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동안 손녀딸은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냥 자게 내버려 두었다면 더 잘 수도 있을 듯했다. 그랬다간 어린이집 등원이 턱없이 늦어질 수도 있어, 여덟 시가 가까워지면 내가 손녀딸을 깨워 안고 나오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베이비 버스'라는 애니메이션을 틀어 놓고 손녀딸 방으로 들어갔다. "순돌아, 일어나야 되는데……."라고 말했더니 "조금만 더 자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손녀딸 침대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30초쯤 지났을까 "이제, 됐어."라며 손녀딸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딸네 집 거실이 좀 썰렁한지라, 손녀딸을 이불로 돌돌 말아 안고 거실로 나왔다. 손녀딸을 꼭 안고 거실 소파에 앉아 손녀딸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한동안 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등원 준비를 해야 한다. 등원 준비할 때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건 '아침밥 먹기'이다. 손녀딸은 아침으로 보통 과일 한 접시와 국에 만 밥 한 그릇을 먹는다. 과일은 제 스스로 먹는데 밥은 먹여주어야 한다. 오늘 아침 메뉴는 사과, 딸기, 귤, 비나나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썬 과일 한 접시와 동네 맛집에서 포장해 온 설렁탕에 만 밥 한 그릇이다. 설렁탕에 만 밥을 떠먹여 주니, 잘 받아먹는다. 입에 맞나 보다. 내가 먹어보아도 맛있다. 30분 정도 걸려 아침을 거의 다 먹었다.
옷 입히고 양치질시키고 등원 필수 품목을 챙겨 차로 향했다. 오늘의 등원 필수 품목은 애착 인형 보노, 립밤이 든 가방, 공주 놀이 스티커 등이다. 애착 인형 보노는 늘 함께해야 하는 품목이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바뀐다. 어린이집에 가지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차에 놓아두어야 하는데, 그래도 함께 가야 마음이 놓이는지 손녀딸은 꼭 무언가를 가지고 등원한다.
어린이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손녀딸과 아내의 역할 놀이가 시작되었다. 내가 들은 건 손녀딸이 아내에게, 엄마하고 자고 싶으면 엄마하고 자고, 아빠하고 자고 싶으면 아빠하고 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손녀딸의 말투에는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전해 들은 말인데, 손녀딸이 이렇게 덧붙였단다. 엄마한테 삐지면 아빠하고 자고, 아빠한테 삐지면 엄마하고 잔다고.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인데, 손녀딸이 역할 놀이를 통해 제 심경을 고백한 셈이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원감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런데 웬일인지 손녀딸은 원감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내가 인사를 하라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인사를 곧잘 하는 손녀딸인데, 이유를 모르겠다. 한 살 더 먹으면 인사를 잘하려나?
오늘은 나 혼자 손녀딸을 하원시키러 갔다. 유리문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손녀딸이 활짝 웃으며 뛰어나온다. 신발을 갈아 신기는 내게 손녀딸이 "오늘은 비가 안 올 것 같아."라고 했다.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는 얘기다.
손녀딸 손을 꼭 잡고 어린이집 옆 놀이터로 향했다. 차가운 날씨 탓에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미끄럼틀에 올라간 손녀딸은 미끄럼을 타지도 않고 다시 내려왔다. 친구들이 없으니 영 흥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차에 가서 따끈한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자고 하니 순순히 따라온다. 애나 어른이나 친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부르나 보다.
손녀딸을 차 뒷좌석에 태우고 딸네 집으로 향했다. 손녀딸은 솜사탕 먹기 삼매경이다. 그런데 잠시 후 손녀딸이 나한테 뭐라고 말을 거는 듯했다. 그래서 "순돌아, 뭐라고?"라고 했더니, "아니, 나 혼잣말하는 건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네 살배기 손녀딸 입에서 '혼잣말'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요즘 아이들의 언어 발달이 이토록 빠른가 싶다.
딸네 집에 도착해 손녀딸과 조금 놀고 있으니 딸내미가 퇴근해 왔다. 오늘은 '수학 놀이터'에 가는 날이다. 평소라면 셋이서 걸어가는데 날씨가 꽤 쌀쌀해서 내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돌아올 때는 손녀딸과 딸내미 둘이, 손녀딸이 좋아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걸어가기로 했다. 손녀딸은 그 식당의 옥수수 수프를 먹을 것이다. 손녀딸과 딸내미를 '수학 놀이터'가 있는 건물 앞에 내려주고 집으로 향했다. 퇴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