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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앤 Aug 11. 2021

집에서 여행하기

그린 파파야향이 가득한베트남

 찌는 듯한 여름날,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면 집에서 베트남을 여행하기에 손색없는 날이다. 오늘은 베트남으로 떠나자!


 여행을 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그곳의 소리 찾기다. 오감 중 제일 먼저 완성되고 가장 늦게 닫히는 감각이 청각이 아니던가. 그러한 청각에 대한 일종의 예우랄까. 베트남 전통 악기 떠릉의 연주곡, 베트남 대중가요 등도 좋겠지만 오늘은 유튜브에서 베트남 길거리의 백색소음을 찾아 재생한다. 오토바이 떼의 배기구와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요란한 소리들과 현지인들의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베트남어가 내 귀를 제일 먼저 베트남으로 데려간다.



 이제 무얼 먹을지 정할 차례다. 쌀가루를 바삭하게 부친 피에 새우, 숙주나물, 각종 채소를 넣어 먹는 반쎄오,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와 쌀국수를 채소와 함께 새콤달콤한 소스에 찍어먹는 분짜, 바게트 샌드위치 반미 등 베트남은 맛있는 음식들의 천국이다. 불행히도 집에 있는 재료로 아쉬우나마 할 수 있는 음식은 쌀국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제일 좋아하는 베트남 음식 역시 쌀국수다. 쇠고기를 넣은 퍼 보와 닭고기를 넣은 퍼 가를 두고 고민하다가 퍼 보로 정한다. 


반쎄오

 자, 이제 요리를 시작하자. 잠깐, 이때 타이머를 30분에 맞춰놓는다. 타이머가 울리면 가차 없이 에어컨을 끌 것이다. 제시간에 요리하지 않으면 뜨거운 여름날의 공기에다 주방의 열기까지 더해져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왜 30분 안에 요리를 해야 할까?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정해진 시간 내에 해야 하는 미션이 있다는 거다. 비행기를 제시간에 늦지 않고 타야 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호텔 체크 아웃을 해야 한다. 시간의 제약이 주는 긴장감은 여행의 느긋함을 더욱 빛나게 해 주기에 빠뜨리기엔 아쉽다. 미션을 클리어했을 때의 기쁨 역시. 그 긴장감을 타이머로 대체한 것이다. 타이머를 15분에 맞춰놓을지, 1시간에 맞춰놓을지는 물론 내 마음대로다. <마스터셰프> 같은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한 설정이 아니기에 초를 다툴 정도로 너무 촉박하게도, 그렇다고 타이머의 존재 이유를 소멸시킬 정도로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정한 시간이 30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쌀국수 만들기에 들어간다. 현지에서 장을 보고 요리하는 일일 쿠킹 클래스에 등록한 것으로 상상해본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백색소음 덕분에 주방은 쉽게 베트남의 어느 시장 한복판으로 변한다. 쿠킹 클래스 강사가 독특한 억양의 영어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최대한 간단히 설명한다. 

-육수엔 팔각, 코리앤더 시드, 큐민, 시나몬, 정향, 육두구 등 여러 향신료가 필요해요. 우린 시장에서 이걸 살 겁니다.

강사가 언급한 모든 향신료들이 들어 있는 육수 팩을 들어 보인다. 나는 감탄하며 육수 팩을 코에 가져가 향을 깊숙이 들이마신다. 

 -면을 물에 넣어 불리세요.

 -육수를 낼 물을 불에 올려놓으세요.

 -물이 끓는 동안 양파를 채칼로 얇게 저민 후 물과 설탕과 식초를 1:1:1로 해 양파를 절여주세요.

-물이 끓으면 육수 팩을 넣고 3분간 우려내요.

-물에 불린 면, 얇게 저민 소고기, 숙주를 육수에 넣어 살짝만 더 끓이세요.

-그릇에 담고 고수를 넣으면 완성입니다.

 

 생 고수가 없어 말린 고수 가루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맛을 보니 뭔가 2% 부족한 맛이다. 그럴 수밖에. 난 쿠킹 클래스의 학생이지 강사가 아니니까. TV 앞 테이블에 국수를 세팅한다. 미션 클리어! 이때, 타이머가 울리고, 에어컨을 끈다.


