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 임대료의 상승과 프랜차이즈의 침범으로 주변의 오래된 가게들은 다 사라져 버렸다. 특색이 사라진 거리는 활기를 잃어갔고 점차 인적이 뜸해졌다. 매일 새벽 늦게까지, 가끔은 이른 아침까지도 환하던 거리는 어느새 하나 둘 빛을 잃어갔다. 이제 새벽까지 골목을 밝히는 가게는 필립(philip)의 작은 바 밖에 남지 않았다.
바의 이름은 PHILLIES로, 필립의 별명에서 따온 것이었다. 거짓말쟁이 필립. 거짓말을 좋아하는 필립.
(좋아한다는 뜻의 접두사 PHIL-과 거짓말의 LIES를 이은 말이다. 그리고 phil은 필립의 애칭이기도 했다)
그가 하는 거짓말의 특징은 남에게 크게 해는 끼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커다란 금전적 이득도 돌아오지 않는, 쩨쩨하고 사소하다는 것이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중절모를 쓰고 멀끔히 차려입은 남성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에게 환심을 사려는 듯 한껏 멋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멋지게 에스코트하여 바 테이블 자리에 앉히고, 본인도 그 옆에 앉는다. "마스터!" 그는 허세가 들어찬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멋들어지게 필립을 불렀다. 그는 익숙한 듯 위스키를 주문했으나 필립은 왠지 모르게 심사가 뒤틀려 같은 가격대의 브랜디를 내어 주었다. 그리고 여성은 미도리 사워를 주문했다.
중절모의 남성은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 술과 가게에 대한 극찬과 함께 위스키의 역사, 제조방법, 마시는 법 등에 대해서 붉은 드레스의 여인에게 알려주었다. 여인은 미소를 지은 채 이를 차분히 듣고 있었다.
필립은 연녹색 빛을 예쁘게 발하는 칵테일을 만들어 여성 앞에 두었다. 그리고 미도리 사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칵테일이며, '도리'라고 하는 것은 새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일본의 국조 '미도리'의 깃털 색을 따라 칵테일의 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를 듣고 있던 남자는 필립을 칭찬하며("역시, 마스터. 뭘 좀 아시네요") 뒤이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시간은 새벽을 달리고, 남자의 이야기는 무르익었다. 간간이 맞장구를 쳐주며 눈웃음을 짓는 여인에게 반한듯한 남자는 점점 더 이야기에 박차를 가했다. 남성은 장교인 듯했다. 몇 년 전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필립은 자신의 왼쪽 팔꿈치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 상처로 인해 완전히 펴지지 않는, 미묘한 각도로 휘어있는 왼쪽 팔을 본 남자는 혹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냐고 필립에게 물어보았다. 필립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한국전쟁 참전당시 쏟아지는 총알을 뚫고 고지를 점령했으나, 비열한 적군이 그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아 그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왼팔꿈치가 완전치 않다고 말했다. 행주로 유리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 그때를 회상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상이군인이었다. 이에 남자는 존경의 의미를 표하며 가벼운 경례를 보냈다. 이에 필립도 왼손을 들어 거수경례로 답했다.
술을 여러 잔 마신 남자가 화장실을 찾아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필립, 어떤 거 같아요 이 남자?" 여인이 말했다.
"진지하게 만날 거야?"
"고민 중이에요. 그러니까 데리고 왔죠"
"왜 우리 가게로 왔어?"
"지금 시간에 다른 가게는 다 문 닫았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필립이 보기엔 괜찮아 보여요?"
"좋은 사람인 거 같아. 허풍도 없고"
여자는 짐을 정리한다.
"그런데 팔 그거 진짜 전쟁터에서 다친 거예요?" 여자가 물었다.
"아니, 그냥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진 거야"
"역시 그랬군요."
여자는 짐을 들고 가게 문을 나선다.
"나 그냥 화장실 갔다고 해요"
"그래 알았어"
"그런데 나 일본어 할 줄 아는 거 알죠?
"물론 알지"
여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손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뒤 남자가 돌아와 여인의 행방을 묻자 필립이 답했다.
"아마 담배 피우러 갔겠죠?"
남자는 싱글벙을 웃으며 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 더 시켰고, 필립은 브랜디를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