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제 slashpage 블로그에 썼던 글 (24.02.28) 을 옮겨다둡니다. slashpage의 UI가 마음에 들어 그 곳을 본진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인데, 외부 유입을 위해 여기저기 채널에 미러링하는 중
최근 AI에 대해 재미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PD 1명, 변호사 1명, 로스쿨 재학생 1명, 디자이너 1명, 그리고 창업가 1인 구성의 모임에서 진행되었다. Open AI의 Sora가 주제의 발단이 되어 각자 분야에서의 AI 관련 잡학을 끌어모아 긴 논의 끝에 다음의 질문만이 남았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 ‘업’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맞닥뜨리게 된다. ‘업’의 본질은 ‘업’을 이루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업무 영역 또는 그 내용에 대한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AI 변호사를 떠올려본다. 변호사와 같이 면허를 기반으로 하는 공인 전문직은 그 qualification 에서 요구하는 지식이 명시적으로 범주화되어 있다. 따라서 공인 교과서 대신 암묵지로 전문성이 구성되는 비전문직 (예컨대 컨설턴트) 에 비해 AI를 통해 그 지식을 모방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변호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학습해야하는 지식의 범위, 특정한 지식의 옳고 그름 판단 등을 생각해본다면. 그런데 이 지식을 갖추었다고 하여 변호사 업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변호사의 업무영역 중 송무는 특히나 사실 판단 이후의 다양한 이해관계 및 그 역학을 반영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기업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맡은 (사내/사외) 변호사는 기업의 결정에 대해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는 법리해석뿐만 아니라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는 단순해석 이상의 논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접근을 하지 않을성 싶다. 이때 사실관계에 대해 표면 위로 드러난 정보 외에도 사내 정치 역학이라던지, 기업 외부의 이해관계자의 입김이라던지를 (적고보니 대개는 relationship-based의 무언가에 국한될지도) 고려해서 종합적인 전망을 가지고 Pros & Cons를 판단할 것인데 이 역할을 소위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한 모범생 AI 변호사가 수행하기는 어려울 테다. AI의 학습능력과 성장속도 때문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화시키기 곤란한 정보들이 실제로는 더 많이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기업과 관련하여 변호사 ‘업’의 핵심은 중립적이고 ‘기계적’인 (이 단어 또한 재고해야할 때가 금새 올지도…)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결정에 대해 공식적인 authorization을 부여하는 역할, 가장 안전하게 risk를 진단하거나 나아가 조정하는 역할에 가깝다. 나는 이 두 역할 간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내용은 변호사에만 해당하는 바는 아니다. 모임에서는 참여한 전원의 직업을 이 관점에서 살펴보았고 꽤 유사한 결론, 그러니까 드러난 직무 skill 과 실제 ‘업’의 본질 간 차이에 도달할 수 있었다.
AI가 알고리즘화 하기 난감한 무작위의 정보/지식 바탕의 의사결정이 현업에서는 훨씬 많이 이뤄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정보/지식을 알고리즘의 재료로 input 하는 것조차 꺼려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아직까지의 인간-AI 관계 지형상 AI 에게 risk를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감정적인 허들이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싶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에 대해 이야기할 때 AI 를 통해 얼마나 많은 업무가 대체될 수 있냐는 방향에만 집중해서는 놓치는 지점이 생긴다는 의미다. 나 또한 AI의 가능성에 매일 압도되고 있고, 그 실무적 유용성을 높게 평가하지만 아직까지 (또는 예상보다 꽤 오랫동안) AI가 돋보이는 구간은 롱테일하게 쪼개진 세밀한 단위의 업무들에 대해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서는 업무단위 뿐만 아니라 AI가 실질적으로 대체하게 되는 비즈니스 또한 유사한 현상을 보일 것같다.) 일이 ‘되게끔’ 하기 위해 1+1 만으로 2가 되지는 않으니 2+a를 만드는 각종 ‘업’들의 종합예술(?)에 대해서만큼은 AI가 여러모로 갈 길이 멀다.
새벽네시는 현재 마케팅을 재료로 비즈니스의 성장을 만들어낸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마케팅의 본질은 제품/서비스 외부에 고객과의 접점을 만들어 비즈니스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위 관점으로 돌아와 마케팅 ‘업’의 본질을 고민해보면 이는 마케팅 자체의 본질과는 차이가 있다. 변호사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할 때의 이 ‘업’의 본질은 비즈니스 성장에 대해 ‘확신’을 드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대로 ‘risk’에 대한 (반드시 법적 형태가 아니더라도 정서적/관계적으로) 연대책임을 뜻하기도 하고.
이 지점을 꽤 첨예한 수준으로 이해하는 데 창업 이래 꼬박 1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실무자로 일하던 주니어 시기를 떠올려보면 그 격차는 아득할만큼 더하다. 돌아보건대 그렇게 놓친 수많은 기회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이 깨달음은 새벽네시의 현재 Core Value 중 하나인 “허세없음”을 짚어내는 데에 근간이 되었다.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적어도 그걸 찾아내려는 시도) 없이는 길을 잃기 쉽상이다.
실무적인 의사결정 레벨로 이 깨달음을 옮겨와보면,
가장 주되게는 우리는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이 특정한 형태여야 한다는 믿음을 폐기했다.
(product 와 service 를 다루는 관점과 관련해서 흥미롭게 살펴봤던 건 퀄트릭스와 서베이 몽키의 사례다.
더 좁게는 마케터를 완전 대체한다는 목표의 마케팅 product를 상상하는 것보다 마케터의 손/발을 생생히 덜어줄 수 있는 무언가를, 따라서 마케터 또는 마케팅 비즈니스는 그 ‘업’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무언가를 그려보기로 했다.
나아가 앞선 모든 이야기는 결국 ‘업’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AI 및 AI를 활용하는 공급자가 아니라 고객의 사이드로 생각의 전환이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고객지향이라는 가치의 외연을 훨씬 넓혀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세일즈부터 오퍼레이션까지 고객의 UX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졌다. “고객이 무언가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 말 아래에 있는 (숨긴 또는 고객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
사내/외를 가리지 않고 상대의 의사결정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drive하는 그 UX 자체가 모두 세일즈다. 이 스킬을 얼마나 갖추냐에 따라 ‘업’에서의 레벨 업 (ㅎㅎ) 또한 가능하다고 본다.
어느덧 개봉이 10여년 지난 영화 (믿을 수 없어!!) 을 아직도 종종 떠올린다. 주인공 Theodore의 직업은 편지작가다. 의뢰인은 편지의 재료가 될 수신인과의 추억을 Theodore 에게 전하고 Theodore의 음성을 매개로 프로그램은 편지를 써내려가는데 물론 필체는 의뢰인의 것을 따른다. 완성된 편지는 의뢰인에게 전달되고 의뢰인을 통해 end-user에게 도착한다. Theodore가 얼마나 훌륭한 각색가이자 작가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과정을 곱씹어보면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의 본질은 아마 편지를 ‘전달’하는 그 과정과 의례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10년 전에는 따뜻하면서도 묘하게 건조하게 느껴지던 그 풍경이 (물론 어딘가 여전히 건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생생히 또 새로이 와닿는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