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날들의 온기

25부

by 김대희

엄마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던 날, 내 손에 닿은 것은 먼지 쌓인 낡은 장롱 속 편지지 뭉치였다.

끈으로 단단히 묶인 그것을 풀었을 때, 빛바랜 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치원 때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것, 초등학교 소풍 가서 엄마에게 쓴 것, 군대에서 보낸 편지까지,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무심하게 건네었던 생일 카드들도 하나 버려지지 않고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뭉치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가슴이 먹먹해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마지막 순간, 아픈 엄마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한 채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거대한 죄책감으로 남았다.

그 감정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 슬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집은 낯설 만큼 차가웠다. 방안에 덩그러니 놓인 엄마의 옷가지, 병상에서 의지했던 지팡이, 그리고 매일 그곳에 앉아 기도하셨던 낡은 의자가 그대로였다.

공기는 날카로웠고,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나는 그것들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감각만이 남았다. 마치 세상이 나를 완전히 버렸다는 듯, 모든 소리가 끊긴 듯한 고립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무기력한 시간 속에서 나를 조금씩 건져 올린 건, 해 질 녘 산책길의 기억이었다.

해가 저물어질 때면 휠체어를 탄 엄마와 함께 대화를 하며 함께한 그 길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 기억에 의지해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바람결에 스치는 엄마의 잔향을 맡으려고 애썼다. 그 덧없는 시도들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엄마가 부재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엄마의 온기를 추억으로나마 붙잡으며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엄마는 잘 삐지는 분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면, 금방 토라지셨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당신은 금세 얘기처럼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웃으시곤 했다.

내가 등 긁어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매번 "이제 엄마가 죽으면 너 혼자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라며 걱정하셨다. 그때는 그저 투정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말속에 담긴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것 같다.


엄마의 걱정은 나의 미래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었음을.

엄마의 빈자리는 역설적으로 나에게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가 이대로 좌절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간다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지 알기에 나는 조금씩 용기를 낸다.

엄마에게 떳떳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다시 일어서기로 다짐했다. 그 용기가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엄마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더 이상 같은 이유로 아프지 않기를


한때는 같은 아픔을 반복하며 살았다.

사랑이 그랬고, 꿈이 그랬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내 모든 시간이 그랬다.

나는 좌절의 순간마다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다른 모습의 아픔을

마주하며, 나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모든 시간들이 나를 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절망의 바닥에서야 비로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길을 잃고 나서야 내 발자국이 곧

길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더 이상 같은 이유로 아파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아픔을 겪을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과거의 상처가 나를 옥죄고, 같은 감정에 반복해서

빠지게 만드는 굴레를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고.

더 이상 소중한 시간을 같은 후회로 낭비하지 말라고.

너는 이미 충분히 아팠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라고.


이제야 나는 그 반복된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과거의 아픔은 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길이

되었음을 기억한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배웠던 작은 용기들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 가장 깊은 교훈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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