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1.
당근, 당근.
나는 대체로 당근을 좋아한다.
당근케이크,
당근주스,
베이비 캐롯과 칩스,
그리고 동네 중고거래 ‘당근’까지.
좋은 옷을 제값 주고 사는 일에는 아무런 쾌락이 없다.
그건 거래일 뿐이다. 성취가 아니다.
나는 옷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이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thrift store,
광장시장 수입 구제 더미,
그리고 당근.
누군가의 실패와 지루함과 체념 위에
나는 조용히 서서
보석을 고른다.
성북동 사모님이었던 우리 엄마도,
수십 년 전, 이미 만 불의 수입을 올리던 미국 이모도
값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걸 내가 알아봤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싸게 산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먼저 본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 집안에 흐르는 무엇이었다.
안목.
엄마는 말했다.
“안목은 돈 주고 못 사.”
그 말은 늘 비밀처럼 들렸다.
돈 많은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종류의 비밀.
나는 비싼 옷을 입는 사람보다
싸게 훌륭한 옷을 고르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전자는 소비자이고,
후자는 판별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별자는
조용히 세상을 우습게 본다.
2.
당근에서 만 원 가격의 겨울 코트를 골랐다.
울 70퍼센트, 앙고라 30퍼센트의 아이보리 롱코트였다.
코트의 사진을 보이자
남편의 눈이 먼저 반짝였다.
“만 원이면… 몇 번만 입어도 남는 거지.”
그 말에는 계산이 아니라
묘한 만족이 담겨 있었다.
가격이 아니라
가치를 먼저 알아본 사람의 만족 같은 것.
은근히 엄마를 닮은 그는
음식과 옷을 사랑한다.
설명보다 감각을,
해석보다 본질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
그들의 그런 취향은
조용히 존중받을 만하다.
“안녕하세요. 반값택배 가능해요.”
나는 이 문자을 보는 순간
항상 조금 조급해진다.
주식을 매수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손끝이 빨라질까.
주변 GS를 검색한다.
지도 위에 초록 점들이 뜬다.
나는 가장 가까운 점을 고른다.
마치 전쟁 중 피난처를 선택하듯이.
“별나라 GS점으로 보내주세요. 제 번호는…”
문자를 던지고 나면
나는 그 일을 잊는다.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며칠 후
택배를 찾아가라는 문자가 오면
나는 잠시 멈춘다.
내가 무엇을 샀더라.
나는 종종
자신의 욕망을 기억하지 못한다.
집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GS로 간다.
영하 12도.
날씨는 과장 없이 잔혹하다.
나는 이런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차라리 미세먼지로 숨이 막히는 날보다 낫다.
추위는 공기를 비워낸다.
고통스럽지만 정직하다.
나는 정직한 날씨를 신뢰한다.
딸랑딸랑.
누군가 들어왔다는 신호를 내며
문이 열린다.
문 바로 옆에 카운터가 붙어 있고
매장은 생각보다 좁다.
사람 한 명의 숨이 공간을 거의 채운다.
“안녕하세요. 택배가 왔다고 연락이 와서요.
제 전화번호는 …”
“아, 네.”
주인은 망설임 없이 택배 더미를 뒤적인다.
딱 봐도 코트가 들어 있을 법한
조금 큼직한 상자가 눈에 띈다.
전화번호도 정확히 맞는다.
“QR 코드 왔었죠? 그거 보여주세요.”
그때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바람이 함께 들어온다.
바람은 예의가 없다.
형태도 없다.
틈을 발견하면
자신을 그 모양에 맞춰 변형한다.
막히는 법이 없다.
끼어드는 데에 망설임도 없다.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판매자와 주고받은 문자를 켠다.
그 안에
작은 사각형 하나가 떠 있다.
QR 코드.
추위에 쫓긴 주인은 반가운 얼굴로 QR을 찍었다.
한 번.
또 한 번.
“어?”
다시 찍는다.
“이거 아닌데요. 다른 QR 코드는 없나요?”
나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을 만큼 따뜻하지는 않았다.
당근에서는 전화번호를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
거래는 있지만 관계는 없다.
문자를 보낸다.
답은 없다.
사람은 항상 대기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밖에 받은 게 없는데요.
전화번호도 맞고, 저한테 온 건 맞는데…”
“수신 처리를 안 하면
저희는 안 준 게 되거든요.”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현대 사회는 기록을 더 신뢰한다.
기억은 아무 쓸모가 없다.
주인은 아들을 불렀다.
아들도 QR을 찍었다.
또 찍었다.
기계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손이 시렸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늘 성공한다.
막히는 법이 없다.
아들은 택배사에 전화를 걸었다.
짧게 말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지금은 드릴 수가 없네요.
사흘 안에 안 찾아가면 반환되니까
그 전에 연락이 올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를 이기는 것과 코트를 얻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생존을 택했다.
“네, 괜찮아요.”
짧은 미소.
입술은 굳어 있었지만
예의는 여전히 작동했다.
3.
뜨거운 차를 마시고
몸이 조금씩 말랑해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택배사였다.
“손님, 카카오톡이 갔는데요.
손님이 저희 사이트를 차단해 두셔서
카톡이 전달이 안 된 겁니다.
거기로 QR 코드가 가거든요.”
카톡?
차단?
내가 왜?
나는 잠시 생각했다.
요즘은 차단할 곳이 너무 많다.
혹시 모를 귀찮음을 미리 막아두는 일은
현대인의 기본 자세다.
“그런가요?
카톡이 오는지도,
제가 차단을 했는지도 몰랐네요.
