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손녀딸이 어떤 행동으로 우리 부부를 웃게 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손녀딸 어린이집 등하원을 도맡아 하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지만 손녀딸과 함께하며 하루에 한 번 이상 웃는 것 같다. 은퇴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나와 함께 은퇴한 동료를 만났더니, 매일매일이 지루하다고 한탄을 했다. 우리 부부는 지루할 틈이 없다. 그에게 차마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손녀딸은 나와 아내의 비타민이다.
8시가 다 되어서야 손녀딸이 '할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손녀딸 방으로 달려가더니, 이내 거실로 나왔다. 좀 더 누워 있겠다고 한 모양이다. 아내가 손녀딸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슬쩍 손녀딸 방으로 가 보았다.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손녀딸은 손에 분홍색의 무엇인가를 들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엉덩이 하트'라고 대답한다. 핑크색의 하트 모양의 물건인데, 어찌 보면 엉덩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손녀딸 말로는 어린이집에서 준 것이라고 한다. 색깔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러는 손녀딸 옆에 누워서 손녀딸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그럴 때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고 있는데 손녀딸이 불쑥, "여기엔 엄마만 누울 수 있어."라고 한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난 모양이다. 내가, "엄마만 누울 수 있다고? 할아버지도 안 되고 할머니도 안 돼?"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누울 수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퇴장하라는 소리다. 까닭을 알 수 없지만, 이럴 땐 가만히 퇴장하는 게 상수다. 아내를 손녀딸 방으로 부른 뒤, 나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 잠시 앉아 있으려니, 손녀딸이 할머니 손을 잡고 나왔다. 잠을 푹 자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잘 이루어져서인지 기분이 꽤 좋아 보인다. 등원 준비를 하면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일종의 루틴인데 오늘은 '페파 피그'를 틀어주었다. 영어 버전인 줄 알고 틀었는데, 우리말 버전이다. 요즘 손녀딸은 우리말 버전을 더 좋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말 버전은 손녀딸이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동안 '페파 피그'를 보던 손녀딸이 '캐치 티니핑'을 보겠다고 한다. 우리말 버전의 '캐치 티니핑'밖에 보이지 않기에 할 수 없이 그걸 틀었는데 웬걸, 영어 버전이다.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우리말 버전으로 바꿔 틀어달라고 할까 봐, 약간 염려되었는데 다행히 군말 없이 잘 본다.
오늘은 등원 준비가 아주 매끄럽다. '물 흐르듯 한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아내가 아침으로 준비해 간 치킨은 왜 그리 잘 먹는지! 이렇게 잘 먹으니 내일 또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어린이집에서 정한 '주황색 데이'라, 거기에 맞춰 새로 산 주황색 윗옷에 블링블링한 치마를 입고 빨간색 구두를 신고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차 뒤에서 손녀딸은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와 역할 놀이를 한다. 뽀로로의 루피 인형과 패티 인형을 가지고 역할 놀이를 하는데 , 오늘 손녀딸의 연기가 압권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주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명연기를 펼친다. 애착 인형 보노는 차 앞 조수석에 놓아두었는데, 손녀딸은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보노의 존재마저도 잊은 채, 역할 놀이에 열중했다.
그러는 사이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손녀딸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루피하고 패티하고 노느라, 보노와 못 놀았다며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아내가 "순돌아, 그럼 보노 쪽쪽이 좀 하고 가."라고 했다. 보노 꼬리를 잠시 쪽쪽 빨던 손녀딸은 이내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보노 쪽쪽이 더 해도 된다고 해도, 손녀딸은 눈물 한두 방울을 양 뺨에 매단 채 차에서 내렸다. 얼른 내가 안았다. 보노와 더 있고 싶었겠지만, 어린이집에 왔으니 이제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다음 할머니를 한번 꼭 안아주고 소년딸은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등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 틈에 섞여 손녀딸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린이집에는 가야만 한다는 알고 있는 우리 손녀딸,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갈 때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우리 손녀딸, 기특하면서도 가슴이 재릿재릿하다.
손녀딸을 하원시키러 가는 길이다. 어린이집 주차장은 이미 만석일 걸 예상하고 근처 교회 주차자에 차를 대려는데, 교회 주차장도 꽉 차 있다. 아내를 먼저 내려주고 어린이집 주변 도로를 한 바퀴 돌아오면 교회 주차장에 주차할 곳이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없었다. 오히려 어린이집 주차장에 몇 군데 주차할 곳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곧장 어린이집 옆 놀이터로 향했다. 손녀딸이 놀이 있는 모습을 이미 봐 둔 터였다.
손녀딸은 같은 반 아이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미끄럼틀도 타고 술래잡기도 하고 놀이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잡기 놀이도 했다. 손녀딸 혼자 놀 때보다 제법 오래 놀았다. 역시 같이 놀 친구가 있어야 하나 보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딸네 집으로 가려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도서관에 가겠냐고 물었더니, 가겠다고 한다. 헌데, 막상 시립 도서관 지하에 주차하고 내리려고 하니 도서관에 가기 싫다며 보노를 끌어안는다. 다시 차를 몰아 딸네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자마자, 손녀딸은 곧바로 놀이 삼매경이다. 욕실로 들어가더니 손은 씻지 않고 세면대에 물을 가득 받은 다음, 장난감 물고기 잡기 놀이를 한참 동안이나 했다.
그러더니 거실로 쪼르르 나와, 이번에는 역할 놀이에 돌입한다. 역할 놀이 상대는 물론 할머니이다. 다채롭게 상황을 설정하며 할머니와 재미있게 역할 놀이를 한다. 둘이 정말 죽이 잘 맞는다. 손녀딸이 역할 놀이에서 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곤 한다. 손녀딸의 역할 놀이가 나날이 발전해서, 언젠가 완전 창작 역할 놀이를 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