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24. 11. 04.(월)
열이 내리지 않아 해열제를 먹이려는데 손녀딸은, "나, 조금만 아파."라고 하면서 한사코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약을 먹이는 데 실패를 거듭했다. 한참 뒤에도 열이 내리지 않아,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할 테고, 할아버지가 꼭 안고 아기처럼 약을 먹여 주겠다고 하니, 그제야 약을 먹었다. 약이 좋기는 좋다. 약을 먹인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열이 내렸다. 이럴 때는 현대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고기 뭇국에 만 밥을 제법 많이 먹고 사과와 배는 거의 다 먹더니, 손녀딸은 혼자 역할 놀이를 하며 재미있게 논다. 노는 모습만 보면 아픈 아이 같지 않다. 그러나 약간의 미열이 남아 있고 해서 늘 다니는 소아과 병원에 들러 우리 집으로 가기로 했다. 어린이집은 하루 쉬기로 했다. 손녀딸은 "오늘 어린이집 가는 날 아니야?"라고 물었다. 어린이집 가는 날이기는 한데, 오늘은 네가 많이 아프니 안 가도 된다고 하자, 더 이상 어린이집게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어린이집에 가겠다고 하는 손녀딸인데,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애착 인형 보노와 루피 인형, 패티 인형 등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손녀딸을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손녀딸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흔하지 않은 일이다. 손녀딸이 늘 다니는 병원이라 손녀딸이 거의 자기 놀이터인 양 여기는 곳이다. 나중에 아내에게 이유를 들어보니, 손녀딸 귀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귀지를 파냈다는 것이다. 손녀딸이 처음 보는 이상한 기구를 사용하여 귀지를 파냈는데, 그걸 보고 무섭다고 그렇게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아까 딸네 집에서 손녀딸이, 귀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다며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징징거렸는데, 혹시 이 어마어마한 귀지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약국에서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손녀딸은 사탕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캐릭터 인형(이름은 뭔지 모르겠음)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손녀딸은 원래 한 번에 한 개씩만 사는데, 어제 몸이 많이 아팠던 터라 제 엄마, 아빠가 내일 병원 들어 약국에 갔을 때 두 개를 사도 좋다고 허락을 했던 터였다. 아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캐릭터 인형 두 개를 골라 계산대 위에 척하니 올려놓는다. 할아버지 눈에는 그 모습 또한 예뻐 보이니, 가히 손녀딸의 마법이라 할 만하다.
손녀딸을 데리고 우리 집을 왔다. 어린이집이 문을 여는 평일 오전에 손녀딸이 우리 집에 오기는 처음이다. 처음이라고 하기에는 손녀딸은 너무 자연스럽다. 마치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가지고 온 인형들과 논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치대지도 않는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맛있게 먹으라는 듯,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혼자 잘 논다. 신통방통하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써야 할 듯하다.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더니, 손녀딸이 내복 바람으로 할머니 방 소파에서 보노를 안고 뒹굴고 있다. "이불 깔아 줄까?"라고 물었더니, 그러란다. 이불을 깔아 주니, 그 위에서 보노를 안고 다시 뒹군다. 내가 그 옆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손녀딸이, "할아버지 나가 있어. 나 혼자 있을래."라고 한다. 그래서 거실로 나왔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손녀딸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11시 40분쯤이다.
1시 조금 넘어 손녀딸이 잠에서 깨었다. 내가 가서 다리를 조물조물 주물러 주니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있는다. 그러더니 휙 돌아누워 이번엔 등을 긁어 달란다. 몸이 아픈 손녀딸이 해 달라는 걸 안 해 줄 도리는 없다. 어제 손톱을 깎은 터라, 손녀딸 등에 상처가 날까 싶어 조심조심 살살 긁어 주었다. 손녀딸은 매우 흐뭇한 표정이다. 가끔 내가 등 긁는 걸 멈추면, 어서 더 긁으라고 재촉을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사이에, 아내가 손녀딸 점심을 준비했다. 밥과 계란찜, 그리고 치킨이다. 손녀딸이 달걀찜이 아니라 계란찜을 해 달라고 했다. 달걀과 계란의 차이를 모르지는 않을 성싶은데,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손녀딸이 떼를 쓰기 시작하려는 전조였는지도 모르겠다.