어쨌든 그건 GS 쪽 행정 구조인 것 같은데,
미리 설명이 있었다면
카톡을 준비해 두었을 것 같아요.”
“문자도 갔을 텐데요.
문자에도 QR 코드가 있었습니다.”
문자.
택배 도착 알림.
나는 그 문자를 읽고
‘도착’이라는 단어만 확인했다.
그 아래를 보지 않았다.
“아, 맞아요. 문자가 왔었어요.
아— 거기 있었군요.”
“네, 그걸 보여주셔야 했는데요.
그래서 못 찾아가신 겁니다.”
그의 설명은 매끄러웠다.
원인은 분명했고,
책임도 정돈되어 있었다.
나에게.
나의 깐깐함이
조용히 몸을 세웠다.
“그런 사정은
업무를 하는 쪽에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GS에서 온 문자에 QR 코드가 있을 거라고
말해 주셨으면 되었을 텐데요.”
나는 그 다음 말을 삼켰다.
제가 돈을 받고 하는 업무였다면
저는 그렇게 했을 겁니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은
대개 가장 정확하다.
끼이익.
상대가 전략을 바꾸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렇죠.
GS 별나라점에 업무 교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택배는 사흘 내에 찾아가시면 됩니다.
사흘이 지나면 반송됩니다.”
‘그렇죠.’
나는 방금 전까지
틀린 사람이었다.
이제는
옳은 사람이 되었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어딘가를 벌주는 느낌이 난다.
누군가는 배워야 하고,
누군가는 가르쳐야 한다.
사흘.
시간은 늘
행정적으로 제시된다.
감정과는 무관하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보이지 않는 고개를.
전략이 바뀌면
목소리의 온도도 바뀐다.
나는 그 변화를
듣고 있었다.
4.
다음 날,
기세가 꺾이지 않은 추위를 뚫고
다시 GS로 갔다.
“안녕하세요.
제 택배 찾으러 왔어요.
여기 QR이요.”
오늘따라 매장은 붐볐다.
사람들이 문을 열 때마다
바람도 함께 밀려 들어왔다.
공기는 여전히 공격적이었다.
주인 여자는
화면을 보더니
짧게 웃었다.
“아유, 손님이 이걸 보여주셨어야지.
이걸 안 보여주셔서. 호호.”
그 웃음은
상황을 정리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해결을 만든 사람의 표정.
나는 잠시
말의 방향을 계산했다.
누가 할 말을
지금 누가 하고 있는 걸까.
매장 안의 사람들이
흘끔흘끔 나를 본다.
얼른 택배를 들고 나갈까.
내 사전에는
그런 선택지가 없다.
“사장님.
여기서 일하시는 분은 사장님이시죠.
택배 업무를 알고 계시는 분도 사장님이시고요.
저한테 문자 온 것 있는지
먼저 확인하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점점
문제아의 형상을 갖춰 간다.
주인은 웃고,
나는 단단해진다.
그림은 이미 완성되었다.
사람들 눈에 나는
키 큰 문제여자다.
휴대폰을 방패처럼 든
논쟁하는 여자다.
주인은 빠르게 방향을 튼다.
대중을 향해.
“아니 그게 아니라요, 어제 오셨고,
QR이 없으셨고, 그래서…”
그녀의 말은 길었고
끝은 흐렸다.
문장은 많았지만
결론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요약하고 싶었다.
정리해서
핵심만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재주가 없다.
논리없는 장황함을 기억하는 능력은
아직 없다.
작가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이건 분명
나의 무능이다.
다만
주제는 말할 수 있다.
변명.
왜곡.
허세.
방어.
그 네 가지는
아무리 길게 말해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나는 특유의 전법을 쓰기 시작한다.
목소리를 낮춘다.
속도를 늦춘다.
문장은 둥글게 만든다.
따뜻함은
때로 가장 날카로운 도구다.
“사장님.
처음이시면 모르실 수도 있죠.
제가 어제 여기 와서
벌벌 떨면서 한 20분은 서 있었잖아요.
그럼, 조금은
불쌍해 보이지도 않으셨어요?
우리 서로 이웃인데,
사장님이 처음이셔서 잘 몰랐다고 하시면
저도 웃으면서
‘아유, 처음이면 다 그렇죠.
저도 문자가 오고 그렇게 처리되는지 몰랐네요.’
그러면 서로 웃고 좋지 않겠어요?”
나는 제안을 했다.
사과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
장면을 수정할 기회를 준 것이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내용은 단단했다.
사람들은 종종
톤을 듣고 내용을 놓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사장의 얼굴이 붉어진다.
“죄송해요. 제가 몰라서 그랬어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렵더냐.
나는 방글방글 웃는다.
웃는 얼굴 뒤에서
조용히 괘씸해한다.
“네. 새로 시작한 가게 번창하시고요.
택배는… 이제 가져가도 되죠?”
상자를 집어 들고
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순간 몸이 먼저 돌아설 뻔했다.
발목을 붙드는 건
이성도, 예의도 아니었다.
넘어가.
너의 가족이 아니다.
굳이 고칠 이유는 없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에필로그
나는 가끔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유난히 어려워하는 사실을
비약해 본다.
혹시 신분사회의 기억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는 걸까.
잘못을 인정하면
쉽게 용서받기보다
꼬투리를 잡히고
더 크게 벌을 받았던 시간들.
그 잔상이
아직 말끝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사과는 용기의 언어가 아니라
안전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라는 말보다
“제가 몰랐습니다”라는 말을
더 신뢰한다.
좋은 원단은
의도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결을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