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항상 천재를 동경했다.
동경했다는 말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 때문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허수였다.
나는 동네에서 똘똘하기로 꽤 유명한 아이였다. 4살 때 스스로 한글을 깨쳤고, 6살엔 부모님이 보시던 영미권 영화나 드라마 속에 오가는 말들에서 영어를 습득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별다른 학원 공부 없이도 학교에서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오만함이 뒤따라왔다. 뭐든 쉽게 척척 해냈으니까. 나의 우물 안으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찬 바람과 함께 그 녀석이 찾아왔다. 나는 여름의 강렬한 태양처럼 마구 나대고 있었고, 그 녀석은 차가운 지성으로 나를 잠재웠다.
시작은 오목이었다. 나는 내 짧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오목을 져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조차도 내 상대가 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허수는 달랐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나는 '오목은 사소한 문제니까'라며 그것에 대한 가치를 폄하하며 위안을 삼았다.
같이 게임을 해도 근소하게 나를 앞섰고, 키도 나보다 아주 조금 더 컸던 것 같다. 공부에 관해서는 결과가 확실했는데, 기말고사 이후 나는 늘 유지하던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 뒤로도 쭉 허수는 독보적인 1등이었고, 나는 많이 뒤떨어지는 2등이었다.
게다가 더 짜증이 났던 것은 쉬는 시간마다 그 녀석은 상대성이론이니, 양자역학이니, 빅뱅이론이니, 초끈이론이니 하는 그런 이론천체물리학 관련 책을 보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왜 시험을 잘 치는 거지? 왜 영재 학교를 가지 않고 우리 학교에 있는 걸까? 나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덮어놓고 달리는 것을 잘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 하면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단순히 암기와 이해를 잘하는 것을 넘어 창의적이었다. 나는 눈앞의 책을 보았지만, 그 녀석의 눈은 저 하늘 너머를 우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운명은 나를 허수와 중고등학교 모두 다 같은 반에 배정되도록 내몰았고, 그렇게 몇 해가 지난 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재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제서야 속이 후련했다.
질투를 잠시 내려놓고 말하자면, 허수와 나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우린 그저 10대 아이들이었고, 함께 어울릴 땐, 그 나이대의 풋풋함이 있었다.
매일 등굣길에서 만나는 허수는 항상 짧은 머리를 고수했다. 아침에 머리를 말리기 귀찮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반면 나는 머리를 자르러 가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허수의 방에서 같이 밴드 음악을 듣곤 했다. 허수의 셋 리스트가 재생되면, 어느 밴드에 누구 기타리스트가 최고네, 아니다 그 사람은 속주만 잘하지 영혼이 없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설전을 벌였다. 그러다 메탈 음악이 나오면 우리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고갯짓에 따라 휘날릴 머리카락이 없는 허수는, 그때만큼은 나를 부러워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영화를 보러 갔었다. 어느 날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재미없는 영화를 봤던 적이 있었는데, 졸음과의 싸움 후 극장문을 나서면서 서로 투닥거렸었다. "네가 이 영화를 보자고 하지 않았느냐"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 네가 오자고 했지"하고, "내 돈과 시간을 물어내"라면서.
그렇게 함께 쌓은 이야기들이 추억이 되어가며 계절을 넘겼고, 은근슬쩍 수능이 휙 지나갔다.
여전히 허수는 독보적인 1등이었고, 나는 많이 뒤떨어지는 2등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나는 수능 점수에 맞춰 의대에 진학했다.
허수는 별을 좇아 천체물리학과에 갔다.
학과 선택에서도 나는 졌다. 허수는 어떻게 그 점수를 가지고 그렇게 멋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이렇듯 우리는 같은 궤를 타고 있었지만, 10대의 끝에 나타난 갈림길에서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따금 옆 선로를 보며 그 길을 달리는 서로의 모습을 응원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허수의 선로는 너무 멀어져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봤을 땐 갈림길조차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 버렸다.
2.
의과대학 6년의 세월은 생각보다 숨 가쁜 시간이었다. 공부량은 상상 이상이었고, 오로지 눈앞의 지식들과 싸우면서 지엽적인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이미 충분히 검증이 된 사실들이 담긴 텍스트를 배웠다. 최신지견이나 더 나은 수술법, 새로운 검사방법 따위의 것들은 의사가 된 이후, 논문을 쓰거나 읽고 학회에서 토론을 하면서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공부에는 의외성과 창의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국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다 모였다는 의과대학의 학생들이었지만, 허수 같은 천재성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잊고 있었네. 허수는 요즘 뭘 할까?
