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보낸 한평생

시험지를 철하라

by 꿈강

지방 소도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30년 넘게 교직 생활을 하고 퇴직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 새로운 일을 추진하거나 기존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추진할 때, 참 어이없는 방식으로 추진했었구나 하는 생각기 든다. 그 소도시에 있는 네 개의 일반계 고등학교 모두에서 근무했었는데, 단 한 학교의 예외도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기에 그러냐고? 내가 근무한 학교 네 곳 모두 '사전 협의' 또는 '의견 조율' 과정 없이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방식이 추진되었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도 사전 협의 과정을 거쳐야 그 일의 효과가 극대화할 텐데,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어 보아도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사전 협의 과정을 거친 적이 떠오르지 않는다.


업무 담당 교사의 느닷없는 메시지로 일이 추진되곤 했다. 물론 그 일은 담당 부장 교사와 논의하고 학교 관리자(교장, 교감)의 결재를 얻은 일이다. 학교 구성원 중 극히 소수의 사람들끼리 쑥덕쑥덕해서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교사들도 학교의 이런 일 처리 방식의 공모자일 수도 있겠다. 일 처리 방식이 마뜩지 않아도 뒷전에서 꿍얼댈 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당 교사의 메시지가 촉발한 어떤 일은 거의 늘 원안대로 추진되곤 했다.


2014년에 불쑥 날아온 평가 담당 교사의 '시험지를 철하라'라는 메시지는, 학교에서 어떤 일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추진하는 과정의 전형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사가 아니라면 '시험지를 철하라'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당연히 모르리라. 교사들 중에서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4년은 내가 교직 경력 25년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는데, 그때까지 '시험지를 철하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2012년에 그 학교에 근무하다가 1년 동안 다른 시군의 학교에서 근무한 다음 다시 그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2012년에 근무할 당시에도 전혀 들은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4월 말에 시작하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평가 담당 교사가 '담당 과목의 시험지가 3장을 넘으면 시험지를 철하라'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난생처음 듣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옆자리의 교사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뭔 말이냐고. 말 그대로 시험지 쪽수가 5쪽, 장수로 3장을 넘으면 스테이플러로 시험지를 철하라(묶으라)는 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당시 내가 출제한 시험지는 10쪽, 5장이었다. 스테이플러로 철해야 하는 시험지에 해당했다. 시험 응시 학생은 200여 명. 최소한 200번의 스테이플러 질을 해야 하지 않는가. 스멀스멀, 분노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좀 알아보았더니 2013년에 새로 부임한 교감의 지시 사항이라고 했다. 2013년 중간고사를 앞두고 평가 담당 교사가 2014년에 내가 받은 메시지와 거의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학교 전체가 술렁였단다. 그러나 곧 잠잠해졌단다. 몇몇 교사가 평가 담당 교사에게 왜 그래야 하냐고 따졌는데, 새로 온 교감의 지시 사항이라는 담당 교사의 말 한마디에 상황이 곧 평정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근무했던 지방 소도시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관리자(교장, 교감)의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뒤에서 뭐라고 꿍얼거릴지언정 공식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일은 거의 없다. 2013년에 아무 문제 없이 시행된 일이니 2014년에도 그대로 시행하려고 평가 담당 교사가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2014년에 그 학교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약 열다섯 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아무도 이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랬다. 뒷전에서만 투덜거릴 뿐이었다.


시험지를 문제지 봉투에 넣어야 하는 때가 왔다. 이를 '시험지 분철'이라고 부른다. 시험지를 분철하면서, 자신이 출제한 시험지 매수가 3장을 넘는 교사들은 시험지를 스테이플러로 철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는 투덜거리기 싫었다. 교감에게 지시의 타당성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불만을 토로하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시험지를 5장씩 간추려, 하나하나 스테이플러로 철하기도 마뜩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지 각 장을 구분하는 띠지만 붙인 채로 시험 문제지 봉투에 넣었다.


이러면 시험 감독 교사가 좀 번거롭다. 시험지를 스테이플러로 철해 놓으면 한 번만 나누어 주면 되지만, 철해 놓지 않으면 다섯 번을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험지 분철 작업을 하는 평가관리실 안을 둘러보니 스테이플러로 시험지를 철하지 않고 봉투에 넣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는 듯했다.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첫 시험 감독을 들어가 문제지 봉투를 열어 보니 4장짜리 시험지가 스테이플러로 얌전히 철해져 있었다.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배부하고 나서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직 생활 25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4번 반복해야 할 일을 단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난 뒤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시험지를 철해 주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다. 낱장으로 받으면 시험지 관리하기가 나쁘다고 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시험지를 스테이플러로 철해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건 나쁠 게 하나도 없다. 학생들에게도 좋고 시험 감독 교사에게도 좋다. 수능 문제지도 묶어서(물론 스테이플러로 철하지는 않지만) 전해지니 학교 시험 문제지도 철해서 전해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스테이플러로 일일이 철해야 하는 해당 교사가 좀 힘들겠지만, 한 사람의 수고로 여러 사람이 좋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험지를 철해서 나누어 주었을 때의 좋은 점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했다면 교사들이 뒤에서 구시렁대는 일 없이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별다른 사전 설명 없이 '시험지를 철하라'라는 메시지를 불쑥 보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설명하고 하는 과정이 귀찮은 것이다. 또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애초의 의도대로 일이 잘 굴러갈 테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 일 대부분이 사전 설명, 토론, 토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된다. 학교의 잘못된 관행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을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처음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던 교사들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이런 학교 문화에 젖어든다. 그리하여 학교의 회의는 대개 조용하다. 교사들 입은 점차 더 무거워지고 그런 교사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교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문화가 학생들에게도 은연중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수업 중에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서슴지 않고 밝히는 학생은 거의 없다. 2~3년에 한 명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묵언 수행을 한다. 교사들이 체화한, 입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가 공론의 장에서 건전한 토론과 토의 과정을 거쳐 어떤 일을 추진해 나가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문화가 학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신의 생각을 서슴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 터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아무 거리낌 없이 토해 낼 수 있는 세상, 생각만 해도 좋지 아니한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손 글씨 시 배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