식사는
내게 더 아름다워 보인다.
서두가 길었다.
조식을 먹으며 혼자의 상념에 잠겼던 일을
글로 끄집어내려니 그렇다.
나는 상념에 빠진 채로도
친구와 소소한 대화를 편안히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내 친구들은 이런 나의 모습을 닮았다.
우리는 서로 잘 어울린다.
내 사유는 루이비통에서 시작되었다.
조식 코너를 오가는 한 남자.
그는 거대한 로고를 입고 있었다.
입은 것이 아니라, 거의 선언에 가까웠다.
나는 그를 보았다.
아니, 해부했다.
이 얼마나 하찮은 집중인가.
세계는 전쟁과 환율과 선거로 요동치고 있는데
내 뇌는 가디건의 패턴을 추적하고 있다.
나는 정치에 대해 무지하다.
경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 사유는 안전한 곳을 택한다.
이름 모를 남자의 어깨 위,
과장된 모직의 표면 위.
나는 그를 분석하며
동시에 나를 분석했다.
지식이 부족한 뇌는
사람을 읽는 데 에너지를 쓴다.
그것이 나의 비겁함인지,
혹은 나의 재능인지,
아직은 구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동선을 끝까지 따라갔다.
비교적 작은 키와 우람한 머리는 루이비통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나의 편견이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여러 번 말해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감각은 무엇인가.
집착인가. 본능인가. 취향인가.
남자는 음식을 담으며 주변을 흘끗거렸다.
확신이 없는 사람이 확신을 입으면 그렇게 보인다.
이런 말이 있다.
명품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만 빛난다고.
알아보지 못하면, 그것은 그저 모직일 뿐이다.
그는 이상한 동선으로 자리를 찾았다.
우연히도 내 옆옆 테이블이었다.
비어 있던 공간 덕분에
그의 모든 움직임은 유리 진열장 속 전시품처럼 또렷했다.
그리고 아뿔싸.
루이비통 가디건을 입고
5성급 호텔 조식을 먹으러 온 그의 앞에는
거의 누워 있는 여자가 놓여 있었다.
임신한 배는 겨울인데도 드러나 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아니 거의 미끄러져,
그녀의 얼굴은 한 마디를 반복했다.
“나 힘들어.”
나는 잠시 계산해 보았다.
이 남자는 저 접시의 음식을 삼킬 수 있을까.
불쌍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뒤집혔다.
모처럼 차려입고 좋은 호텔에 온 남편을
저렇게 맞춰주지 못하는 아내가 심한 걸까.
아니면,
아픈 아내를 데리고도
굳이 차려입고 조식을 즐기려는 남편이 더 이상한 걸까.
나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 채
가디건의 패턴을 다시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루이비통인가,
그들의 결혼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잔혹한 관찰 욕망인가.
명품은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면
통제하지 못하는 덩어리로 보인다.
어쩌면 명품이 문제인 게 아니라
그 덩어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많은 해석을 불러오는 물건이라니.
루이비통은 모직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생각해 보자.
명품을 입는다는 것은 경제력을 뜻한다.
경제력은 대개 성공을 전제한다.
성공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고,
지위는 관계 속에서 유리한 위치를 암시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아니, 확대하지 말자.
나는.
나는 지금 그 남자를
가디건이 아니라 조건으로 재단하고 있다.
명품을 입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는 심사표를 들이대고 있다.
생각해보니 우습다.
나는 세관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통과시키지 못한다.
기왕 시작한 생각이니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기로 한다.
2.
난데없이 마야 안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안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자유로울 때 노래하지 않는다.
갇혀 있을 때 노래한다.
이상한 일이다.
갇힌 존재가 더 크게 자신을 드러낸다니.
나는 가디건을 입은 남자를 보며
그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보다
무엇에 갇혀 있는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명품은 과시일까,
아니면 보호막일까.
혹은
보이지 않는 기준들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일까.
나는 그를 심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 역시
어떤 보편성의 새장 안에서
기준을 흉내 내며 노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야 엔젤루의 글로 돌아간다.
그녀는 어린 시절,
왜 자신은 백인 여자아이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썼다.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놀랐다.
나는 그 생각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흑인인 그녀가
백인 아이를 인형처럼 예쁘다고 묘사하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이 안도는 비겁했다.
그녀는 고백으로 자신을 해방했는데
나는 그 고백을 방패로 사용했다.
그녀는 새장의 철창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철창의 재질을 확인하며
“보편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다.
나는 묻는다.
그 감각은 본능인가.
아니면 학습인가.
그리고 더 잔인한 질문.
만약 그것이 구조라면
왜 나는 그 구조를 이렇게 편안하게 받아들이는가.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내 직관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 이중성은
루이비통보다 더 큰 로고처럼
내 안에 선명하다.
3.
세계의 기준을 해부하는 동안
내 접시 위의 크루아상은 식어가고 있었다.
이 무슨 짓이람.
나는 매일 칼로리를 계산하며
버터와 크림치즈를 절제해왔다.
그 절제가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런 나에게
식어버린 크루아상은 무례했다.
아니,
무례한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버터를 앞에 두고도
나는 여전히 구조를 따지고 있었다.
보편성을 해부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내 욕망 하나는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나는 세상을 해부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늘 무언가를 재단해왔다.
가디건의 패턴을 재고,
사회적 지위를 추정하고,
인종적 기준의 뿌리를 파헤치고,
칼로리를 계산한다.
나는 저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저울은 나를 안심시킨다.
무게를 알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명품은 통제의 상징처럼 보인다.
경제력은 수치로 환산되고,
성공은 이력서로 증명된다.
칼로리는 숫자로 정리된다.
그러나
임신한 여자의 짜증은
환산되지 않는다.
식어버린 크루아상의 냄새도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자꾸만 통제 가능한 것을 찾는다.
가디건의 가격,
버터의 지방 함량,
보편성의 근거.
그 모든 계산은
아마도 같은 불안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를 비웃으며
그가 명품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버터 앞에서 망설이는 나는
무엇을 통제하고 있는가.
보편성을 해부하겠다고 나선 아침에
나는 결국
버터와 나 사이의 관계도 정리하지 못한 채
크루아상을 다시 집어 들었다.
버터는 녹아 있었고,
나는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