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녀가 딸의 이름을 불렀다. 몇 년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인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이 결국 눈물샘을 허물었다. 엄마도 울고 나도 따라 울었다. 평생 혼자서 풀어낼 수 없었던 감정들의 이유였고, 어린 가슴에 미움과 원망만 품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왜 그때 저를...”
목이 메어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다. 혜지야 정말 미안하다. 그때는... 그때는 나도 너무 어렸어. 급하게 자리 잡고 너를 찾으러 몇 번이나 갔었지만 네 아빠가 못 만나게 하더구나.”
여자는 예상했던 질문지에 성실히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던 목소리의 떨림과 슬픔 또한 가히 헤어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2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뒤늦게 도착한 엄마의 사과는 억울한데 반가웠고, 서러운데 통쾌했다.
스무 살, 엄마를 만났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거라 생각했던 엄마를.
엄마만 찾으면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 해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새내기가 된 3월, 엄마는 핸드폰을 선물했다. 만날 때마다 근사한 식당엘 데려갔고 한아름 옷이며 신발, 가방을 내게 안겼다. 충분히 다정한 모녀처럼 연출되었겠지만 실상 얼굴 한 번 쓰다듬는 것도 거북했다. 분명 엄마는 사과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고, 나 역시 다 이해한다 말은 했지만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왠지 모를 적막이 흐르고 나는 갑갑했다. 대화가 겉돌았으며 불편한 간극은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너무 성급했나. 분명 행복해질지 알았는데...
서걱거리는 이물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발뒤꿈치를 높이 들고 걸음을 걷는 사람처럼 매일이 불편했다.
그날은 집안을 감싼 묘한 온도차를 애써 무시하고 학교를 다닌 지 보름쯤 지나 있었다.
학교를 다녀오니 새엄마가 탁자에 앉아 천연스럽게 물었다. 탁자에는 핸드폰 충전기와 엄마가 사 준 옷가지가 함부로 쌓여있었다.
“와서 해명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돌개바람처럼 훅 치고 들어오는 이 기습공격은 세월이 흘러 적응할 만도 한데, 여전히 몸이 먼저 알고 움츠러든다.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검열해 보았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찰떡 같이 말해도, 새엄마는 개떡같이 알아들을 것임을.
“아... 제가 저희 엄마를 찾았거든요. 이건 엄마가 사주신 물건들이에요. 죄송해요.”
새엄마와의 대화 갈무리는 언제나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였지만 번번이 마음에도 없는 죄송을 말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천장을 줄곧 응시하는 새엄마의 동공은 의식이 나간 듯 보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녀가 하나만 묻자고 말했다.
“15년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한 나는? 내 인생은 뭔데?”
하루아침에 허탈해진 새엄마는 돈도 없고 애만 딸린 남자한테 시집온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내게 따져 물었지만 실은 한물간 여배우의 독백으로 들렸다. 치켜뜬 눈썹도 도드라진 광대뼈도 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문득 새엄마의 인생도 짠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좁은 단칸방에 몸을 누인 젊은 남녀와 그들 사이와는 무관한 여자아이. 자주 동력을 잃는 남자와 불안한 살림살이. 아이 셋을 이끌고 저 혼자 분주했을 수일을 손꼽아 보았다.
‘마음이 텅 비어버린 느낌, 매울 수 없는 배신감.
저 여자도 딱하긴 해.’
하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선택해라. 너희 아빠랑 살던지 네 엄마랑 살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