의사 국가고시를 친 날이었다. 늦은 밤 시험장에서 돌아와 내 방 책상에 앉았다. 주변에는 온통 의학서적들 뿐이었다. 나는 그간 시험 준비를 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지 못했었다. 시간이 나면 영화 정도만 챙겨봤을 뿐, 그 외에 다른 것을 할 시간은 없었다. 방안은 고요했고, 나는 공허했다. 시험이라는 목표가 사라져서일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나는 이 어색함을 지우고자 TV를 틀었다. 화면엔 그 당시 최고 정점의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출연한 밴드 이름은 QUINN이었고 '스푸트니크'라는 곡의 라이브가 한창이었다.
스푸트니크-QUINN
끝없이 떨어지고 있어 너의 곡률에 맞춰 주윌
맴돌고 바라만 봤지, 너는 날 보았니
더 더 빠르게 달려가며 시곗바늘을 붙잡았지만
너와 같은 공간 시간 속에 함께이지 않은 걸까
여름의 이 초록과 바닷빛의 푸름은 같을 텐데
내가 본 이 풍경 속 너는 무슨 색을 보고 있니 나와 같을까
어젯밤 북극성 남쪽에 처음 보는 별이 있었지
고갤 들고 바라만 봤지, 넌 내가 보이니
여름의 이 초록과 바닷빛의 푸름은 같을 텐데
내가 본 이 풍경 속 너는 무슨 색을 보고 있니 나와 같을까
너도 같은 생각을 할까 서로 알아챌 순 없지만
서로가 손을 내밀어 맞잡고 끌어당겼지
카메라는 4명의 멤버를 한 명씩 차례로 비추었다.
카메라는 먼저 가운데 서 있는 보컬을 비춘다-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고 있다. 화면에 그의 왼쪽 얼굴이 비친다. 단정한 이목구비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움직이며 오른쪽 얼굴이 비치자, 숨겨져 있던 퇴폐미가 드러난다. 이런 복합적인 모습은 맑은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간주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보컬에서 베이시스트로 시선을 옮긴다 -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형의 여성 베이시스트가 자신의 몸 크기만 한 악기를 들고 있다. 능숙한 핑거링에 안정된 몸짓으로 노련하게 연주하고 있다. 리듬이 눈으로도 느껴질 정도다.
시선은 베이시스트를 지나치고 그 뒤에 있는 드러머를 주목한다 - 노란 머리를 하고 전날 밤을 새운 듯 눈이 퀭한 드러머가 정교하게 연주하고 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 심취하여 눈을 감고 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뒤를 돌아 기타리스트에게로 접근한다-연주의 다이내믹에 맞춰 열정적인 몸동작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어깨까지 오는 검고 긴 머리가 찰랑인다. 정교하고 감정이 잔뜩 실린 피킹을 하는 손을 비춘다. 그리고 천천히 훑고 올라가며 얼굴이 천천히 보인다._
그 기타리스트는 허수였다.
3.
내가 찾은 인터넷상의 정보에 따르면, 허수는 천체물리학과 학부생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와 작곡을 시작하며 밴드를 결성했고, 대학원 과정을 밟을 때는 이미 유명 밴드의 반열에 들어섰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밴드는 계속 성장해 지금에 이르렀다. 어떻게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일을 동시에 할 수 있지?
이 녀석은 음악적 성취마저 손쉽게 이뤘다. 나는 또다시 패배했다. 그래, 허수의 방에는 항상 음악에 관한 물건들이 가득했었지.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책을 보고 있었고, 허수는 더 멀고 넓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에서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멜로디를 보았을까. 허수의 방에서 에어기타를 치며 머리를 흔들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잊고 있던 옛 기억이 연달아 떠올랐다. 극장 앞에서의 일 말이다. 그때 우리가 보았던 영화는 '엉클 분미'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 감독의 이름을 아직도 외우고 있다. 그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그 영화가 궁금했던 나는 허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영화만큼은 내가 더 잘 알았으니까 그는 별 불만 없이 따라왔었다.-입장할 때까지만 그랬었지만.- 비로소 고개를 들고 깨달았다. 그래,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영화가 하고 싶었다. 나는 영화가 하고 싶다. 왜 이걸 이제껏 몰랐지?
