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거울 앞에 서서 나는 궁시렁거린다.
이 여자가 겁이 없어.
그건 기본값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네.
그래서 성공을 못하는 거야.
나는 성공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어깨선 1센티미터를 존중하는 사람이
세상을 더 잘 살 확률은 높다고 본다.
궁시렁은 순식간에 철학이 된다.
그리고 철학은 곧 비약을 낳는다.
비약은 크레센도로 치닫는다.
나는 내 분노가 음악적이라는 사실에 약간 안도한다.
적어도 무식해 보이진 않으니까.
미용실을 다녀오면 가끔 이런 의식을 치른다.
자주는 아니다.
요즘은 머리 스타일을 자주 바꾸지 않으므로.
등까지 내려오던 시간을
10분 만에 재단당하는 일도
자주 있지는 않다.
미용실을 다녀오면, 나는 세상에 없는 인류학 강의를 한다.
청중은 나 하나뿐이고, 교수도 나다.
이 어처구니없는 학과는 등록금도 없다. 그게 더 끔찍하다.
“너 미쳤어.”
스스로 비웃어도 소용이 없다.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은 어김없이 같은 말로 시작한다.
이 여자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아. 겁대가리가 없어.
나는 욕실 문을 꽁꽁 잠근 채, 그 말을 기도문처럼 외운다.
사실 이런 기도는 신에게 닿지 않는다.
내 귀에만 맴돈다.
나는 미용사에게서 인간의 태도를 많이 본다.
가위보다 태도가 먼저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묻는 사람.
자료를 요구하는 사람.
충분히 확인한 뒤 몰두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감각을 과하게 믿는 사람.
가위를 드는 순간 태도는 드러난다.
태도는 머리카락보다 먼저 떨어진다.
조금 자르고 묻고.
또 자르고 또 묻고.
조심스러움은 미덕이지만
피곤하다.
나는 머리를 자르러 왔지
기억력 시험을 보러 온 게 아니다.
충분히 묻고 확인한 뒤
자기 일에 몰두하는 태도는 믿음이 간다.
절차가 만든 여유니까.
그리고 마지막 유형.
가위질이 시작되면
손님도 세상도 사라지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자기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사람.
어제 내 머리를 자른 그 미용사처럼.
그래서 결과물은?
초코송이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얼굴 선에서 2센티 내려오는 짧은 단발.
전체적으로 층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분명히 들은 게 틀림없다.
“옆통수가 살아야 하더라구요. 이제 나이가 나이이니.”
옆통수만 남았다.
길이는 사라졌다.
옆통수를 살리려면 머리는 짧아야 한다는
간결한 데이터 처리.
빈약한 데이터베이스.
빠른 판단.
어깨에 닿기 1센티미터 전의 길이를 유지해도
충분히 옆통수를 살릴 실력이
나에게 있을 가능성은 계산되지 않았다.
나는 태어나서 오만가지 성과를 낸 성인이다.
드라이와 고데기 정도는 다룰 줄 안다.
그 추론은 생략되었다.
내 궁시렁은 학술적 깊이를 더해간다.
주제는 4센티미터.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모든 논문은
머리카락 4센티미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신거울 앞에 선다.
내 몸은 여전히 170센티미터다.
작은 얼굴, 긴 목.
살면서 충분히 칭찬받아온 특권이다.
그 특권이 이렇게 어색해질 수 있다니.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어깨는 저렇게 좁지 않다.
내 목은 저렇게 생뚱맞게 길지 않다.
어깨선이 처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비극이었다.
처절한 패배감이었다.
뒤집힌 초코송이 같은 머리는
얼굴 아래의 나와 화해를 거부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괜찮았다.
문제는 그것이 내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긴 머리는 외교관이었다.
어떤 옷과도 협상했다.
여성스러운 드레스와도,
맨투맨과 청바지와도,
정장과도 원만했다.
나는 그 외교관을 해고했다.
해고의 책임은 나에게 없지만,
해고는 이미 완료되었다.
짧은 머리는 공터다.
머리 아래로 드러난 허연 목은
한겨울에 방치된 구조물 같다.
