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2025. 04. 11. (금)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손녀딸의 어린이집 등원 길에 빨간 불이 켜진 날이었다. 어제 일어난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등원 준비는 그야말로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현관에서 구두를 고르기 전까지는. 현관에는 손녀딸이 즐겨 신는 빨간 구두가 놓여 있었는데, 잠시 그 구두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손녀딸이 신발장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파란 구두를 찾았다.
'아, 큰일이다. 사달이 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돌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파란 구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달려와 다른 여러 가지 구두를 권해 보았으나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이건 작고 저건 크고 다른 건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오로지 파란 구두만 찾았다. 아내 말로, 그 파란 구두는 작아져서 이미 버렸다고 한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손녀딸 생각엔, 지금 자기가 입고 입는 옷에 어울리는 게 파란 구두라고 생각한 듯하다. 자기 나름의 패션 감각이 뚜렷한 다섯 살이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손녀딸의 신발장에 파란 구두는 없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파란 구두를 찾아 손녀딸에게 보여주며 사 주겠노라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손녀딸을 달래고 차를 타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애착 인형 '보노'를 데려가겠다고 한다. 다섯 살 된 후로 그런 적이 없었는데 무언가 위로가 필요했나 보다.
애착 인형 '보노'와 함께 어린이집에 가는 차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아내가 틀어준 겨울 왕국 타이틀곡 'Let it go'를 따라 부르며 신나게 갔다. 어린이집에 도착해 실내화로 갈아 신으려는데 갑자기 다른 실내화를 신겠단다. 마침 차 안에 다른 실내화가 한 켤레 있어 그걸로 갈아 신겼다. 오늘은 온통 '신발'이 주된 이슈다. 원하는 실내화로 갈아 신은 손녀딸은 평소와 다름없이 씩씩하게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우는 아이들을 종종 보는데, 우리 손녀딸은 신통하게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얼마나 다행인지!
오후 4시에 손녀딸을 하원시켰다. 어린이집 옆 놀이터에서 놀고 가겠단다. 단짝 친구인 '지○'와 놀기로 약속했단다. 그 아이는 4시 30분 하원이라, 30분을 손녀딸 혼자 놀아야 해서 좀 걱정했는데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아서인지 혼자서도 잘 놀았다. 그런데 4시 40분이 되어도 그 아이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손녀딸에게 '지○'가 그냥 집에 간 것 같으니 우리도 집에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손녀딸은 할머니 집에 가겠단다. 할머니 집에서 목욕만 하고 자기 집에 가겠단다. 아마 입욕제 때문인 듯하다. 입욕제 안에 어떤 캐릭터 인형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리라. 손녀딸을 데리고 집으로 가니, 아내가 딸네 부부도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곧 딸네 부부가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딸네 부부와 손녀딸은 '디트로네'라는, 손녀딸 말로는 '멋진 빠방이'라는 전동차를 타고 벚꽃 구경하고 집으로 간다며 길을 나섰다.
이게 또 다른 사달이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밤 9시 30분이 좀 넘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좀체 없었던 일이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보니, 딸내미다. 혹시 손녀딸 애착 인형 '보노'가 '젤리 카'에 있느냐고 묻는다. '젤리 카'는 우리의 경차에 손녀딸이 붙여준 이름이다. 아, 그렇다 손녀딸 애착 인형 '보노'는 '젤리 카'에 있었다. 딸네 부부가 손녀딸을 '디트로네'에 태워 집으로 갈 때 함께 보냈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손녀딸이 애착 인형 '보노'를 등원할 때 데리고 다니질 않았기 때문이다.
잠을 자려고 하는데 '보노'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손녀딸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귓가에 쟁쟁 울리는 손녀딸을 울음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서둘러 '젤리 카'를 몰고 딸네 집으로 향했다. 딸네 집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니 사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바탕 해프닝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딸내미에게 들은 이야기. 손녀딸이 애착 인형 '보노'가 없다고 울기 시작하자, 딸내미기 손녀딸에게 어디에 두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손녀딸은 '글쎄, 혹시 젤리 카에 두었나?'라고 했단다. 아침에 데리고 갔던 걸 기억해냈나 보다. 그래서 딸내미가 득달같이 내게 전화했다고 한다. 앞으로 '보노'는 데리고 다니지 말자고 손녀딸에게 다짐을 받는 게 좋을 듯한데,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손녀딸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손녀딸에게 위로가 되는 건 아직 '보노'만 한 것이 없을 테니 말이다.