나는 대학병원 인턴을 신청하지 않고 바로 군대로 가기로 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위함이었다. 허수의 연락처는 수소문하면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영화적이지 않으니까. 나는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 쓰일 영화 음악을 부탁하면서 재회하면!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나는 강릉의 군부대에서 군의관 생활을 시작했다.
4.
그 뒤로 나는 별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강릉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매일 눈에 담았고, 자연스레 하늘과 별과 우주의 이야기가 내 안에 쌓였다.
무언가에 흥미를 가지고, 좋아하게 되고, 더 찾아보고, 자기 안에 쌓아놓으면 언젠가는 내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나는 쌓아놓는 단계를 시작했다. 우선 그동안 모아 놨던 '언젠가 시간이 나면 보고 싶은 영화들' 목록을 뒤졌다. 그중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모두가 보지 않은 영화들'부터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시민케인, 라쇼몽, 멀홀랜드 드라이브, 카사블랑카,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 외에 오즈 야스지로나 고다르의 영화들부터 최신 개봉작들까지.
눈과 귀로 섭취한 영화들은 내 안에 쌓인 별빛들과 만나 재창조되어 조금씩 움이 텄다. 그리고 이내 글로써 발화했다. 초반에는 처음 보는 시나리오의 양식에 조금 헤맸지만, 이내 쉽게 적응했다. 나도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서 효율이 높긴 하니까. 낮에는 의무실에서 진료를, 밤에는 영내의 관사에서 글을 쓰는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눈가리개를 한 채 내달렸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낸 뒤 나는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5.
-비상하는 별-
시놉시스
주인공 현수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지난 뒤 교육열이 높은 학군지로 전학을 갔다. 면학 분위기는 적응이 되지 않았고, 이미 친해진 아이들의 틈을 끼어들기도 어려웠다.
첫 시험을 친 현수는 떨어진 등수에 당황해 학원을 찾아갔다.
현수는 거대한 학원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지하 5층 지상 7층의 층고에 대리석 외장재가 무섭도록 반짝이는 단과 학원이었다. 그 학원은 입학시험을 치르고, 상급반 일 수록 높은 층에 배치되었다. 자연스레 학원은 암묵적으로 상하의 서열이 발생했다. 현수는 지하 1층에 위치한 반으로 배정받았고, 상층으로 올라가기를 열망하는 아이들 틈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현수는 지상 4층에 위치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쪽 세계가 적응되지는 않았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현수는 스스로를 질식시켰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면 의식이 아찔해질 때까지 숨을 참고 있고는 했다.
한 번은 현수의 스러져가는 의식 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반짝였다.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시절의 현수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던 소년이었다. 현실은 그를 비롯한 모두 다 고개를 처박고 책만 보고 있었다.
어느 날, 현수는 학원 옥상에 숨어들었다. 학원 강의가 모두 끝난 뒤 문을 닫은 학원의 옥상 난간에서 현수는 생각했다. 모두가 선망하던 높은 곳에 올라왔지만, 심지어 7층을 내 발밑에 두고 있지만 풍경은 별다를 게 없었다. 하찮게 보이기까지 했다. 줄지어 나가는 원생들을 보며 7층도 지하 5층도 결국 1층의 문으로 나가게 될 것을 왜 그리 층수에 집착했을까.
한참을 서 있던 현수는 난간 위로 올라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현수. 그때 하늘에서 유성우가 쏟아진다.
현수는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동네의 밤하늘의 별을 떠올렸다.
6.
'영화의 호흡은 나쁘지 않은데, 깊이가 없네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감상평이다. 이렇듯 나의 첫 단편영화는 대차게 실패했다. 나의 일 년치 월급과 모든 휴가를 쏟아부은 영화는 어느 영화제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나의 외장 하드디스크 안에 고이 잠들었다.(R.I.P)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를 만들었다. 좋아하는 걸 드디어 찾았는데, 그냥 계속하는 거지 뭐.