얼굴 선에서 잘려나간 볼륨은
얼굴을 과장하고,
나를 낯설게 만든다.
목폴라에 약간 고급스러운 옷을 입으면
그나마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맨투맨과 청바지는
이 머리와 대화를 거부한다.
버버리 머플러를 두르자
숨이 돌아왔다.
휴.
내가 아는 내가
거울 앞에 다시 서 있었다.
그리고 곧,
그 겁대가리 없는 여자가 떠오른다.
10분 만에 한 사람의 균형을 재편한 사람.
선량해 보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지의 표본으로 변한다.
TV를 켜 둔다.
나는 보지 않는다.
화면은 움직이고, 나는 멍하다.
그러다 다시 욕실로 뛰어들어간다.
초연함을 기본 프로그램으로 장착한 우리 강아지는
며칠 전 내가 자기 눈썹 위 털을 잘못 잘라놓아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관대하다.
동물은 단순하다.
머리카락 4센티미터에
분노의 칼날을 갈고 있는 나를 향해
웅? 웅? 하며 뒤를 따른다.
인간아.
왜 그렇게 복잡하니.
자, 다시.
정신 차리고 머리를 본다.
아래가 얇게 잘려나갔다.
문제는 길이가 아니라
두께다.
이 얇음이 전체 길이와 만나
우아함을 깎아먹는다.
턱선을 갉아먹는다.
턱선이 살려면 배경이 필요하다.
선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뒤에 받쳐주는 덩어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덩어리가 사라졌다.
턱선의 연장선처럼 붙어버렸다.
선이 선을 삼켰다.
이걸 계산하지 못하나.
미용사는 가위질만 배우면 되는가.
비전공자인 나도 하는 비율적 사고를
왜 하지 못하는가.
어느새 내 궁시렁은 논문이 된다.
주제는 4센티미터.
자, 다시.
작은 고데기를 꺼낸다.
달군다.
층이 난 머리 끝을 작게 잡아
안으로 굴린다.
하나씩.
또 하나씩.
자식들.
잘 굴러가네.
귀엽게.
오.
오.
아래를 굴리니
볼륨이 생긴다.
배경이 생긴다.
턱선이 살아난다.
우아함이 돌아온다.
야, 너. 추지원.
안 죽고 살아 있었구나.
반갑다.
정말 반갑다.
넌 역시
똑똑해.
이 머리가 어깨선을 다시 지나
그 미용사를 만나려면
아마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간은 늘 공정하다.
머리는 자란다.
그녀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할 것이냐고?
딱 한마디면 충분하다.
“지난번에 어깨까지 잘라달라고 했는데 너무 짧았어요.
이번엔 길이 좀 신경 써서 잘라주세요.”
이상도 이하도 없다.
그녀는 아마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것이다.
지난번도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다시 왔겠지.
마음에 안 들면 오지 않았겠지.
그녀의 추론은 자유다.
내가 교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키운 사람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버리는 것은 언제나 피곤하다.
새로 맞추는 시간과 비용,
설명의 반복,
낯선 손의 감각.
고쳐서 쓰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길이만 언급하면 된다.
나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내 머리의 파트너를
굳이 떠날 이유는 없다.
궁시렁과 분노는
많은 날들 중 하루에 열린 쇼에 불과하다.
공연은 끝났고,
관객은 해산했다.
이것은 우월감이다.
필요한 만큼만 에너지를 쓰겠다는 태도.
아니다.
우월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실용적이다.
이것은
내 선과 남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겠다는
적절한 에너지의 사용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런 계산은
나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면
이 모든 비극은 머리카락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4센티미터는 자라날 것이고,
옆통수는 다시 계산될 것이며,
나는 또 다른 균형을 찾아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잘려나간 부분을 들여다보고,
부족한 부분을 계산하고,
남이 놓친 변수를 내가 보완하며.
누군가는 그것을 예민함이라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우월감이라 할 것이다.
나는 다르게 부른다.
수정 능력.
나는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수정할 힘을 남겨둔다.
오늘 욕실에서
작은 고데기로 층을 하나씩 굴리던 순간처럼.
인생은 대개
남이 잘라놓은 초코송이 위에서
내가 다시 곡선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꽤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