 도대체 왜 에어컨을 꺼야 하지? 그건 바로 베트남의 더위를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다. 영화 속 겨울 날씨에 연동해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부는 4D 영화관의 특수효과에 감탄했던 적이 있다. 4D 영화관에 왔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그 이상의 곳에 왔다고 상상해보라. 최첨단의 테마파크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더위는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짜증 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탄할 것이다. 내 여행 놀이를 위해 자연이 만들어준 더위를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게 만드는 더운 공기, 쌀국수에서 퍼져 나오는 향, 후루룩 입 안에 감기는 부드러운 면발과 함께 트란 안 홍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1994)는 내 오감을 완벽하게 1951년의 베트남 사이공(1975년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뀐)으로 인도한다. 


 열 살의 시골소녀 무이는 사이공의 부잣집 하녀로 일하게 된다. 무이 또래의 딸을 잃은 주인아주머니는 귀한 화병을 깬 무이를 혼내지 않는 등 친절하게 대한다. 무책임한 가장 때문에 주인 집안은 점점 가세가 기울고, 주인아주머니는 십 년 간 함께 한 무이를 어쩔 수 없이 주인집 아들의 친구이자 무이가 오랫동안 연모해온 쿠엔의 집으로 보낸다. 순수한 무이에게 점점 끌리는 쿠엔. 마침내 둘은 연인이 된다.


 영화 속 선풍기와 천장 실링팬이 돌아가는 실내, 늘 땀에 젖어 있는 무이의 이마와 목 주위의 머리카락은 열대성 기후를 가진 사이공의 더위를 화면 밖으로 내보낸다. 에어컨이 꺼진 집 안의 더위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묘하게 무너뜨린다. 흰 세숫대야에 담긴 물로 얼굴을 정성껏 씻는 무이를 보고 난 뒤 영화를 잠시 멈추고, 세면대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그저 씻기 위한 행위가 아닌, 무이처럼 천천히 물의 차가움을 즐긴다. 샤워기의 물줄기 속에서는 쏟아져내려 사라지는 물에 나도 모르게 나를 맞춰왔다는 것을, 때문에 그 안엔 어떤 다급함과 조급함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고여 있는 물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려준다. 세수에서 뜻밖의 여유와 평화로움을 얻는다. 


 

 잘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부은 후 채소와 고기를 볶고, 갓 지은 흰쌀밥을 푸는 나이 든 하녀와 무이를 보고 있노라면 베트남의 어느 가정집 식사 시간에 초대받아 온 것만 같다. 요리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특히나 정원에 열려 있는 그린 파파야를 따서 물에 깨끗이 씻은 뒤 칼로 두드려 잘게 채를 썰어 샐러드를 만드는 모습을 어린 무이와 성인이 된 무이를 통해 자세하고 섬세하게, 반복해서 보여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파파야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프이기 때문이다.


 파파야는 음식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영화에 등장한다. 무이를 사랑하게 된 쿠엔은 무이에게 글을 가르쳐준다. 쿠엔 앞에서 무이는 '우리 집 정원에는 열매가 많이 달려 있는 파파야 나무가 있다. 잘 익은 파파야는 옅은 노란색이고 잘 익은 파파야는 또 달콤한 설탕 맛이다'라고 서툴게 책을 읽는다. 


 무이가 읽은 책 내용에도 나와있듯이 초록색이던 파파야는 익어가면서 노란색으로 변한다. 첫 장면에서 녹색 계통의 옷차림으로 등장했던 무이는 이후에도 거의 녹색 상의 차림이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서 쿠엔의 아이를 임신하고 책을 능숙하게 읽는 무이는 노란색 옷을 입고 있다. 그린 파파야가 노랗게 익어가듯 무이가 성장했음을 노란색의 옷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이는 베트남어로 향기를 의미한다. 그린 파파야 향기는 무이 그 자신이다. 


 

 그린 파파야의 싱그러운 향기와 함께 한 여행을 끝내려니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커피를 생산하는 베트남에서 커피를 맛보지 않을 순 없지. 



 연유를 듬뿍 넣어 달달하고 시원한 아이스커피인 카페 쓰어 다를 마시며 베트남 여행을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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