워드 프로그램의 빈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고,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지만 도중에 엎고. 꾸역꾸역 다 쓴 뒤 폐기하기도 하고, 겨우겨우 완성한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지원 사업에 제출하면 서류 탈락. 어쩌다 붙어서 발표자료를 만들어 심사위원들 앞에서 피칭을 해도 결국 낙선. 어찌어찌 작은 영화제에서 받은 소액의 제작비에 나의 사비를 부어서 만들고, 나보다 영화 경력이 길었던 촬영 감독은 은근히 연출에 관여하고. 신인 배우는 연기를 잘 못하고. 스태프들은 엉덩이가 무겁고. 갑자기 비가 오고, 태풍이 몰아치고. 주연 배우는 촬영 일주일 전에 사라져 버리고. 촬영 중에 술에 취한 아저씨가 난입하고. 어느 카페를 빌려서 촬영이 한창일 때 갑자기 나타난 카페 사장은 갑자기 대관료를 더 달라고 하고. 편집을 하려고 보니 녹음 상태가 엉망이고, 중요 장면에서 오토바이 배기음이 같이 담겨있고.
이 모든 걸 견뎌내고 다음 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더 나아지고, 또 그다음은 더 나아졌다. 그리고 그다음은 더더욱 나아지겠지.
마지막 영화는 영화제에서 꽤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제대 후에 나는 드디어 장편 영화에 도전을 했다. 10-20분 남짓한 이야기를 쓰다 100분이 넘는 분량의 글을 쓰려니 쉽지 않았다. 끈질기게 붙잡고 썼다 지웠다 하기를 반복했다. 이번엔 밤에는 당직근무를 하고 낮엔 글을 썼다. 그러니 이젠 별이 아니라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정도로 충분히 성숙했을까? 이 세상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재창조할 수 있을까?
결국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말하고자 하는 바가 꼭 있어야 하나? 만약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왜 영화를 통해야 하지? 소설을 써도 되잖아?
허수는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붙잡고 있을 수 있었던 거지?
허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음악을 선택했을까?
7.
한밤중의 종합병원 응급실은 묘한 곳이다. 말 그대로 응급 상황인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보니, 환자들이 응급실 안에 머무르는 시간은 짧은 편이다. 도착 후 몇 시간 안에 병실로 가거나, 수술실로 가거나, 아니면 집으로 가거나. 물론 병원 문을 제 발로 걸어서 못 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응급실 안의 작은 침대 위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묵고 간다. 묵고 간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환자를 맞이하고 누인 뒤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사람이 떠나가고 나면 침대 시트를 정리해서 세탁실에 넘기는 과정이 호텔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호텔에서는 여행이나 출장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고, 병원에서는 병이나 외상으로부터 다친 몸을 회복하고. 그리고 둘 다 비싸기도 하고.
영화는 보통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과정을 따라간다. 그중 위기가 가장 중요하다. 위기 없이 전개만 쭉 이어지는 이야기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미국 서부의 황량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여행객이 있다. 한 시간이 넘게 계속 같은 풍경의 연속이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도로 갓길에 차가 고장이나 곤란해하는 사람이 있다. 행동이 뭔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이다. 그는 여행객의 차를 발견하고 도와달라는 손짓을 한다. 하지만 여행객은 그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고, 지루한 길을 두어 시간을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해 씻고 푹 쉬었다.
참 재미없는 영화다. 아니 영화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사람의 삶을 일종의 영화라고 생각해 보자면, 삶의 위기가 흘러넘치는 곳이 바로 이 응급실이다. 이 안에서 나는 수많은 종류의 위기와 그것이 클라이맥스로 올라가는 과정들을 지켜봤다. 그러던 중 나에게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며칠째 비가 오던 날이었다. 응급실 안은 한산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가 비교적 경증인 환자들의 발걸음을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날은 중환자가 아니면 응급실에 잘 오지 않는다. 응급실 안의 TV에서는 넓은 간선 도로에서 발생한 빗길 연쇄 추돌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5중 추돌이었고, 두 번째에 끼인 차량이 가장 손상이 심했다. 나는 앞뒤로 찌그러진 차체를 보고 그 안에 타고 있었을 사람을 상상했다. 그때 구급차가 들어왔다. 환자는 의식이 코마 수준이었고, 혈압도 측정되지 않았다. 기관 삽관을 하고, 중심정맥카테터 삽입을 한 뒤 승압제를 투여하고, 동맥혈 채취하고. 일사불란하게 모두 움직였다. 그때 구급대 대원이 환자의 소지품을 건네주었다. 나는 지갑을 열어서 환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그는 QUINN의 보컬이었다.
8.
음악 웹진 <라우드니스 사운즈>의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기자: 사고가 있은 지도 몇 달이 지났네요. 밴드가 해체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허수: 아닙니다. 해체는 안 할 거예요.
