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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 숙영 Sep 24. 2024

미룬이였어

첫 발 떼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평소 하신 말이 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뭐든 쉽게 생각해야 할 수 있다."

아버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4명의 자식들 중 유독 나에게만.

그것도 잊을만하면.

난 왜 그때 그 말을 심도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왜 아버지께 무슨 말인지 물어보지 못했을까. 

어쩌면 나는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억눌러 버린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지만 어떤 일에 부담감을 느끼면 그 말이 기억났다. 이번엔 그 말을 흘러 보내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붙들고 늘어졌다. 지금 내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난 왜 뭐든 첫 발 떼기가 어려울까. 뜸 들이는 시간은 왜 또 이렇게 오래 걸릴까. 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시간을 질질 끌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머릿속은 복잡했고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대면하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했다. 



브런치작가 심사에 통과한 지 90여 일이 지났다. 한 명의 독자를 향한 간절함과 삶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이 플랫폼에서 글을 발행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글 쓰는 자격을 얻었지만 어제까지 난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다. 아니 쓰지 않았다. '이번일만 끝나고 나면 꼭 써야지'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몇 번 어기고 나니 '언젠가는 쓰겠지'라며 체념하게 되었다. 여전히 머릿속에선 글을 쓰지 못하는 이런저런 이유가 떠올랐고 서로 항변했다. 


'회피'라는 방어기제가 첫 발을 꽁꽁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되었지만 잘 쓸 자신은 없었다.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 시작을 미루다 기어코 미룬이가 되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나도 모르게 썼던 방어기제가 글을 써야 하는 순간에 발동했다.   


난 새로운 일은 일단 미루고 피하고 본다. 그래서 내 삶은 도전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진입을 망설이거나 고민하다 번번이 기회를 잃었다. 자동적 사고는 내가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았고 '이런 상황에 , 내 형편에 뭘 할 수 있겠어? '라며 떨어진 자존감은 '회피'라는 방어기제 뒤에 숨었다. 어쩔 수 없지 않냐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난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다. 스트레스 상황이 생기면 마음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나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기는 한가?'라는 의문이 들 때면 이 말을 기억하고 6단 높이의 일기장을 바라본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 때 부모가 앞에서 박수를 치며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며 첫발 떼기를 응원하듯 나에게 용기를 북돋운다. 드디어 오늘 첫 발을 뗀다. 두 발짝 띠고 잠시 멈추거나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두렵지만은 않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좀 수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아니까.


'어려운 일을 도모하는 자는 쉬운 데에서 착수하고 큰 일을 하는 자는 그 작은 일에서 시작한다.' 도덕경에 나오는 문장이다. 아버지께선 이 말의 의미를 적확하게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그래서 애쓰는 딸에게 뭐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라고 생각의 씨앗을 심어주신 것 같다. 

지금 생각한 걸 그때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께서 20여 년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시작이 제일 무서운 미룬이는 일단 시작하고 보는 실행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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