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최영미의 시는 얼핏 보기에 도발적이다. 사람을 저으기 당황스럽게 하면서, 그러나 그의 시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이 유혹의 빛은 삶을 지탱시켜 주는 중요한 어떤 것, 이념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비춰주고는 문득 암전(暗電)되고 만다. 나이 서른에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는 이 시집은 이념의 대홍수 이후 그것의 범람에 가담했던 세대의 기록으로 기억되겠지만, 시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더 이상 명예가 아닌 때에 삶에의 자존심마저 훑어가 버리고 없는,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그 황폐한 곳에 스스로 거주하고자 하는 시인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자가 이 시대에 또 있다니(!) 반갑다.
황지우 시인의 이 시평을 등대로 삼아 최영미의 시를 감상해 보자. 마음에 와닿을 한 편의 시가 있기를 갈망하면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것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최영미, <선운사에서> -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마치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는 듯 완벽한 하나의 선으로 미끄러지는 새
그 새가 지나며 만든 부시게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 포스트모던하게 미치고픈 오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식당 입구에 줄 없이 서 있었다
- 최영미,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 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 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 최영미, <혼자라는 건> -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최영미, <사는 이유> -
봄이 오면
손톱을 깎아야지
깎아도 깎아도 또 자라나는 기억
썩은 살덩이 밀어내
봄바람에 날려 보내야지
내 청춘의 푸른 잔디, 어지러이 밟힌 자리에
먼지처럼 일어나는 손거스러미도
뿌리째 잘라 없애야지
매끄럽게 다듬어진 마디마디
말갛게 돋아나는 장밋빛 투명으로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리라
그림자 더 짧아지고
해자락 늘어지게 하품하는, 봄이 오면
벌떡 일어나 머리 감고 손톱을 깎아야지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아
쓸어버려야 해, 훌훌
봄볕에 겨워 미친 척 일어나지 못하게
묻어버려야 해, 영영
봄이 오면, 그래
죽은 것들을 모아 새롭게 장사 지내야지
비석을 다시 일으키고 꽃도 한 줌 뿌리리라
다시 잠들기 전에
꿈꾸기 전에
- 최영미, <대청소> -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에 머리 묻고 생각해 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 최영미, <인생> -
아스팔트 사이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클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북한산 죽은 가지 베물고
햇새벽 어둠 굼뜨다 훠이훠이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게으른 이불 속 코나 후빌 때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 식탁 웅성거릴 때
소리 없이 소문 없이
집 하나 짓고 있었구나
자꾸만 커지는구나
갈수록 둥그레지는구나
봄바란 싸한 냄새만 맡아도
우르르 알을 까겠지
모스크바에서도 소리 없이
둥그렇게 새가 집을 지을까?
내 가슴에 부끄러움 박으며
새들은 오늘도 집을 짓는구나
- 최영미, <새들은 아직도……> -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 놓는,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이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또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 땅
줄줄이 피멍 든 가슴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
- 최영미, <어쩌자고> -
이제 네게 남은 것은
기억뿐――
봉창 두드리는 석양만큼도
언 몸뚱아리 데우지 못하는
이제 네게 남은 것은
연민뿐――
죽은 돌멩이 하나 옮겨놓지 못하는
기억을 남기려고 사랑한 건 아닌데
연민을 남기려고 미워한 건 아닌데
사랑하다 돌아선 자리
미워하다 돌아선 자리
이리 닳아 있구나
쓸 쓸
닮아가고 있구나
- 최영미, <귀거래사(歸去來辭)> -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 ―― 을
- 최영미, <내 속의 가을> -
4월의 혼백들이 꽃으로
피어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5월에 떠난 넋들이 바람 되어
흐득흐득 운다는 시도
나는 믿지 않는다
6월, 그 뜨겁던 서리
내 눈앞에서 스러진 어떤 젊음이
꽃으로 바람으로 또 무엇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노래를 나는 믿을 수 없어
꿈에라도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멀리 구르지 않아도
꽃 따로 바람 따로 굳이 떠돌지 않아도
다시 살아 눈뜬 아침,
스탠드 켜고 육박해오는
이 심심(心心) 뻐근한 역사의 무게
- 최영미, <어떤 윤회(輪廻)> -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 원 권 한 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 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똑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녘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 하고 가끔씩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 최영미, <시(詩)> -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 최영미, <지하철에서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