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일탈이 모두의 불편이 될 때
이런 뉴스를 봤다.
공중화장실에서 화장지를 쓰려면 QR코드를 찍어 돈을 내거나,
광고를 봐야만 잠깐 휴지가 나온다는 내용이다.
기술이 참 별 데까지 적용되는구나 싶으면서도
이유는 안봐도 쉽게 짐작이 갔다.
아마도 일부 몇명이 휴지를 훔쳐 갔기 때문일 것이다.
화장지를 가져가는 사람이 소수일지, 과반수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훔치지 않은 사람, 즉 선량한 사람도 똑같이 불편을 겪는다는 점이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 까지도 광고를 봐야 하고, 돈을 내야 한다.
사회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랑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 같이 책임을 청구한다.
사실 흔한 경험이긴 하다.
이미 이 구조를 모두가 여러 번 경험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생 때, 학교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휴대폰을 걷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몇몇 학생이 감독 선생님이 만만하다는 이유로 휴대폰을 사용해 소란을 피웠고,
결국 그 이후로 한동안 모든 학생이 휴대폰을 강제로 수거당했다.
어느 날은, 등굣길에 와이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진 채로
학교에 갔다가 교칙에 의거해 벌점을 받았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추를 떼고 학교에 오고 싶어 하는 학생이 세상에 어디 있나 싶었다.
구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쉬운 선택
그때의 나는 학교가 통제적이라고 느꼈다.
조금은 자유로워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다소 교만한 시선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학교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어디서 사고를 치는 쪽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규칙을 일부러 시험해 보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선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벌점을 받아야 했던 일도,
모든 학생이 휴대폰을 수거당했던 일도 말이다.
나는 그 규칙들이 늘 ‘나 같은 사람’을 괜히 묶어두는 장치처럼 보였다.
“일부러 어기는 애들만 잡으면 되지,
왜 굳이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묶을까?”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교칙을 일부러 어기는 학생들이 실제로 있었다.
단추를 뜯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고,
선생님을 상대로 선을 넘나들며 시험하는 학생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을 계속해서 정확히 가려내는 일이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이다.
학교는 결국 ‘중간값’을 기준으로 움직였다.
얘는 착한 학생이니까 봐주고,
쟤는 문제 학생이니까 더 엄하게 대하고,
그런 식의 판단은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조직에선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방식,
모두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공정해 보이지만,
규칙을 지키는 사람일수록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때 내가 느꼈던 불합리함은
부당함이라기보다는
다수를 관리하기 위해 생긴 불가피한 비용에 가까웠다.
인간억제기
인간억제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내가 만든 말이다.
어렸을 때 상하이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매표소였는지, 관광지 입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고 계속 새치기를 하던 곳이었다.
거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안내나 단속을 하는게 아니라,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펜스를 ㄹ자 모양으로 촘촘하게 세워
미로처럼 줄을 만들었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도, 새치기를 할 수도 없는 구조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람을 통제하는 장치를 만들어버렸구나.’ 라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내는 대신,
잘못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
그 장치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인간 억제기'라는 말을 떠올렸다.
한때는 교사의 재량이나 불문율에 가까웠던 규제가,
이제는 법과 제도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도 우리 사회는 한 가지 선택을 했다.
문제를 일으킨 일부를 더 정교하게 가려내는 대신,
아예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쪽이다.
불문율로는 부족하니 규칙으로,
규칙으로도 부족하니 법으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사회는 점점 ‘인간 억제기’를 설치한다.
여기서 나올만한 질문이 있다.
“그럼 이런 제한을 최소한으로 치르려면, 어떤 사회가 이상적인가?”
답은 사실 간단하다.
모두가 룰을 어기지 않고,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되는 불문율을 자연스럽게 지키는 사회다.
휴지를 훔치지 않고,
규칙을 시험하지 않고,
시스템을 만만하게 보지 않는 사회.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런 사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항상 일정 비율의 사람은 반복적으로 선을 넘고,
누구나 실수로 한번씩 선을 넘을 수 있고,
그 소수의 실수와 일탈은 전체 시스템을 바꿀 만큼의 명분이 된다.
사회는 그 소수를 감당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모두를 통제하는 인간억제기를 설치해 버린다.
문제는 이 인간억제기가 한 번 설치되면
좀처럼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불편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돌아간다.
QR코드를 찍어야 나오는 화장지처럼,
선량한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도
늘 한 번 더 참아야 하는 쪽이 된다.
결국 규칙은 점점 늘어나면서,
사람은 점점 단순한 변수로 취급된다.
의도는 중요하지 않게 되고,
행동은 맥락 없이 판단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주체라기보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전기충격을 받는 실험실 쥐처럼,
통제되기 쉬운 대상으로 설계된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모두를 동일하게 묶는 대신,
규칙을 반복적으로 어기거나
명백하게 악용한 사람에게만
보다 분명한 책임을 묻는 방식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처벌의 강도가 반드시 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 본보기가 명확하게 남는지다.
“선을 넘으면 이 정도의 대가가 따른다, 규칙을 지키는 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라는 신호가 분명히 전달된다면,
사회는 굳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인간억제기를 설치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방식은
무분별된 책임을 지우고, 불편을 분산시키는,
너무 많은 사람이 함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