기자: 그럼 보컬 오디션이라도 기획하시나요?
허수: 새로운 보컬을 뽑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자: 그렇군요. 앞으로 QUINN은 해체는 안 하지만 잠정적으로 활동 중단으로 보면 될까요?
허수: 음악에 있어서 중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계속 음악을 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는 거죠.
기자: 네, 그럼 끝으로 앞으로 계획을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허수: 계속 이어 나가야죠. 음악이든 학문이든 저는 한 번도 손에서 놓은 적 없어요. 저는 천체물리학 학자이면서 뮤지션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9.
영화로 성공을 한 뒤 의기양양하게 허수를 만나겠다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허수가 나를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 녀석은 봄의 따뜻한 바람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입춘 날, 나는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지?
너도 밴드 음악 꽤 좋아했었으니까 내가 요즘 뭐 하는지 알고 있겠지?
어떻게 연락 한 번 없냐 임마
너는 학창 시절에 그렇게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들락날락하더니 결국 영화감독이 되셨구만.
네 영화 얼마 전에 영화제에서 봤었어. 그.. 뭐였지? 니가 옛날에 억지로 나를 끌고 가서 봤던 영화 있잖아, 그 태국 감독 아차피퐁 뭐더라.. 여튼 그 사람 것 보다 재미있더라. 나쁘지 않았음.
여튼 요즘은 뭐 하냐?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허수-
허수를 만나기 전에 고민을 잠깐 했었다. 아무리 친했다고 하지만 우리 사이엔 10년의 공백이 있었다. 서로를 곁에 두고 있던 시간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을 각자만의 사건들로 빼곡히 채워왔다. 나와 허수는 10년 전과 같은 사람일까? 그사이 우리는 변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여전히 친구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우리는 어제 만난 것처럼 친근했다. 마치 '내일 보자!'하고 헤어진 뒤 그다음 날이 되어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공유했다. 각자 걸어온 길은 같은 듯하면서 달랐지만, 방향성은 같았다. _-허수는 '스칼라 값은 달랐지만 백터 값은 같네'라며 이과 개그를 시전 했다. 분하지만 나는 웃고 말았다-_ 그러면서 한 잔, 두 잔. 녀석은 술을 꽤 잘 마셨다. 나도 나름 술을 잘 마시던 터라, 예전 같으면 경쟁적으로 더 마시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맥주 서너 잔을 비운 뒤 허수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영화 있잖아, 네가 만든 영화. 그.. '물 불 바람 흙'인가 그거 말야 "
"야, '하늘과 별의 노래'지 무슨 놈의 물 불 바람 흙이냐. 4 원소설도 아니고. 영화를 본 거 맞기는 맞냐?"
"아 뭐 여튼 그거 말이야, 그거 마지막에 당근은 무슨 의미냐"
"당근?"
"아니, 그 주인공이 마지막에 당근을 먹잖아. 그것도 생당근을!"
"맥거핀이야"
"응? 그게 뭐야"
"뭐 그런 게 있어. "
"야, 영화 쫌 안다고 유세냐"
맥주 두어 잔을 더 비운 뒤 허수가 말을 꺼냈다.
"우리 같이 영화 만들래? 나는 음악을 만들고, 너는 이야기를 쓰고"
"그래? 그럴까? 근데, 무슨 이야기를 쓸지 모르겠어"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지, 일단 네 이야기"
"내 이야기?"
"꽤 다이나믹한 삶을 살았더구만"
"너만 하겠냐"
"그리고 나의 이야기도 같이"
"음... 그래! 문제없지!"
나는 허수와 건배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야, 그런데 너 음악 좀 하냐?"
"꽤 하는 편?"
우리는 웃으면서 맥주 한두 잔을 더 비웠다.
10.
오늘은 우리들의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다. 극장을 들어서며 허수는 또 아차피퐁 타령을 했지만 나는 단칼에 일축했다.
극장은 밤하늘처럼 어두워진다. 기대감 속에 영화는 시작한다. 별을 닮은 빛의 알갱이들은 은빛 스크린으로 달려가 부서진다. 소리의 파동은 온몸을 울리며 노래한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은 질투하고,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극복하고 환희하며 나아간다.
우주를 노래하고, 현실을 살아가고, 이상을 좇으며 그렇게 낭만적인 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