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2025. 03. 06.(목)
6시 30분쯤 딸네 집에 도착했더니 사위는 벌써 출근하고 없다. 손녀딸은 곤히 잠들어 있고 딸내미는 출근 준비를 다 마치고 있었다. 딸내미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손녀딸이 어린이집 같은 반 아이 '○율이' 이야기를 하며 한참 울다가 잠들었다는 것이다.
'○율이'는 지난해에도 손녀딸과 같은 반이었는데, 올해도 같은 반이 된 아이이다. 손녀딸에게 간간히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손녀딸이 같이 놀자고 해도 같이 놀아 주지 않고 손녀딸에게 "저리 가!"라고 말하곤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우리 부부나 딸내미는 손녀딸에게 "○율이가 나쁘네. 너는 그러지 말고 친구들하고 같이 놀아 줘."라고 말해 주곤 했다. 그런데 어젯밤 딸내미가 손녀딸에게 '○율이'와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물었더니, 손녀딸도 '○율이'에게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딸내미가 손녀딸에게 '○율이'가 나쁜 게 아니라 너와 좋아하는 놀이가 서로 다른 거라고 말해 주었단다. 그랬더니 손녀딸은 '○율이'가 나쁘다고 하며 울다 잠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나니, 이제 무조건 '○율이'가 나쁘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만약 '○율이' 일로 손녀딸이 속상해할 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딸내미와 아내와 함께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성싶다.
어젯밤 상황을 전해 준 딸내미가 출근하고 우리 부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계를 보니 7시 20분쯤이다. 아내가 후다닥 달려갔는데 이내 나온다. 아내가 "할머니 아침밥 준비할 테니 좀 더 잘래?"하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해서 나왔단다.
10분 정도 있다가 내가 손녀딸에게 가 보았다. 잠은 깬 듯하다. 눈은 감고 있지만 입은 애착 인형 꼬리를 쪽쪽 빨고 있다. 옆에 누워 토닥토닥해 주니,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있는다. 조금 있다가 "할아버지가 넘버 블록스 틀어 놓을까?"라고 했더니, 지금 나가겠다며 내 품에 안긴다. 이불로 손녀딸을 돌돌 말아 거실로 나왔다. 이제 제법 묵직하다.
등원 준비는 순조로웠다. 아내가 준비한 밥과 과일을 다 먹었다. 아내가 골라 온 옷도 한방에 오케이를 받았다. 다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치질할 때 거부감을 보였다. 바뀐 치약에 좀 더 적응해야 하나 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아내가 엄마, 아빠한테 인사하라며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으려고 했더니, 아주 깨발랄하게 인사를 한다. 딸내미와 사위가 이 영상을 보면 피로가 풀리리라.
아, 깜빡할 뻔했다. '넘버 블록스'를 보면서 손녀딸이 좋아하는 숫자를 알게 되었다. '넘버 블록스'를 보던 중, 손녀딸이 불쑥 "나는 one hundred가 좋아."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는 three가 좋은데."라고 했더니 손녀딸이 "그럼 나는 three와 one hundred가 좋아."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숫자도 좋아해 주는 건가? 그런데 잠시 후 손녀딸이 "나는 forty-nine도 좋아."란다. 결국 우리 손녀딸이 좋아하는 숫자는 'one hundred, three, forty-nine'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넘버 블록스'에 나오는 그 숫자들의 모습이 예뻐서일까? 언제 그 이유를 한번 듣고 싶기는 하다.
아내는 집에 있고 나 혼자 손녀딸을 하원시키러 어린이집으로 갔다. 그래야 아내가 조금이나마 쉴 수 있기에, 웬만하면 하원은 나 혼자 해 보기로 한 것이다. 손녀딸을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가 딸내미 퇴근 시간에 맞춰 딸네 집으로 데려다 줄 작정이다.
손녀딸이 아이들 무리에 섞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니, '5세'라고 적힌 표지 뒤에 앉는다. 작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왔는데 올해는 무언가 하원 방식이 바뀌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손녀딸이 나를 발견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하원 방식이 바뀐 것도 아닌가? 잘 모르겠다. 며칠 지켜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손녀딸은 명랑 쾌활 그 자체다. 나를 보자마자 잠시도 쉬지 않고 뭐라고 종알종알이다. 어린이집 옆 놀이터에 가서 미끄럼틀을 몇 번씩 타면서도 끊임없이 재잘댄다. 놀이터 옆 개울의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건너면서도 손녀딸의 재잘거림은 멈추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