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기본소득으로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by 강유선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를 보신 분만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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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모가지. 말 그대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대학교에서 정치학 공부를 할 때 교수님은 해고권리를 생사여탈권이라고 칭하셨다.


한 사람을 넘어 그 가족의 삶과 목숨을 모두 앗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생사여탈권이다.


영화는 해고 된 가장, 그리고 가정이 어떻게 망가져버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살인도, 거짓말도, 양심을 버리는 일들도 말이다.


박찬욱 감독은 마치, 가장이라면, 그리고 하나 된 가족이라면, 그렇게 똘똘 뭉쳐서 남을 짓밟고 살아남아야만 한다고 자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은 'AI시대의 도래'와 '노동자 해고', 그리고 '해고되고 싶지 않다면 인간성을 버리고 남을 짓밟는 것' 모두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아마도 인류가 만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것으로부터 해방 된 적이 없었기에 박찬욱 감독은 이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영화 내에서만 본다면 이에 대한 일말의 실마리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AI시대의 도래가 노동자의 '해고'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해방'에 방점을 찍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우리는 자본가들의 탐욕과 수 십 년 째 공고한 자본주의라는 철옹성 앞에서 AI시대의 도래가 노동자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 수 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독재체제로 귀결된다는 생각을 한국, 미국, 일본 같은 자본주의 첨단에 서 있는 나라들은 모두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절여져 있다. 자본주의적 생각과 자본주의적 태도에 뇌와 마음이 모두 절여진 것이다.


'사회주의는 악이요, 자본주의만이 진리이니, 자본주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요, 사회주의를 따르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자본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깊이 깊이 자리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본가는 도전과 성공의 열매를 독식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노동자는 그 열매를 절대 공유 할 수 없으며, 오직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약간을 나눔 받을 뿐이다.


그것이 오직 자본주의만이 승리했다고 믿는 한, 미, 일 보수주의자들의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세금'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마치 깡패가 뜯어가는 '삥'과도 같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솔직히 나는 '세금'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배워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 '세금' 시스템에 AI시대 노동자 해방, 아니, 인류 80%의 '모가지'가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세금'이라는 것은 질 나쁜 깡패가 아무 이유도 없이 길을 막고 서서는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엄연히 '세금'이라는 것은 국가의 기반 시설, 기반 시스템을 활용하고, 그 위에서 얻은 소득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값어치이다.


국가 시설은 비단 도로나 행정 시스템 같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든지, '민주주의'와 같은 정신에 대한 대가를 포함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국가이면서 민주주의 국가였기에 얻을 수 있었던 소득에 대한 대가라는 개념이 포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가가 자본을 축적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능력만의 작용이 아니라, 그것에 더하여, 국가의 시스템과 국가의 정신이 모두 하나 되어 노동자의 희생과 기업을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대해 노동자 자신을 포함하여 온 국민이 다같이 동의함에 따라 온 국가적 지원이 뒷받침 되어준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자본을 축적함에 있어서 국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신으로 자본가를 도왔을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에 대해 일정한 착취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착취라고 하면 요즘 시대에 착취가 어딨냐고 발작을 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을 텐데, 착취라는 것은 전태일 같은 사람이 막 죽어나가야지만 착취인 것이 아니라, 그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투입된 노동력과 그로 인한 아웃풋에 비해 노동력 제공의 대가가 더 적다면 그것을 '착취'라고 부르는 것이다.


착취를 중립적인 용어로 보고 이 내용을 봐주길 바란다. 노동 가치의 인풋 대비 임금 가치가 적으면 그걸 착취라고 부르는 것일 뿐, 좋고 나쁨의 의미가 아니다.


옛날에는 합의 없는 일방적 착취가 많았지만, 요즘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어느 정도의 착취에 합의 할 것인지 서로 계약서를 써서 법적으로 착취와 그 착취에 대한 대가를 보호한다. 그 계약이 근로계약서고, 법으로 양쪽을 보호하는 게 근로기준법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는 필연적이다. 착취 없이는 자본주의가 성립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자본가의 자본 축적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소비자에 대한 착취, 그것도 아니면 정부 보조금, 이 세 가지 정도밖에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풋(투자)과 아웃풋(생산된 가치)은 산술적으로 같을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이윤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는 착취가 일어나야지만 ±0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정부와 시민, 노동자가 모두 자본가의 자본 축적, 즉, 착취에 동의 해주고 이를 위한 시스템에 협력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럼 자본가의 축적 된 자본, 자본가의 이윤에 일반 노동자의 목숨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섞여있지 않다고 그 누가 단언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 정신으로만이 '복지'라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지'의 영역은 AI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비약적으로 커질 수도 비약적으로 작아질 수도 있게 된다.


자본가의 잉여자본은 그 만큼 거대해졌다. 그리고, 그 거대함 만큼 노동자들의 희생이 따랐음이 반증된다고 봐야 한다.


이제 노동자들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면, 그 때에는 자본가들이 희생해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는 순수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 요소를 섞어서 살아남은 약삭빠른 녀석이다.


7, 80년대 쯤에 무너졌어야 할 녀석이 사회주의 요소를 흡수해서 근근히 목숨을 이어온 것이다.


이제 AI시대는 어쩌면 이렇게 근근히 목숨을 이어 온 이 자본주의의 연명줄을 끊어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코로나시대를 겪으면서 전세계는 처음으로 '기본소득'의 작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비상사태로 인한 정부지원금.


사실 기본소득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AI시대. 노동자의 비상사태가 시작된다면, 그토록 기업을 살리고 기업을 밀어주던 정부지원금이, 이제서야 겨우 노동자를 살리고 노동자를 밀어주는 정부지원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정말 AI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성공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AI시대의 기본소득. 어쩔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명예롭게 죽을 것인가, 피로 물들어 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