손녀딸이 거실 식탁이 아니라 방에서 밥을 먹겠다고 해서, 아내가 방으로 밥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계란찜이 뜨거울 것 같아, 아내가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한번 뒤집었다. 그랬더니 손녀딸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계란찜을 먹었다고 생떼를 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당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새로 계란찜을 해 주었다. 이번에는 계란찜이 너무 조금이라고 먹지 않겠단다. 계란찜이 그릇에 꽉 차야 한단다. 할머니가 먹었다고 오해를 받은 계란찜과 새로 한 계란찜을 합쳐 그릇에 꽉 차게 했다. 그런데 이젠 밥이 적다고 난리다. 밥을 다시 데워 한 그릇을 만들었더니, 밥과 계란을 비벼서 달란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계란찜을 한 군데 넣고 간신히 비볐는데,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울면서 뭐라 뭐라 한다. 결국 점심을 먹지 않았다. 아, 그러기 전에 손녀딸이 계란찜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박한 이유를 하나 댔다. 제 엄마는 계란찜을 맛있게 잘 만드는데,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는 계란찜을 잘 만들지 못한다며 계란찜을 안 먹겠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다고 쳐도, 이 장면에 있지도 않은 이모할머니는 왜 갑자기 끌어들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야말로 이모할머니, 의문의 일패다.
결국 아내가 손녀딸을 거실로 데리고 나와 약간 나무랐다. 할머니가 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던 손녀딸이 갑자기 내게로 달려온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자기 이야기를 안 들어주었다며 고자질을 한다. 그러면서 우리끼리 있자고 방 문을 닫는다. 내가 손녀딸에게, "이건 순돌이가 잘못한 거니까 할머니한테 사과하자."라고 했더니 나에게서도 떨어져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방 문을 빼꼼 열더니, 엄마를 불러 달란다. 엄마 차 타고 자기 집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이럴 땐 가만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사과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혼자 방에서 있으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30분 넘게 시간이 흘렀다. 손녀딸이 방 안에서 무어라고 종알거리는 듯해서 손녀딸이 있는 방 문을 살짝 열었다. 손녀딸이 울먹이며 밖으로 나온다. 손녀딸이 보내는 화해의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손녀딸을 끌어안아 올리며, 할머니한테 사과하자고 하자, 그건 싫단다. 할머니와의 화해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아까 아내가 준비해 놓은 손녀딸 점심을 먹였다. 3시 30분 경이다. 계란찜에 비빈 밥도 치킨도 곧잘 받아먹는다. 아까는 그렇게 까탈을 부리더니.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평소보다 먹는 양이 적기는 적다.
이제부터는 사뭇 평화 모드다. 할머니에게 직접적인 사과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손녀딸이 먼저 할머니에게 말을 거는 등 암묵적으로는 사과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반드시 손녀딸에게서, "할머니 미안해요."라는 사과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어떤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이들 키우기가 결코 만만치는 않다. 손녀딸이라 더욱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후 나와 책도 읽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고 다리 찢기 놀이도 하고 입술 길게 내밀기 놀이도 하면서 깔깔대며 잘 놀았다.
딸내미 퇴근 시간에 맞춰 손녀딸을 딸네 집으로 데려갔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아내가 손녀딸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 손녀딸에게 할머니에게도 사과하면 좋겠다고 하니, 그제야 손녀딸이 "미안해요."라고 한다. 아무튼 해피 엔딩이다. 딸네 집에서 딸내미에게 손녀딸 약 먹이기에 대해 대강의 설명을 하고 나와 아내는 딸네 집을 나섰다. 긴 하루가 지났다. 퇴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