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관객이 된 배우
"어머님, 조심히 내려가세요."
J는 지하주차장에서부터 3층인 집 앞까지 두 계단씩 단숨에 올라왔다. 현관문을 말발굽으로 고정하고, 베란다 방충망까지 한껏 열어젖히면 선풍기를 틀어둔 것처럼 양쪽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청소의 시작을 알리는 환기야 말로 일종의 의식이자, 행동하는 명상인 셈이다. 소파 위에 어머님이 덮으셨던 여름 홑이불과 베개를 세탁실로 가져갔다. 세제와 베이킹소다를 차례로 쏟아붓고 미온수 버튼을 누를 때까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월경을 시작한 이후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냄새가 유독 꺼려졌다. 그들의 냄새가 싫어서라기보다는 혹시 자신에게서 분비물 냄새가 날까 봐 강박적으로 자주 씻었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 사이, 이불 말리기 가장 좋은 채광이 찾아왔다.
지난밤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은 J를 막내딸 배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대기 중이던 '암 환자 전문 요양병원'에 결원이 생겼다는 전화였다. 무엇보다 시댁과 멀지 않은 거리였고, 병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환자용 식단과 실버타운 콘셉트로 지어진 병원 인프라에 Y는 언제든 입소할 수 있도록 대기환자로 등록을 해 둔 상황이었다. 특실만 한 자리 나왔다는 말에 남편은 잠시 미간을 모으더니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예. 내일 입원수속하겠습니다." J는 입가의 실룩거림을 억제하며 그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주악거렸다.
세면대와 변기에 스프레이형 락스를 뿌렸다. 코 끝에 맴도는 클로라민 냄새에 취할 때쯤 타일 사이사이에 낀 곰팡이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예상을 깨는 전개가 짜릿했지만, 한편으로 고작 이렇게 끝날 거였다면 싫은 내색은 좀 숨길 걸 그랬다. 그녀는 대대적으로 앓는 소리 했던 자신이 떠올라 하수구 수챗구멍 사이로 숨고 싶었다.
'자식들 면담 준비하세요'
그날은 4형제의 우애가 빛나던 날이었다. 서로의 결혼식과 돌잔치 이후 한자리에 모인 적 없던 모처럼만의 만남. 삼복더위에도 말쑥하게 차려입고 앉은 그들에게의사는 어머님의 암선고를 내렸다. 이미 3기였고 대장부근과 담낭까지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어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전했을 때 형제는 죄 땡그란 눈알만 뒤룩거렸다. 침묵하는 공기 속에 숙연한 고요, 해일처럼 밀려오는 긴장감과 죄책감. 가엾은 엄마에게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할까? 만일 엄마가 삶의 끈을 놓아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서로를 부둥켜안고 꺽꺽 울어대는 자매 뒤로, 형제는 격정을 억누른 채 입술에 침만 잔뜩 발랐다.
"내가 왜? 나 멀쩡햐. 도로 집으루 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데는 단계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이런 일이 내게 생긴 것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가족들은 어쩌면 삶의 연장이 될지도 모르는 항암 치료를 선택했다. 살기 위해 겪어야 하는 죽음의 과정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닌 '삶'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어머님, 잘 가세요. 저는 역시 딸은 아닌가 봐요'
J는 열어두었던 현관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